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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제자의 고백

그 시절은 6·25전쟁 직후라 모두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고향의 모교인 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처음 시작하는 직장생활이라 설렘과 두려움의 기억이 까마득한 데 오랜 세월이 지나갔건만 추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 있다.   학교 건물은 폭격으로 반 이상이 폐허가 되었고 넓은 강당과 교실 10여 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강당을 여섯 개의 교실로 나누었다. 그중 한구석에서 학생들은 송판에 네 다리를 세운 조그만 책상을 각자 가져와서 공부했다. 찬 마룻바닥에 앉아 오들오들 떨면서 매서운 추운 날씨였지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맞아 주었던 3학년 1반 남아들이었다.   학생들의 손등은 터서 갈라지고 발가락은 동상에 걸려 벌겋게 부어 있는 가여운 아이들이었다. 그래도 잘 참고 견디며 열심히 공부하는 그들이 대견했다. 그중에는 산 넘고 들길을 1시간 이상 걸어온 학생도 있었다. 전쟁 중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서 지내는 학생도 3명이 있었다.   하루는 가정방문을 핑계 대고 보육원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3명의 학생이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 시설은 너무도 비참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웃음을 잃고 양지바른 곳에서 병든 병아리처럼 웅크리고 않아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들은 배고픔에 먹을 것만 신경 쓰고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 당시 보육원은 구호물자에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지탱하고 있었다. 가여운 아이들,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은 있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게 안타까웠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일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매월 기성회비(학교 운영비)를 담임이 독촉하여 걷는 일이었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우리 반이 항상 꼴찌였다. 무상으로 교육할 수 있으면 좋을까 싶었다. 그런데 형벌처럼 전교 학급에서 수납된 기성회비는 나에게 다 가져왔다. 서무과장에게 매일 통계를 내어 돈과 함께 보고하는 업무를 내게 맡으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다 아찔한 사건이 벌어졌다. 받은 기성회비를 교실에 두고 자리를 비운 사이 돈이 없어진 것이었다. 가슴은 두근두근 속만 태우고 조심하지 않은 나의 실수라 누구에게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진땀을 흘리며 친지께 사정하여 겨우 해결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서산을 바라보니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의 고운 빛깔은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삭막한 내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 듯 황홀하고 포근하게 가슴 속 깊은 곳에 다가왔다.   그런데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웃는 얼굴의 똑똑한 반장, 조윤모가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반장과 함께 집으로 오는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원도에서 피난 나올 때 부모를 잃고 작은 엄마와 둘이 삽니다. 작은 엄마는 돈 벌어 오라며 밥도 안 주고 매질까지 해요.” 윤모는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어할까, 마음이 쓰렸다. 나는 저녁을 먹이고 위로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할 말이 있는듯한데 눈치만 보고 망설이다 말을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근무했던 4년간 많은 사연을 뒤로하고 대전에 있는 초등학교로 옮기며 고향을 떠났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하루는 해군 제복 차림의 말쑥한  군인이 집에 찾아왔다. 어떻게 왔을까? 그는 내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선생님. 저 조윤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보다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잊지 않고 찾아온 제자가 고맙고 반가웠다. 제자는 단정히 앉아 망설임 없이 “용서해 주세요. 제가 선생님의 돈을 훔쳤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제자가 그 일로 인해 오랜 세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그러면서 제자의 진정한 고백에 나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제자를 안아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용서하는 기쁨, 용서받는 기쁨, 그 순간의 감동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모진 세파를 겪으며 참고 견디었으니 잘 살기를 마음 깊이 빌어 주었다.   어려운 시절 만고풍파 겪으며 살았을 불쌍한 아이들,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이제 이순을 넘긴 노년이 된 제자들이 궁금해진다.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겠지 싶다. 만남과 헤어짐은 우연이 아니고 깊은 인연이 있다 생각한다. 제자는 진심으로 양심 고백을 할 수 있는 심성을 가졌으니 틀림없이 올바르게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정직하게 정도를 걸어온 사람만이 마음의 평화와 축복을 받을 것이리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이 몇이나 있으랴. 잠시 있다 가는 인생길, 많이 사랑하고 아름다운 발자취 남기고 싶다. 이복자 / 수필가수필 제자 고백 양심 고백 강당과 교실 반장 조윤모

2024-01-25

타운 쓰레기 불법투기 '몸살'

  범죄통계 매체 ‘크로스타운’은 민원서비스 ‘MyLA311’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LA시 내 불법 쓰레기 투기 관련 민원은 9만9936건이라고 밝혔다.     한인타운은 총 2339건의 민원이 접수돼 LA시 중에서 8번째로 많았다. 하루 평균 6건의 민원이 접수된 셈이다.     가장 많은 민원이 들어온 곳은 밴나이스로 3387건에 달했다. 또 선밸리(3131건), 노스할리우드(2569건), 파노라마 시티(2457건), 파코이마(2407건) 등이 뒤를 이었다.     매체에 따르면 불법 쓰레기 투기는 주로 폐기물 처리 비용을 피하려는 이들로부터 행해진다.     다운타운 토이 디스트릭에서는 빈 판지 상자가 골목 아무 곳에나 내버려 지기도 하고, 밸리 지역에서는 건설사나 컨트랙터들이 밤에 5번, 118번, 170번 프리웨이 인근에 부서진 콘크리트 또는 기타 자재 더미를 버리고 가기도 한다고 매체는 전했다.     이와 관련해 실제로 지난해 최다 민원을 기록한 4곳 중 3곳이 LA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6지구에 집중돼 있었다.   반면, 같은 통계에 따르면 불법 쓰레기 투기와 관련 LA시 전체 민원 수는 최근 2년간 감소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었던 2020년 12만9000건에 이르렀지만 지난해는 22.5% 감소한 9만9936건을 기록했다.     지난해 8월(9310건)부터 매달 하락세를 이어가던 민원 규모는 12월 6428건까지 줄었지만, 올해 들어서 1월 7123건으로 다시 증가했다.     한편, LA시 회계관 론 갤퍼린은 위생국이 이런 무법 행위에 대처할 자원이 부족하다고 지난 2021년 밝힌 바 있다.   그는 당시 ‘팡일링 업’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470스퀘어마일의 대도시 전역에 불법 투기 감시 카메라가 19대뿐”이라며 “이 문제에 접근할 포괄적인 전략이 없기 때문에 법 집행에도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LA시는 지난 2002년 불법 투기 범죄 제보 프로그램을 도입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수년째 운영되지 않았지만 지난해 9월 LA시 관계자들은 해당 신고를 통해 경범죄 혹은 중범죄 유죄 판결로 이어질 경우 최대 1000달러의 보상금을 제보자에게 지급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장수아 기자가판대 신문 가판대 양심 한인타운 김상진 기자

2023-02-27

[이 아침에] 무뎌진 양심 다시 세우기

 어릴 때 외갓집에서 살다시피했던 나의 하루는 할머니의 하루와 같았다. 할머니 따라 부엌에 들어가고, 개울가로 향하는 할머니 뒤를 강아지처럼 쫓아다녔다. 찬물에 빨래를 해서 그런지 외할머니의 손마디는 울퉁불퉁했다. 하지만 생긴 모양과 달리 뭉툭하게 불거진 손마디는 아주 섬세했다. 투박한 손으로 닭의 목을 비틀 때는 무시무시했지만 할머니의 칼질에 뽑아지는 국수는 얇고 보드라웠다. 새우젓에 고춧가루를 달달 볶아 끓인 얼큰한 두부찌개도 어릴 적 어깨너머로 배운 할머니의 음식 솜씨다. 이따금 밀가루를 푼 걸쭉한 고추장찌개를 끓일 때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무딘 칼에 손이 베이는 법이다.”   저녁밥을 지을 때쯤이면 숫돌에 칼을 정성스레 갈던 할머니의 말이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저냥 무뎌진 칼로 단단한 홍당무를 썰다가 한 순간에 피부 깊숙이 들어오는 금속의 촉감을 느끼고는 그제야 칼을 미리 갈아 놓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꼭 뻘겋게 피가 솟아난 피부에 밴드를 감아야만 ‘무딘 칼에 손이 다친다’는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살다 보니 칼만 무뎌지는 게 아니었다. 한 두 칸씩 물러서다 보니 이젠 언제 소리를 질러야 할지, 아니 소리를 질러도 되는 건지 망설이며 판단력이 흐릿해졌다. 이러려고 작가가 된 게 아닌데, 마음껏 양심의 소리를 내지르려고 글을 쓰려고 했는데.   작가에게 양심의 칼이 무뎌졌다면 호흡하지 않는 식물인간이나 진배 없다. 고뇌의 불을 켜려하니 난감하다. 치장된 텍스트에서 가식이 넘쳐나도 추켜세우는 걸 미덕으로 여기다 보니 어떤 게 옳은 것인지 구분조차 모호해지고 말았다. 어쩌다 이렇게 감정이 둔해지고 흐릿한 판단력을 키우게 되었는지.   세상은 따지기 좋아하고 예민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지 않는다. 오히려 적당히 타협을 권하고 은근히 타락의 줄에 서길 원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불의함이 위로를 받을 테니까.     그래도 굴절된 눈높이로 살아갈 수는 없다. 나의 단호함이 오히려 까탈스럽고 괴팍한 성격이라는 선입견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익숙한 것으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과감하게.   이제 내 무뎌진 양심의 날을 날카롭게 세우려한다. 펜촉 끝으로 무질서를 평정하려면 생각이 둔해져서는 안 된다. 100% 정의롭지 못한 나지만 그것 때문에 1%의 양심을 덮을 수는 없다.   자본이 주인이 된 세상에서 당당할 수 있고 책 안 읽는 세상에서 소설가로 버티기 위해 영혼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불순물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외로울 것이나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작가의 독방은 오히려 자유다. 정작 내가 괴로워해야 할 일은 친구가 없는 게 아니라 세상에 격분하지 않는 평온함이고 정의의 감각을 잃어버린 무딘 감정이다.   혼돈의 세상에서 미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약하게 들리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그것만이 작가라는 이름표를 달 수 있게 만들 테니까. 권소희 / 소설가이 아침에 양심 할머니 생각

202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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