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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대 교수로 돌아온 천재소년

천재 소년으로 주목을 받았던 쇼 야노(사진)가 최근 시카고의대로 돌아와 연구와 수업, 환자 치료를 하고 있다.     올해 32세인 쇼는 한국인 어머니 진경혜씨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9살에 로욜라 대학에 진학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2살에는 시카고 의과대학의 MD/Ph.D 복수 과정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중앙일보를 통해 천재 소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후 18세에 분자유전학과 세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21세에는 시카고 의대 병원에서 소아과와 신경과 수련의 과정을 거친 뒤 두 개의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기에 이르렀다. 존스 홉킨스 병원과 국립보건원(NIH)에서 유전학의 일종인 medical genetics 연구로 전문의 자격을 추가로 취득하기 위해 약 5년간 시카고를 떠났던 쇼가 최근 돌아왔다.     지난 8월부터 모교인 시카고 의대에서 조교수로 일하면서 연구 활동도 하고 환자도 보고 있다. 현재 쇼는 시카고 의대에서는 뇌전증(epilepsy)와 근육긴장이상증(dystonia)의 유전적인 요인을 찾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천재 소년이 긴 연구 과정을 거치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을까? 쇼는 “4년 과정의 메디컬 스쿨과 5년 넘게 걸리는 박사과정을 마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가장 힘든 것은 학업이 아니라 차별이었다. 메디컬 스쿨을 12세라는 비현실적인 나이에 시작한 것도 문제였지만, 아주 어려 보이는 젊은 아시아인 레지던트와 마주한 환자나 보호자들에게는 아주 쉽게 차별의 타켓이 될 수 있었다"는 고충을 털어놨다. 아울러 “항상 잠이 모자랐던 힘든 레지던트 시기에도 계속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도움은 주변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쇼는 “다행스럽게도 따뜻하게 살펴주신 교수님들과 동료들의 격려로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힘을 많이 받았다. 내가 아는 만큼 환자들과 그들 가족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도 큰 위로가 됐다"고 설명했다.     학업 능력이 뛰어나 또래와는 다른 진도로 공부를 했던 쇼는 홈 스쿨링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쇼는 “홈스쿨링을 아주 즐겁게 했다. 내 진도대로 배우고 싶은 만큼 마음껏 배울 수 있었고 부모님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셨다”며 “4살 때 사립 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끝내고 그 후 영재학교(highly gifted school)로 옮겨 3년간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경우가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홈스쿨링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특별히 일반적인 학교 과정를 다 안 거쳤다고 해서 섭섭한 점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쇼의 동생인 사유리 역시 본인이 원하는 분야에서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카고를 떠나 있는 동안 시카고 미술관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특별히 그리웠다는 쇼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와 지도, 환자 치료를 계속할 계획이다.  Nathan Park 기자시카고의대 천재소년 최근 시카고의대 시카고 의과대학 시카고 의대

2023-09-20

미국인 과반수 '어퍼머티브 액션' 폐지 지지

미국인 중 절반 이상이 대학 입학 시 소수계 인종을 우대하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이 위헌이라고 판결한 연방대법원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ABC방송과 여론조사 업체 입소스가 지난달 30일부터 이틀간 전국의 성인 937명을 대상으로 실시, 2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어퍼머티브 액션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위헌 결정에 전체의 52%가 '지지한다'고 답했다. '반대한다'는 응답은 32%, '모르겠다'는 답변은 16%였다.     특히 이번 여론조사에서는 인종별로 답변이 극명하게 갈렸다. 다수의 백인(60%)과 아시안(58%)은 연방대법원의 어퍼머티브 액션 폐지 결정을 지지하는 반면, 흑인 중에는 지지하는 비율이 25%에 불과했다. 히스패닉 중 찬성 비율은 40%였다.     이처럼 어퍼머티브 액션 폐지 결정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절반을 넘어섰지만, 백인과 아시안 학생들이 인종 문제로 불이익을 받았다고 보는 비율은 각각 9%, 22%로 의외로 낮은 수준이었다.   한편 연방대법원이 어퍼머티브 액션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림에 따라, 대학가는 다양한 대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뉴욕타임스(NYT)는 지원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하며 겪은 어려움을 가산점 요소로 평가하는 이른바 '역경 점수'(adversity scores)가 주목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NYT는 2019년 SAT를 관장하는 칼리지보드가 도입한 '역경 점수'와 함께 2012년부터 운영 중인 UC 데이비스의 학생 선발 과정을 소개했다. UC 데이비스 의과대학은 자체적으로 마련한 '사회경제적 차별 척도'(SED)에 따라 모든 지원자를 0∼99점으로 등급을 매긴다. 이를 학교 성적, 시험 성적, 추천서, 자기소개서 및 면접 점수 등 지표와 종합한 점수를 통해 최종적으로 합격자를 가려내는 것이다. 다만 NYT는 사회경제적 요소를 대입 평가요소로 등급화하는 것에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도 있다고 언급했다. 위헌 결정 당시 존 로버츠 대법관이 제시한 다수의견을 보면, 인종을 입시에서 우대하기 위한 '대리적 방식'(proxies)도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명시됐기 때문이다. 김은별 기자 kim.eb@koreadailyny.comNYT 미국 액션 폐지 위헌 결정 데이비스 의과대학

2023-07-03

의과대학 진학과 MCAT 점수 [ASK미국 교육-폴 정 박사]

▶문=의대에 진학하려면 MCAT에서 고득점을 받아야만 하는가?       ▶답=MCAT에서 고득점을 받아야 만이 의대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시간 공부해도 520점이 넘는 고득점을 받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510점을 넘지 못하고 고전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캠프가 끝난 후에도 캠프에서 하던 대로 지속적으로 자기관리를 해서 그 후에도 좋은 결과를 갖고 지원서를 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지만 능력과 상황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과연 이 점수를 가지고 의대를 지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생기기 마련이다.   의대 합격한 학생들의 MCAT 평균 점수는 528점 만점에 512점이다. 굉장히 높은 점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낮은 점수는 472점이고, 501점이 대략 중간 점수인 50% 정도에 해당된다고 보면 512점은 84%가 좀 넘는 수준이다. 주변에 명문 의대를 합격한 사람들이 99%를 당연한 듯이 이야기해도 평균 점수를 보면 꿈도 꿀 수 없는 점수는 아니다. 의대 진학에 성공한 학생들 중에는 MCAT 점수가 510점이 채 안 되는 학생들도 상당히 많다.   MCAT에서 고득점 받을수록 의대 합격할 기회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꼭 고득점을 받아야만 의대를 진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고득점의 점수를 받았다고 의대 합격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의대 입시는 어느 정도의 기본 능력이 되면 MCAT 점수 이외에도 의대에서 요구하는 자격조건으로 성실함과 능력을 고려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좋은 점수를 받고 의대에 합격한다 해도 의대 공부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지도하다 보면 학점과 MCAT 점수 때문에 여려움을 겪었던 학생이 진학에 성공해서 공부와 실습에 적응도 잘하고 실력 발휘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모든 자격 능력 시험이 그렇듯 어렵더라도, 그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그다음 단계에는 또 그때에 필요한 능력과 요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스케줄에 따라 강의와 문제풀이를 반복하면서 얼마큼 공부해야 할지,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 정확히 분석하고 이를 보충하면서 실전 시험을 위한 전략과 전술을 경험자들로부터 조언 받고 공부하다 보면 고득점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5주 정도 하고 나면 학생들은 스스로 효율적인 공부 계획을 세우고 집중하는 2~3개월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문의:(703)789-4134  폴 정 박사미국 의과대학 의과대학 진학 의대 진학 평균 점수

2023-05-10

[이 아침에] 부활의 찬가

5년 만의 한국 나들이다. 역시 봄은 한국이 최고다. 산기슭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만발하고 개천가엔 노란 개나리가 한창이다. 절로 기지개가 켜진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동토의 바위틈에서 진달래꽃이 눈에 뜨이면, 우리는 불원간 온 산야에 진달래꽃이 만발하는 봄이 찾아옴을 알 수 있다.                                       4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부활절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부활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올 부활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꿈과 희망을 잃는 순간 삶을 잃는다 했다. 인간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성장하지 않으면 노화된다는 말이다.   성경에는 인간 수명이 120세로 나와 있다. 현대 의학자들의 견해 또한 그와 엇비슷하다. 그래서일까?  요즘 많은 이들이 ‘인생  백년 4계절’ 이야기를 많이 한다. 25세까지가 봄, 50세까지가 여름, 75세까지가 가을, 100세까지가 겨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내 인생의 계절은 지금 어느쯤일까?     각자의 계절을 알고 싶다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다. 길을 걷다 들꽃이 눈에 들어오고,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슴 설렌다면 당신은 인생의 봄을 맞이하고 있다는 증거다. 혹시 걷잡을 수 없는 꿈과 열정으로 잠을 못 이룬다면, 당신의 계절은 신록이 무성한 여름이다. 굶주린 사람의 눈물어린 눈망울 앞에 연민의 정으로 걸음을 멈춘다면, 당신은 풍성한 과일을 맺는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길을 되돌아보며 모든 삶이 은혜였음을 깨닫고 감사한다면, 그건 분명 인생의 계절 겨울 아니겠는가.   그런데 노년에도 꿈과 열정으로 자신의 삶을 성장시키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그런 분들 가운데 한 분이다. 103세인 그는 요즘도 칼럼을 쓰고 강연을 한다. 그분은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은 꿈과 열정으로 살고 있다. 사회 부조리에 분노하고, 지구 생태계를 걱정하고, 국민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정과 정직을 말씀하신다. 아직도 단정한 몸가짐에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 확신과 신념에 찬 의연한 모습은 바로 꿈과 열정이 인간의 뇌세포를 젊게 만들어 준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4월의 부활절을 앞두고 오랫동안 소식 없이 지내온 의과대학 동창분이 카톡으로 글을 보내왔다. 대학 때 약간 한량(?)처럼 지내다 일 년 유급하여 같은 해에 졸업한 선배뻘 동창이다. 한데, 몇 년 전 만났던 그는 동창 중 가장 멋지고 젊은 모습의 새 사람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의 시 같기도 하고, 신앙고백도 같은 우정의 글이다. “사랑하는 벗이여! 너는 아는가? 눈보라 치던 겨울을 이기고/ 새하얀 눈이 녹아 흐르는 실개천에서/ 개울가에 눈뜬 갯버들에서/ 새하얀 눈 속에 부끄러운 듯 숨어 보이는 홍매화의 꽃망울에서/ 담낭이 개나리마다 노란 꽃순에서 머리위 가슴저리도록 맑고 푸른 하늘을 이고/ 향긋하게 불어오는 봄바람 맞으며/ 정다운 나의 친구야, 너는 아는가? 우리들 심령에 찾아드는 4월의 “예수 부활”의 기쁜소식 가슴에 안고 /우리 한번, ‘새사람’되어 /신바람나게 부활의 찬가 불러보자”   친구의 변화된 모습 안에서, 부활이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삶을 사는 새사람(에페소서 4:24)”으로의 탈바꿈으로 선명하게 다가온다. 마치 나방이에서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그 황홀한 신비처럼 부활절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가슴 설레는 꿈이며 희망 아니겠는가.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이 아침에 부활 찬가 예수 부활 계절 겨울 의과대학 동창분

2023-04-07

한인, 의료역학학회 연구위원장에 선임…제니 권 WUSTL 조교수

세인트루이스주 워싱턴대(WUSTL)는 지난 28일 의과대학 감염내과 조교수인 제니 H. 권(사진) 박사가 의료역학학회(SHEA) 연구위원장으로 선임됐다고 발표했다.   SHEA는 감염 예방 및 항생제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와 기타 의료 전문가들로 구성돼 미국감염학회(IDSA), 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의학회(HIVMA), 소아감염학회(PIDS)와 함께 4대 감염 관련 학회로 통한다.   대학 측은 권 박사가 환자와 의료 종사자가 얻는 감염을 줄이고 위험한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의 확산을 제한하기 위한 연구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해당 연구는 국립보건원(NIH),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의료관리품질조사국(AHRQ) 및 다양한 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     더불어 권 박사는 현재 학부생, 박사후연구원, 대학원생, 펠로우, 레지던트에게 항생제 내성 및 감염 예방 연구를 멘토링하고 있다.     대학 측은 “권 박사의 연구소 핵심은 연수생에게 개인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지식, 기술 및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그는 각 멘티와 협력해 그들의 목표를 이해하고 개별화된 경력 개발 계획을 만들어 멘티가 자신의 잠재력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다”고 강조했다. 장수아 기자 jang.suah@koreadaily.com의료역학학회 연구위원장 한인 의료역학학회 의과대학 감염내과 항생제 내성

2023-03-02

[삶과 추억]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별세

보수진영 원로 인사인 김동길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4일(이하 한국시각) 별세했다. 94세.   5일 유족에 따르면 숙환으로 입원 중이던 김 교수는 전날 오후 10시 30분께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지난 2월 코로나19에 확진됐다가 회복했지만, 3월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해 입원 뒤에도 상태가 호전되지 못했다.   1928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6년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자 월남해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미국 에반스빌대와 보스턴대에서 각각 사학과 철학을 공부해 문사철(文史哲)을 섭렵했고 100권 안팎의 저서를 남겼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회운동·현실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군부독재 시절 사회·정치 비판적인 글을 쓰다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기소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연루되며 대학에서 두 차례 해직됐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15대 총선을 앞두고 탈당하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나비넥타이와 콧수염을 트레이드 마크로 삼은 고인은 1980년대 정치평론을 하면서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말년에는 보수진영 원로이자 보수논객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생전에 “자살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난해까지도 유튜브 채널 ‘김동길TV’를 운영했다. 올해 초에는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선 후보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고인은 생전 서약에 따라 시신을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했다. 서대문구 자택은 누나인 고 김옥길 여사가 총장을 지낸 이화여대에 기부한다.   장례는 자택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으로는 누이인 옥영·수옥씨가 있다. 발인은 오는 7일이다.삶과 추억 명예교수 김동길 김동길 연세대 연세대 사학과 연세대 의과대학

2022-10-04

[오픈 업]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지켜야해”

19세기 중엽, 여성 해방운동이 시작되던 무렵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엘리자베스 블랙웰(Elizabeth Blackwell) 이라는 스무살 처녀가 투병 중인 이웃집 메리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에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뉴욕으로 이주했다 다시 이사를 했습니다. 9명의 형제 중 셋째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당신은 공부하는 걸 좋아하고, 몸도 건강하니 의사가 되면 어떨까요? 제 의사는 너무 냉정하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데다 자궁 검사를 너무 아프게 하기 때문에 치료받는 것을 포기해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17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이런 끔찍한 시술 장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치료법은 히포크라테스 때부터의 영향으로 질병은 4가지 체내 물질의 균형이 깨짐으로써 생긴다는 가설 아래, 피뽑기, 물집 터트리기, 설사시키기 등이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의사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굳혔지만 이번엔 가족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스토우( Stowe) 부인마저 심한 차별대우로 고생을 할 거라며 강하게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친구 메리처럼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기 싫어 많은 여성이 자궁암으로 사망하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자금 마련부터 시작했습니다.     음악 교사로 남부의 학교에 취직한 그녀는 그곳 교장이 과거 의사였음을 알았습니다. 교장의 허락으로 많은 의학 서적들을 읽으며, 자신의  선택에 더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3000달러(현재로 환산하면 약 9만5000달러)가 모이자 그녀는 의과대학이 많은 필라델피아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미국 최초의 의과대학인 펜실베이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등 4개의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당시 여학생을 받아주는 대학조차 전국에 두세 곳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여자 교사 양성이 목적이었고, 의과대학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전국의 의과대학에 입학신청서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의사 중에는 그녀의  강한 의지에 감동해 의대 준비에 필요한 해부학이나 생리학 등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여성에게 적합한’ 간호사가 되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9개 의대에서 입학 거절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의과대학 수업이 시작된 10월이 훨씬 지난 어느 날 뜻밖에도 뉴욕주 서부의 작은 도시 제네바에 있는 의대로부터 입학 허가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식 허가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었던 워링턴 박사라는 분이 간곡히 입학을 부탁하자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 교수들이 학생 찬반 투표를 통해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정도 모른 채, 제네바시로 달려간 그녀는 방을 얻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자 의사를 본 적이 없던 주민들은 그녀를 불법 낙태 시술자로 오인해 아무도 방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의대생들은 찬반투표가 건너편 마을에 있는 경쟁 의과대학에서 만들어낸 장난이라 여겨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고 합니다. 나중에 강의실에 들어온 그녀를 본 순간 129명의 남학생은 충격에 빠졌다고 합니다.   방학이 되면 의대생들은 큰 병원에서 실습해야 되는데, 불행히도 그녀를 위해 추천서를 써주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빈민들을 위한 자선병원으로 가 진심으로 환자들을 돌보며 방학을 보냈습니다.   1849년 1월 23일 그녀는 드디어 수석으로 의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졸업 소식은 많은 여성 의사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줬습니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간 엘리자베스는 다른 여의사들과 함께 여자 의과대학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올리비아 캠블이라는 언론인이 쓴 ‘위민 인 화이트 코츠(Women in White Coats)’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여자 의과대학 수업 여자 교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2022-08-17

[오픈 업]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지켜야해"

19세기 중엽, 여성 해방운동이 시작되던 무렵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엘리자베스 블랙웰(Elizabeth Blackwell) 이라는 스무살 처녀가 투병 중인 이웃집 메리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에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뉴욕으로 이주했다 다시 이사를 했습니다. 9명의 형제 중 셋째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당신은 공부하는 걸 좋아하고, 몸도 건강하니 의사가 되면 어떨까요? 제 의사는 너무 냉정하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데다 자궁 검사를 너무 아프게 하기 때문에 치료받는 것을 포기해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17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이런 끔찍한 시술 장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치료법은 히포크라테스 때부터의 영향으로 질병은 4가지 체내 물질의 균형이 깨짐으로써 생긴다는 가설 아래, 피뽑기, 물집 터트리기, 설사시키기 등이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의사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굳혔지만 이번엔 가족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 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스토우( Stowe) 부인마저 심한 차별대우로 고생을 할 거라며 강하게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친구 메리처럼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기 싫어 많은 여성이 자궁암으로 사망하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학자금 마련부터 시작했습니다.     음악 교사로 남부의 학교에 취직한 그녀는 그곳  교장이 과거 의사였음을 알았습니다. 교장의 허락으로 많은 의학 서적들을 읽으며 ,자신의  선택에 더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3000달러( 현재로 환산하면 약 9만5000달러)가 모이자 그녀는 의과대학이 많은 필라델피아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미국 최초의 의과대학인 펜실베이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등 4개의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당시 여학생을 받아주는 대학조차 전국에 두세 곳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여자 교사 양성이 목적이었고, 의과대학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전국의 의과대학에 입학신청서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의사 중에는 그녀의  강한 의지에 감동해  의대 준비에 필요한 해부학이나 생리학 등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여성에게 적합한’ 간호사가 되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9개 의대에서 입학 거절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미 의과대학 수업이 시작된 10월이 훨씬 지난 어느 날 뜻밖에도 뉴욕주 서부의 작은 도시 제네바에 있는 의대로부터 입학 허가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식 허가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었던 워링턴 박사라는 분이 간곡히 입학을 부탁하자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 교수들이 학생 찬반 투표를 통해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정도 모른 채, 제네바시로 달려간 그녀는 방을 얻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자 의사를 본 적이 없던 주민들은 그녀를 불법 낙태 시술자로 오인해 아무도 방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의대생들은 찬반투표가 건너편 마을에 있는 경쟁 의과대학에서 만들어낸  장난이라 여겨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고 합니다. 나중에 강의실에 들어온 그녀를 본 순간 129명의 남학생은 충격에 빠졌다고 합니다.    방학이 되면 의대생들은 큰 병원에서 실습해야 되는데, 불행히도 그녀를 위해 추천서를 써주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빈민들을 위한 자선병원으로 가 진심으로 환자들을 돌보며 방학을 보냈습니다.   1849년 1월 23일 그녀는 드디어 수석으로 의과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졸업 소식은 많은 여성 의사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줬습니다. 이후 영국으로 돌아간 엘리자베스는 다른 여의사들과 함께 여자 의과대학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올리비아 캠블이라는 언론인이 쓴 ‘위민 인 화이트 코츠(Women in White Coats)’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여자 의과대학 수업 여자 교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2022-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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