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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계몽 운동에 헌신…정계 진출로 정치력 신장

120년이 넘은 한인 이민사는 도전과 인내, 굽히지 않은 신념과 세대를 거듭한 노력의 역사다. 1902년부터 1905년까지 한국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에 도착한 사탕수수밭 이민선조 7400여명부터, 1960~70년대 제2 이민물결로 LA와 전국 각지에 터를 잡은 현시대 이민 1세대 모두 오늘날 196만(2021 연방센서스 아메리칸커뮤니티서베이, 2022 한국 외교부는 255만 추산) 미주 한인사회를 가꾼 주인공들이다.     특히 소수계 커뮤니티에서 당당한 미국사회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노력은 1세기 동안 느리지만 단단하게 결실을 맺고 있다. 1950년 이전 이민선조와 자녀 세대는 한인이란 정체성과 조국사랑을 바탕으로 미국사회 일원을 강조했다. 현시대 한인 1세대와 자녀는 이민선조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아 정치력 신장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인 이민 120주년, 정치적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앞장선 이들을 알아봤다.   ▶서재필(필립 제이슨 서, 1864~1951)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자주, 자강을 주창했지만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천하에 그쳤다. 이후 서재필은 1885년 4월 미국으로 와 학업에 열중한다. 1889년부터 1892년 컬럼비아대 의학부를 졸업, 1892년 3월 한국인 최초 의사가 된다.     1895년 12월 조선 정부 초청으로 귀국 1989년 4월 7일 최초 민간신문이자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며 조선의 부국강병을 강조하지만, 민주주의 사상 전파로 추방된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당시 유학생과 한인들을 모아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며 식민지가 된 조국의 고통을 알리고 일본제국주의를 규탄한다.     서재필은 1922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동아일보·조선일보, 미국 신한민보’에 끊임없이 글을 기고해 국내외 한인 단합,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쟁취를 강조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안창호(1878~1938)   1900년 미국에 도착한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하고 이후 리버사이드, LA, 다뉴바와 리들리 지역을 돌며 한인사회 의식계몽과 생활향상에 앞장섰다. 1907년~1923년 사이 귀국해 민족 계몽운동에 힘썼고, 일제에 쫓기다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초를 다졌다.     1924년 미국에 다시 온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조직을 강화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혐의로 체포,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 등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3월 경성대학 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사망했다.   도산은 가주에서 한인사회 권익신장을 독려하고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공동체 화합과 단결, 정치력 신장을 위한 기틀을 다졌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이승만(1875~1965)   이승만은 1897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했다가 정치범으로 투옥된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와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귀국 후 일제강점기 105인 사건으로 1913년 하와이로 다시 왔다. 하와이에서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며 민족 교육과 선교 활동에 앞장섰다.   1919년 3·1 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고 미국 정부와 언론을 상대로 대한독립 필요성을 알렸다.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대한민국 독립과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귀국해 미군정 승인 아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김형순(1886~1977)·김호(1884~1968)   김형순(왼쪽사진)은 1903년 1월 13일 한인 첫 이민선의 통역 자격으로 미국에 왔다. 이후 본토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했다. 김호는 1912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자 망명, 1914년 미국에 와 대한인국민회 중심으로 활동했다. 두 사람은 1921년 가주 중부 리들리시에서 김형제(Kim Brothers)상회를 설립해 과수와 묘목 사업으로 성공했다. 미주 한인 최초 100만 장자로 불렸고 축적한 부를 조국의 독립운동과 캘리포니아 등 미주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지원했다. 연방농무부는 넥타린(Nectarine) 개발 보급을 인정해 김형순을 표창했다. 김호는1942년 LA시청에서 대한민국 독립 열망을 선포한 ’현기식‘에서 자주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렸다. 2006년 LA한인타운에는 김호의 독립운동 및 사회공헌 기리기 위해 한인 최초로 찰스 호 김 초등학교(Charles H. Kim Elementary School)가 설립됐다. 김형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김호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한인 이민선조의 자녀는 하와이와 본토 땅에서 태어나 한인 2세대로서 정체성을 확고히했다. 동시에 모국의 광복, 6·25 한국전쟁을 접하고 힘을 보탰다. 미국 사회에서는 공동체 발전을 위해 당당한 일원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김영옥(1919~2005)   김영옥은 1919년 한인 이민선조인 하와이 사탕수수밭 한인 노동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군에 입대, 혁혁한 공을 세워 훈장을 17개나 받았다. 참전 당시 부상을 당했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모국을 위해 재입대, 아시아계 중 최초로 연대를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한국전쟁 참전 후 전우들과 500여명의 고아를 돌본 일화도 유명하다.  김영옥 대령은 전역 후 LA 등 남가주 한인사회 발전에 헌신했다. 그는 가정상담소, 한미연합회, 이웃케어클리닉(전신 한인건강정보센터), 아태여성연합회 등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문대양(1940~2022)   1993년 하와이주 대법원장에 한인 3세인 문대양(당시 53세.영어명 로널드 문)씨가 지명됐다. 한인 이민 역사상 처음으로 주 대법원장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문대양 대법원장은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첫 이민 온 문정헌(할아버지)씨와 이만기(외할아버지)씨의 손자다. 하와이 첫 이민자의 손자가 주 대법원장이 된 사실 자체가 한인 이민사에 획을 그은 역사였다. 문대양 대법관은 생전 “할아버지로부터 내려 온 한국의 가족, 노동 등에 대한 가치를 배웠기에 한인 중 최초로 미국의 주 대법원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며 깊은 동포애를 나타냈다. 그는 2003년 미주 한인 이민 100년을 맞아 다이빙 영웅 새미 리, 야구선수 박찬호 등과 함께 ‘미주 이민 100년의 영웅 7인’에 뽑히기도 했다.   ▶송호연(1919~2004)   하와이에서 태어난 한인 2세 송호연(영어명 알프레드 송)은 1962년 아시아계 최초로 가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됐다. 하원의원으로 4년 동안 활동한 알프레드 송은 1966년에는 28지구 주 상원의원에 당선돼 4선의 경력 등 총 16년 동안 의정활동을 했다. 알프레드 송은 주 입법부 역사에 ‘경전’으로 불리는 ‘캘리포니아 증거법(California Evidence Code)’을 비롯해 소비자 보호와 소수계 권리 향상을 위한 법 등 정치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200여 개의 법을 제정했다. 2013년 LA카운티 메트로폴리탄 교통국(MTA) 이사회는 한인 이민사 110년 만에 처음으로 LA한인타운 중심부의 윌셔·웨스턴 전철역을 한인 이름을 딴 ‘윌셔-웨스턴 알프레드 호윤 송’ 역으로 변경했다.   ▶김창준(1939~)   남가주 다이아몬드바시 의원과 시장을 역임한 김창준은 1992년 연방 하원의원(가주 41지구)에 당선됐다. 이후 1998년까지 3선을 지냈다. 한국 출생인 김 의원은 이민 후 한인 최초로 연방 하원에 진출한 역사를 썼다.   2015년 UCLA 아시안 아메리칸 연구소가 발간한 ‘전국 아시아태평양계 정치인 및 공직자 연감’에 따르면 당시 지방 및 연방 정부 주요 선출직 및 임명직에 170명 이상(연방 정부기관 및 단체 26명, 연방 및 주정부 판사 27명, 주 의회 의원 및 지방정부 선출직 공직자 25명 이상)이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선출직 공직자는 데이비드 류 LA시의원, 미셸 박 스틸 오렌지카운티 수퍼바이저, 영 김 가주 하원의원, 제인 김 샌프란시스코 수퍼바이저, 최석호 어바인 시장, 론 김 뉴욕주 하원의원, 마크 장 메밀랜드 주 하원의원, 하와이주 도나 마카도 김 상원의원이었다.   2022년 현재 한인 선출직 정치인과 공직자는 지방 및 연방 정부에서 더 활약하고 있다. 특히 지난 11월 8일 치러진 중간선거에서는 앤디 김 하원의원(민주·뉴저지 3지구, 재선), 메릴린 스트릭랜드 하원의원(민주·워싱턴주 10지구, 초선), 미셸 박 스틸 하원의원(공화·가주 45지구, 초선), 영 김 하원의원(공화·가주 40지구, 초선)이 모두 연임에 성공했다.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세계한민족문화대전 -한인역사박물관·LA카운티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신년 8면 정치인 김형재 미주 한인사회 한인 이민사 사탕수수밭 이민선조

2023-01-01

“이민선조 독립운동 정신 계승”…임시정부 103주년 기념식

“자랑스러운 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합시다.” “어린이와 젊은이에게 선조들의 활약을 알립시다.” “한국 정부가 재외동포 역사를 기억하고 위상을 지켜줘야 합니다.”   한인단체가 연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3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11일 USC 인근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이 자리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예배당에는 주최 측 예상보다 많은 160여 명의 한인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수립과 재정지원에 헌신했던 이민선조 활약상과 민족정신을 계승하자고 강조했다.   임시정부 수립 103주년 기념식은 일제강점기 이민선조의 애국애족 정신을 잊지 말자는 자리였다.   대한인국민회에 따르면 1903~1945년 동안 미주 한인 1만 명은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을 중심으로 1909년 대한인국민회를 결성, 사실상 첫 해외 임시정부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이민선조들은 수십 만 달러를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자금을 댔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청사 렌트비도 미주 한인사회가 보낸 독립자금으로 가능했다.   실제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은 1919년부터 4년 동안 미주 한인사회가 보낸 독립자금이 90만 달러라고 발표한 바 있다.   대한인국민회 윤효신 이사장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민선조들은 어려운 환경에도 기꺼이 독립자금을 마련해 상해로 보냈다. 한인사회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다방면에 기여했다는 역사를 잊지 말자”고 말했다.   제임스 안 LA한인회장은 “일제강점기 미주 한인, 고려인 등은 해외에서 힘들게 살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재외동포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그에 걸맞은 위상을 찾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석호 가주 하원의원은 “우리 선조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은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였다며 “어린이와 젊은층이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도록 널리 알리자”고 강조했다.   한편 김영완 LA총영사는 김부겸 총리 기념사를 대독했다. 김 총리는 기념사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대한민국은 앞으로 한 분의 독립운동가라도 더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3주년 기념식은 참석자들의 만세삼창으로 마무리됐다. 글·사진=김형재 기자이민선조 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자금 이민선조 독립운동 이날 대한민국임시정부

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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