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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말라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 그런데도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마음이, 맘이 아파서였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들이,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현실이 너무 힘이 들어서 글로라도 풀어야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정년퇴임 후 나에게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암울한 시기가 있었다. 이 암울은 그 이전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나, 좌절은 그 이후에 서서히 무기력으로 나를 탈진시켜갔다. 나의 삶이 거기에서 끝나버리는 것 같은 절망과 좌절에 대한 회한 속에서 언제까지고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치에서 빠져나오듯 '나'로부터 해방되어지는 변화를 맞이했다. 내 미망(迷妄)을 흔들어놓은 한 권의 책. 그것은 생떽쥐베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였다.
 
〈인간의 대지〉는 일종의 자전적 소설이므로 대부분 에피소드는 실제 있었던 일이고, 등장인물도 실존인물들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야.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고." 〈인간의 대지〉 주인공은 막 항공회사에 입사한 '나'다. 작품은 주인공이 항공회사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은 야간비행 중 만나는 별들을 보면서, 무한하면서도 고요한 하늘을 날면서 인생에는 물질적인 것 이상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다. 물론 고요하고 아름다운 일만 있지는 않다. 사막에 비행기가 추락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사막에서 베드윈 원주민과 사막여우를 만나기도 하고, 선인장과 바오바브 나무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했던 동료들을 잃기도 한다. 사랑했던 동료 메르모스의 죽음은 가장 큰 아픔으로 그려져 있다. 어느 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하늘로 사라져서는 돌아오지 않은 동료를 떠올리며 주인공은 인간의 책임감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게 된다. 또한 추락사고 이후 오지에서 끝내 살아 돌아온 동료 기요메에게서는 불굴의 의지를, 배운다.  


 
기요메는 불시착한 안데스 산맥에서 그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구조자가 되어 한 발 한 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얼어터진 발꿈치가 들어갈 수 있도록 구두 뒤축을 수없이 잘라내며 필사적인 행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죽음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도 어디선가 재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나의 건재함을 알려야 한다. 그들에게 내 생명의 손짓을 보내야 한다.  "나, 여기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사랑보다 더 깊은 연민으로부터 그들을 구제해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을 구제함으로써 나 또한 구제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날카롭게 내 머리를 때렸다.  
 
나를 변화시킨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노인학교에 나가서 잡담을 하거나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인 한 노인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장기 상대자가 없어 멍하니 앉아있는데, 한 젊은이가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그냥 그렇게 앉아 계시느니 그림이나 그리시지요." "내가 그림을? 나는 붓을 잡을 줄도 모르는데..." "그야 배우면 되지요."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나는 이미 일흔이 넘었는 걸." "제가 보기엔 할아버지 연세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더 큰 문제 같네요."
 
젊은이의 그런 핀잔은 곧 그 할아버지로 하여금 미술실을 찾게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도 않았으며, 더우기 그 연세가 가지는 풍부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성숙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은 떨렸지만, 그는 매일 거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이 새로운 일은 그의 마지막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가 바로 평론가들이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했던 해리 리버맨이다. 그는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의 격려 속에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그림을 남겼으며, 백한 살, 스물 두번 째의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삶을 마쳤다.  
 
이 일화는 삶의 목표를 잃고 허우적거리던 나에게 진한 감동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일깨워준 계시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감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이렇게 시작한 글쓰기였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고, 거기에 나의 정신을 걸었다. 누구에게 기대어 위로받고 싶거나 스스로 무너질 때 차오르는 비애를 기도하듯 쓰다 보면 바람은 잔잔하여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바늘구멍만한 희망도 안 보여 절망하고 낙담할 때, 글쓰기는 나의 위로요 삶의 의미였다.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무언가 가슴 속에서 북바쳐 오르는 것이 있었고, 그것이 글을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글쓰기는 나의 깃발이었다. 내 존재를 알릴 수 있는 훌륭한 표적처럼 글은 깃발이 되었다. 나는 그것에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의 바탕도, 그것의 빛깔도, 그 생김새도 돌아볼 여유가 없이 다만 깃발은 휘날리는 사명만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그것에 도취했다. 이처럼 글쓰기라는 나의 꽃은 암울했던 시기에 구원의 손길로 다가왔다. 감히 작가가 된다거나 지면에 발표하려는 꿈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고통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나의 의식을 바꾼 것은 7할이 책이었다. 책은 갇혀있던 생각의 틀 속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내 감정적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유일한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자 했던 것은 아직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잘 소화해서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이 주는 기쁨, 그리고 이것이 일시적 만족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바꾸고 누적되어 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뒤늦게 노년에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당장 글을 이렇게 열심히 쓴다고 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유튜브처럼 합리적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꾸준히 준비해 두는 것을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고 하는 절박함이 강한 동기가 되어 나를 이끌고 있을 따름이다. 연습을 위한 의지만큼은 확고하다. 내게 내 세울 게 없는 이유, 그것은 암울한 시기를 벗어난 결정적인 계기가 외부로부터 주어졌다는 것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비하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다.  
 
돌이켜보니 참 먼 길을 걸어왔다.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를 더욱 더 뼈저리게 깨닫는다.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보람있게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얼굴의 모양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얼굴의 표정은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흘러간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또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을 변경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은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현을 연주하는 것이다.  
 
지금 내게는 두 가지 욕망이 남아 있다. 하나는 안 늙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잘 늙는 것이다. 이 두 욕망의 문제는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안 늙으면서 잘 늙을 수는 없고, 잘 늙으면서 안 늙을 수는 없다. 그러니 ‘안 늙으면 좋겠지만 안 늙을 수 없다면 잘 늙으면 좋겠다’는 애매하고 긴 문장이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모든 것을 쓰기 위하여.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고,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한순간도 자유와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온 힘을 다해 읽고, 듣고, 말하고, 쓴다. 언어는 이 불평등한 세상에서 그나마 평등하게 주어진, 너무도 간절한 무기이므로. 들녘에 피어나는 들국화는 피고 싶어서 핀다.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살아있음의 가장 확실한 모습임을....내가 뒤늦게 글쓰기에 매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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