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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모교 정신 구현할 것” 남가주연세대동문회 신임회장단 인터뷰

창립 59주년을 맞는 남가주 연세대 동문회가 새해를 맞아 커뮤니티와 함께 하는 활동을 재개한다.   올해 동문회를 이끄는 연세대 의대 출신의 김영숙(영어명 수잔 정) 신임 회장은 “팬데믹으로 중단됐던 한인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한 건강 박람회를 올해 다시 시작하려고 임원단과 계획하고 있다”며 “LA에서 활동하는 연세대 의대 출신 동문이 함께 참여해 많은 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독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시작된 연대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인류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정신”이라며 올해도 유학생 후원 행사 및 가정 세미나, 비영리단체 지원 등을 통해 한인 커뮤니티와 함께 하는 동문회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심선희 부회장은 “팬데믹 기간에 산하 단체들의 활동이 많이 주춤했지만, 작년부터 다시 모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며 “특히 여성 동문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여 동문회를 활성화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남가주에만 2000여명의 회원이 등록돼 있다는 연세대 동문회는 새해 초부터 활발한 활동 중이다.     지난 4일 연세 동문 목사들의 모임 ‘연목회’ 신년 하례식을 가졌으며, 5일에는 정치외교학과 출신 이춘근 박사를 초청해 한반도 정세를 듣는 강연회를 진행했다. 또 6일에는 연세 조찬 기도회로 모였다. 오는 20일에는 간호대 동문회가 주도하는 멕시코 리비에라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   5월에는 윤동섭 연세대 총장과 이경률 연대 총동문회장이 참석하는 골프 토너먼트가 예정돼 있으며, 이밖에 연세 콰이어 정기연주, 동문과 가족을 위한 피크닉, 젊은 동문 모임과 원로 동문 잔치 등도 준비하고 있다.   이원모 사무총장은 “동문회의 주요 목적은 동문 사이의 긴밀한 소통 및 선후배 간의 강한 유대감과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웹사이트, 이메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젊은 동문의 참여를 증진하기 위해 학과별 동문회와 산하 단체들과의 소통을 더욱 활성화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남가주 동문회에는 현재 연세여동문회, 연세콰이어, 연세골프회, 연세축구회, 연세산악회, 와사연, 연목회, 조찬기도회 등이 산하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400명이 넘는 동문으로 성장한 YGCEO(연세 최고 경영자 과정)와도 긴밀하게 협력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새로 온동문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만나서 새로운 정보와 친목을 나누길 기대한다”며 연세 동문의 연락을 부탁했다.     ▶문의: (213)618-6843 이원모 사무총장 또는 info@yonseinsc.com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게시판 연세 남가주연세대동문회 신임회장단 연세대 동문회 남가주 연세대

2024-01-22

[김형석의 100년 산책] 절대 ‘꼰대 할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꼰대’라는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예전에 나이 든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하면서 E군의 조부 얘기를 소개했을 때였다. 강연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손자 결혼에 반대한 할아버지   E군은 대학을 끝내고 군에 입대하면서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약속했다. 자기가 군에서 제대하고 여친도 대학을 졸업하면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결혼하기로 했다. 그 뜻이 이루어져 두 젊은이는 인생의 아름답고 행복한 꿈을 간직하게 되었다. 남은 문제는 E군 할아버지의 허락이었다. 할아버지는 E군이 장손이고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여서 두 가지 문제만 없으면 결혼하라고 했다. 우선 사주가 좋아야 하고, 또 우리 가문을 위해서라도 상대방이 천민 직업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조건이었다.   다행히 사주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상대방 집안도 명문가인데 양가 선조들이 한양에 살았을 때 서로 원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놈의 집안과는 혼인을 맺을 수 없다. E군 증조할아버지가 유언까지 남겼다는 것이다. 그런 사태에 직면한 E군 부친은 고민에 빠졌다. 생각 끝에 E군 여친 아버지를 찾아가 양해를 얻었다. 할아버지 연세가 높으시니까 아들·딸들의 장래를 위해 좀 기다리기로 하자는 합의였다.   극단적 이념대립의 부작용   이런 얘기를 끝냈는데 내 강연을 들은 몇 사람이 ‘그런 꼰대 할아버지’가 아직도 있을까, 라면서 웃음 반, 걱정 반이었다. 나는 속으로 가정을 위해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꼰대 기성세대’가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다음부터 한동안은 ‘꼰대’라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 유행했다. 꼰대 상사를 모시고 일하는 부하들, 생각과 사고방식에 융통성 없는 지도자들, 뜻밖에도 꼰대가 없는 사회를 책임져야 할 일부 종교계 지도자들까지도 정신적 꼰대를 면치 못하는 사례가 떠올랐다.     종교 국가라고 볼 수 있는 인도나 중동지역에 가면 그런 현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꼰대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극단적인 보수 진영이나 좌파 정치인들 대부분이 그렇다.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극렬한 정치이념에 빠진 사람들은 그 꼰대 정신을 정치적 수단이나 상품화하기도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일관계도 그렇다. 두 민족이 불행했던 과거의 원한과 적개심을 다 해결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우호 관계나 친일외교를 할 수 있느냐고 국민을 선동한다. 개인 간에서도 원수는 끝까지 갚아야 하고,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편 가르기를 하는 사고방식을 극복하지 못하면 국가의 미래와 젊은 세대 장래를 누가 책임지겠는가.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21세기   나같이 일제강점기를 산 사람은 ‘꼰대 관념’을 벗어나기 힘들어도 해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부터는 국민 장래를 위해서라도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세대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회라면 몰라도 21세기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사의 희망을 위해서라도 반(反)사회, 반(反)역사적인 꼰대 정신은 극복해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이 일본의 아베 정권과 우리 문재인 정부 때를 연장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이유이다.   그런데 예상 못 했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꼰대라는 말은 줄어들고 있는데 새로운 꼰대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는 현실이다. 한때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인 ‘노사모’가 생겼고, ‘박사모’가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 좋은 일은 아니나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문빠’가 등장하고 ‘개딸’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새로운 ‘젊은 꼰대’가 사회의 혼란과 폐습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국민 다수가 ‘내로남불’이 되니까 무감각한 사회병이 되었는데, 지금은 꼰대 정신이 더 넓게 번지는 것 같다. 공산사회에서 흔히 보던 현상이고 독재정권이 조작해 정치 수단으로 삼았던 나라병을 걱정할 처지가 되었다.   ‘꼰대 할아버지’는 자연히 사라지겠지만 꼰대 정치 세력은 앞으로도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걱정하는 젊은 세대의 꼰대들은 관념의 한계를 넘어 행동화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꼰대가 깡패 행태까지 겸하게 되면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조성한다. 정치 지도자들까지 그런 꼰대 정신, 폭력 의지를 수용하면 국가적 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 히틀러가 그랬고 마오쩌둥(毛澤東)도 같은 길을 따르지 않았는가.   폐쇄적 사회는 오래가지 못해   우리가 지향하는 21세기는 두 가지 주어진 목표가 있다. 자유를 각자가 누리면서도 윤리적 가치가 유지되는 사회, 인간적 가치가 인간애의 정신으로 공존이 존중시되는 세계 역사의 길이다. 고정관념이나 집단적 이기적 절대가치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꼰대 정신이 지배하는 국가와 사회는 그 폐쇄적 사고와 가치관 때문에 스스로 종말을 자초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애국심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선한 가치와 질서를 창조 육성하며, 휴머니즘을 존중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책임이다. 보편적 가치를 역행하는 노동운동, 역사적 진실을 왜곡시키는 정치적 목적의식, 인간의 가치와 생명력을 훼손하는 허위와 위선 모두가 꼰대 정신과 연결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어둡게 만드는 죄악을 범해서는 안 된다. 진실·자유·인간애는 자유민주 정신의 근원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할아버지 사회 e군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연세 좌파 정치인들

2023-06-23

"글로벌 최고경영자 과정 수강하세요"…연세대 글로벌CEO 총연우회

연세대 글로벌CEO 총연우회(YGCEO, 회장 장준)가 업그레이드된 연세대 글로벌 최고경영자 과정(YGAMP) 제8기 수강생을 모집한다.   YGCEO는 오는 7월 13일부터 8월 12일까지 5주간 매주 3회(목, 금, 토요일) USC 공대 강의실에서 제8기 연세 글로벌 최고경영자 과정을 진행한다.   YGCEO 장준 회장은 “연세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8기부터 AMP 과정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졸업생들에게 연세대 동문회 정회원 자격이 부여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현직 교수들의 명강의는 물론 280여 졸업생들과의 네트워킹 등 배움과 만남의 기회가 될 것“이라면서 한인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장 회장은 “동문회 준회원 자격이 부여된 기존 졸업생들도 내년 3월부터 온라인 3개월 과정을 추가 수료하면 정회원으로 승격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과정에는 연세대학교 김상근, 최선미, 허현승, 조창환, 박희준 교수가 강사로 초빙돼 리더십, 기업 운영/관리, 경제 진단/전망, 디지털마케팅, 불확실성 시대의 생존/성장 전략 등의 주제로 강연에 나선다.   3기 송인선 동문은 “교육을 받으면서 한국 명문사학의 강의를 체험해보고 싶어 참여했는데 대만족”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3기 피터 이 동문도 “강의 내용은 물론 좋은 분들과 새로운 만남을 통해 네트워크를 구출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을 보탰다.   모집 인원은 미주지역서 비즈니스 활동을 하고 있는 최고경영자, 관리자 혹은 이에 준하는 40명으로 등록 마감은 내달 30일까지며 수강료는 5000달러다. 수강 기간 USC 주차증도 제공된다.   수료생 혜택으로는 연세대총장과 미래교육원장 공동명의 수료증 발급을 비롯해 본인과 직계가족 대상 세브란스병원 건강검진 20% 할인, 수강 학기에 한해 연세대 중앙도서관 이용 가능한 학생증 발급 등이 제공된다.   문의는 이메일(YGCEOus@gmail.com) 또는 전화(213-316-8989/714-315-3838)로 하면 된다. 박낙희 기자글로벌 최고경영자 연세대 동문회 연세 글로벌 YGCEO AMP YGAMP 연세대

2023-05-24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말라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 그런데도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마음이, 맘이 아파서였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들이,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현실이 너무 힘이 들어서 글로라도 풀어야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년퇴임 후 나에게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암울한 시기가 있었다. 이 암울은 그 이전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나, 좌절은 그 이후에 서서히 무기력으로 나를 탈진시켜갔다. 나의 삶이 거기에서 끝나버리는 것 같은 절망과 좌절에 대한 회한 속에서 언제까지고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치에서 빠져나오듯 '나'로부터 해방되어지는 변화를 맞이했다. 내 미망(迷妄)을 흔들어놓은 한 권의 책. 그것은 생떽쥐베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였다.   〈인간의 대지〉는 일종의 자전적 소설이므로 대부분 에피소드는 실제 있었던 일이고, 등장인물도 실존인물들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야.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고." 〈인간의 대지〉 주인공은 막 항공회사에 입사한 '나'다. 작품은 주인공이 항공회사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야간비행 중 만나는 별들을 보면서, 무한하면서도 고요한 하늘을 날면서 인생에는 물질적인 것 이상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다. 물론 고요하고 아름다운 일만 있지는 않다. 사막에 비행기가 추락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사막에서 베드윈 원주민과 사막여우를 만나기도 하고, 선인장과 바오바브 나무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했던 동료들을 잃기도 한다. 사랑했던 동료 메르모스의 죽음은 가장 큰 아픔으로 그려져 있다. 어느 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하늘로 사라져서는 돌아오지 않은 동료를 떠올리며 주인공은 인간의 책임감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게 된다. 또한 추락사고 이후 오지에서 끝내 살아 돌아온 동료 기요메에게서는 불굴의 의지를, 배운다.     기요메는 불시착한 안데스 산맥에서 그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구조자가 되어 한 발 한 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얼어터진 발꿈치가 들어갈 수 있도록 구두 뒤축을 수없이 잘라내며 필사적인 행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죽음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도 어디선가 재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나의 건재함을 알려야 한다. 그들에게 내 생명의 손짓을 보내야 한다.  "나, 여기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사랑보다 더 깊은 연민으로부터 그들을 구제해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을 구제함으로써 나 또한 구제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날카롭게 내 머리를 때렸다.     나를 변화시킨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노인학교에 나가서 잡담을 하거나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인 한 노인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장기 상대자가 없어 멍하니 앉아있는데, 한 젊은이가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그냥 그렇게 앉아 계시느니 그림이나 그리시지요." "내가 그림을? 나는 붓을 잡을 줄도 모르는데..." "그야 배우면 되지요."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나는 이미 일흔이 넘었는 걸." "제가 보기엔 할아버지 연세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더 큰 문제 같네요."   젊은이의 그런 핀잔은 곧 그 할아버지로 하여금 미술실을 찾게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도 않았으며, 더우기 그 연세가 가지는 풍부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성숙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은 떨렸지만, 그는 매일 거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이 새로운 일은 그의 마지막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가 바로 평론가들이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했던 해리 리버맨이다. 그는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의 격려 속에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그림을 남겼으며, 백한 살, 스물 두번 째의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삶을 마쳤다.     이 일화는 삶의 목표를 잃고 허우적거리던 나에게 진한 감동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일깨워준 계시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감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이렇게 시작한 글쓰기였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고, 거기에 나의 정신을 걸었다. 누구에게 기대어 위로받고 싶거나 스스로 무너질 때 차오르는 비애를 기도하듯 쓰다 보면 바람은 잔잔하여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바늘구멍만한 희망도 안 보여 절망하고 낙담할 때, 글쓰기는 나의 위로요 삶의 의미였다.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무언가 가슴 속에서 북바쳐 오르는 것이 있었고, 그것이 글을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글쓰기는 나의 깃발이었다. 내 존재를 알릴 수 있는 훌륭한 표적처럼 글은 깃발이 되었다. 나는 그것에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의 바탕도, 그것의 빛깔도, 그 생김새도 돌아볼 여유가 없이 다만 깃발은 휘날리는 사명만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그것에 도취했다. 이처럼 글쓰기라는 나의 꽃은 암울했던 시기에 구원의 손길로 다가왔다. 감히 작가가 된다거나 지면에 발표하려는 꿈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고통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나의 의식을 바꾼 것은 7할이 책이었다. 책은 갇혀있던 생각의 틀 속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내 감정적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유일한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했던 것은 아직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잘 소화해서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이 주는 기쁨, 그리고 이것이 일시적 만족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바꾸고 누적되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뒤늦게 노년에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당장 글을 이렇게 열심히 쓴다고 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유튜브처럼 합리적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꾸준히 준비해 두는 것을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고 하는 절박함이 강한 동기가 되어 나를 이끌고 있을 따름이다. 연습을 위한 의지만큼은 확고하다. 내게 내 세울 게 없는 이유, 그것은 암울한 시기를 벗어난 결정적인 계기가 외부로부터 주어졌다는 것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비하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다.     돌이켜보니 참 먼 길을 걸어왔다.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를 더욱 더 뼈저리게 깨닫는다.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보람있게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얼굴의 모양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얼굴의 표정은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흘러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또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을 변경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은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현을 연주하는 것이다.     지금 내게는 두 가지 욕망이 남아 있다. 하나는 안 늙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잘 늙는 것이다. 이 두 욕망의 문제는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안 늙으면서 잘 늙을 수는 없고, 잘 늙으면서 안 늙을 수는 없다. 그러니 ‘안 늙으면 좋겠지만 안 늙을 수 없다면 잘 늙으면 좋겠다’는 애매하고 긴 문장이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모든 것을 쓰기 위하여.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고,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한순간도 자유와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온 힘을 다해 읽고, 듣고, 말하고, 쓴다. 언어는 이 불평등한 세상에서 그나마 평등하게 주어진, 너무도 간절한 무기이므로. 들녘에 피어나는 들국화는 피고 싶어서 핀다.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살아있음의 가장 확실한 모습임을....내가 뒤늦게 글쓰기에 매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김지민 기자할아버지 연세 장기 상대자 mdc시니어센터 회원

2023-02-01

영화 ‘1987’ 12일 VA 개봉, 온라인 이벤트 한국항공권 제공

첫 장면부터 이어지는 몰입감과 명배우들의 열연, 여운까지 갖춘 영화로 호평받는 영화 ‘1987’이 오늘(12일) 워싱턴지역 등 북미 전역에서 개봉한다. ‘1987’은 한국에서 11일 기준 누적 관객 수 475만 6042명을 기록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단체관람한 데 이어 지난 7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용산 CGV를 방문해 영화를 관람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마음에 울림이 가장 컸던 대사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였다”며 “함께 힘을 모을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청과 각 지역 지자체도 단체관람에 나서는 등 청소년부터 중장년층까지 폭넓은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북미 전지역 개봉 기념으로 온라인, 오프라인 이벤트도 눈길을 끌고 있다. ‘내 기억 속의 1987년’이란 주제로, 1987년도에 한국이나 미국에서 일어난 사연을 이메일(info@cjentamerica.com)로 응모하면, 당첨자에게 아시아나 한국 왕복권(미국 주요도시 출발)을 제공한다. 영화는 버지니아 리갈 페어팩스 타운센터 영화관에서 상영한다. ▷참고: WWW.CJ-ENTERTAINMENT.COM ▷장소: 4110 West Ox Road Fairfax, VA 22033 심재훈 기자 shim.jaehoon@koreadaily.com

2018-01-12

[역사의 창] 영화 '1987'이 주목받는 이유

#. 영화 '1987'이 화제다. 대통령도 보고 여야 정치인들도 앞다퉈 보고 있어서다. 좁게는 박종철, 이한열 두 젊은 대학생의 죽음이 소재다. 넓게 보면 1980년대 시대적 질곡 속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재미가 있다.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며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물론 극적 완성도를 위해 과장되고 미화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우리 세대의 집단 경험을 다른 어떤 객관적 서술보다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는 미덕이 훼손될 정도는 아니다. 불과 30년 전 이야기지만 1987년은 이렇게 역사가 되고 장준환 감독은 또 하나의 역사 기록자가 되었다. #.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을 예전엔 사관(史官)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사관은 왕조실록을 비롯한 모든 국가 공식 기록물의 초고를 작성하던 1차 기록자였다. 벼슬 품계로 치면 정7품에서 정9품으로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금의 모든 언행을 비롯해 나라 안팎 대소사와 인물의 시비득실까지 기록으로 남기는 요직이었기 때문에 선발 절차는 매우 엄격했다. 첫째 조건은 과거 시험의 문과 급제자로 재(材)·학(學)·식(識)의 삼장지재(三長之才)를 고루 갖춘 인재여야 했다. '재'란 문장력으로 역사 서술 능력, '학'은 해박한 역사 지식, '식'은 현실을 공정하게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둘째는 출신과 가문에 흠이 없어야 했다. 첩의 자손인 서얼은 절대 사관이 될 수 없었다. 친가와 처가 그리고 조상 중에 부정축재자 같은 범죄자가 있어도 자격 미달이었다. 본인 스스로의 강직한 성품과 정직성도 중요했다. 사관으로 천거되었다가도 마음이 사특하다거나 정직하지 못해서, 혹은 공론에 저촉되는 언사를 일삼았다는 이유로 임용이 거부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까다롭게 제수되는 자리였던 만큼 사관이 되면 가문의 영광일 뿐 아니라 스스로도 남다른 긍지와 사명감을 가졌다. 게다가 사관의 기록은 임금도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 자부심과 기개가 오죽했을까 싶다. 우리 조선왕조실록이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유네스코 기록유산이 된 것은 그저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 무엇인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후세에 오늘을 판단할 사료를 남기는 일이다. 그만큼 엄중해야 하고 책임감도 수반되어야 한다. 영화감독이나 작가, 기자 등 세상 모든 기록자들이 진실과 객관이라는 숫돌에 끊임없이 자기 양심을 갈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1987'은 우리를 30년 전으로 다시 데려간다. 동시에 작금의 상황도 돌아보게 만든다. 당시 대학생뿐 아니라 기자나 검사 등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꿈꾸며 불의에 맞섰을 것이다. 하지만 30년이 흐른 지금 얼마나 그런 세상이 실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언론은 더 비겁해졌고, 정치인들은 더 야합에 능수능란해졌으며, 기득권 지키기는 훨씬 더 치밀해지고 견고해졌다는 생각마저 든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대학살 같은 무자비한 악행을 자행한 사람들도 알고 보면 이상한 광신도나 반사회성 인격 장애자들이 아니라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다. 영화 '1987'은 그런 악의 평범성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런 것이 영화감독의 존재감이고 현대판 사관으로 불리어도 무방한 이유다. '1987'은 개봉 3주 만에 50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마침 LA와 OC에서도 절찬 상영 중이니 우리 독자들도 한 번씩 보면 좋겠다. 이종호 OC본부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01-11

[특별 기고] 영화 '1987', 바로 그 시대를 살았던 나의 이야기

애틀랜타 중앙일보는 영화 '1987'의 12일 애틀랜타 개봉을 앞두고 격동의 그 시절을 추억하는 한인들의 사연을 모집했다. 주로 대학생이나 청년으로서 민주화시대를 보냈던 이들이 사연을 보내왔다. 영화를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은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6월 항쟁을 다룬 상업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로 세상이 좋아졌음을 절감하는 이도 있었고,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악몽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어떤 기억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저편으로 밀어낼 수가 없다. 이들이 기억하는 그 시대는 잔인했고, 역사의 물결은 거셌으며, 젊은이들의 고민은 치열했다. 이들은 이제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라는 영화속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뜨거운 사연을 각색없이 소개한다. 1987년 6월 종로학원에서 재수생활을 하던 가운데 맞은 6월 항쟁.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명동으로 나아가 감히 한마디를 내지 못하고 긴장하며 두리번 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재수를 거쳐 서울대 캠퍼스에서 공부하던 4년은 공부를 한 것인지 뭔지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죠. 늘상 있던 학회와 가투, 교투. 학생회관에 늘 전시되어있던 광주민주항쟁의 처절했던 이미지들, 항상 스피커로 아크로를 울리던 총학의 집회. 이 모든 것이 4년동안의 캠퍼스에서의 삶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눈 앞에 펼쳐진 이 모든 상황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고민하기에 앞서 시대가 던져준 고민들의 치열함과 깊이가 너무나도 무겁고 막중하였던 4년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지던 대학생들의 분신과 죽음을 통한 저항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당시의 암울하고도 비장한 시대 상황이었지요. 불의한 정권에 볼모가 된 국가와 주권자인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없어서 서로 대치한다는 역설적이고도 슬픈 분노의 상황.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대학생으로서 살아간 대한민국의 시대적 상황은 그 이후의 제 삶을 정향시킨 세례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를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은 무엇이든 수면 깊이 잠겨 있던 모든 감정과 감상들을 다시 현재로 소환해 옵니다. 1987과 같은 영화는 하나의 영화로 보기에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심정을 불러 일으킬 줄 알면서도, 외면하지 못하고 볼 수 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왜냐하면 영화를 통해 보게 될 스크린 너머의 이야기의 본체는 바로 그 시대를 살았던 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201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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