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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제2의 하인리히 법칙으로 승화

2022년 10월 29일 저녁 6시 34분. 112, 119를 찾는 전화 소리가 요란하다. ‘핼러윈’의 한국 원조 거리 이태원의 해밀턴호텔 옆 골목이 지하철에서 흘러들어온 인파와 근처 클럽에 입장하려고 줄을 선 사람들로 뒤엉켜 압사당하기 일보 직전이니 빨리 구출해달라는 내용이다. 그 후 밤 10시까지 무려 79건의 비슷한 신고가 줄을 이었으나 관련 당국은 먹고 마시고 자며 허허했다.   그리고 밤 10시 15분, 외국인 26명 포함 우리 청소년 156명이 사망하고 196명이 다치는 전대미문의 참사가 한국의 수도 서울, 그것도 대통령 집무실에서 지근거리인 용산 이태원에서 발생하여 전 국민을 슬픔과 허탈, 좌절케 하였다. 사전에 대비책을 어느 정도 세웠거나, 쇄도한 신고 전화에 조금만 반응했더라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죽음은 막았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에서다.   Halloween에서 Hallow는 성인(Saint)이라는 의미의 고 영어다. 오래전 가톨릭에서는 매년 11월 1일을 All Hallow’s day라 하여 ‘천국에 가 있는 모든 성인을 기리는 행사’를 열어왔는데 그 전야 10월 31일은 All Hallow’s Day Evening이라 칭한 데서 ‘핼러윈’이란 말이 생겼으나 내용을 살펴보면 종교나 신앙은 없고 귀신이나 주술 등의 신비주의만 가득한 미신적 행사였다.   ‘핼러윈’의 유래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고대 켈트족 ‘서우인 축제’다. 켈트족은 1년을 10달, 계절을 겨울과 여름으로만 나누고 총 4개의 기념일을 지켰는데 그중 가장 큰 명절을 한해의 마지막인 10월 31을 서우인(Samhain)이라 하며 ‘죽음과 유령을 찬양하는 축제놀음’을 벌였다. 그들은 이날 저승의 문이 열려 조상들은 물론 이상한 잡귀들이 빠져나와 이승을 방문한다고 믿으면서 귀신 복장을 하고 거리를 다니며 ‘Trick or Treat’ 하며 과자를 달라고 한 것이 ‘핼러윈’이 되었다는 설이다.   이렇게 ‘핼러윈’ 발상지는 유럽이고 현저하게 꽃을 피운 나라는 미국이라면 오늘날 가장 거세게 지키는 나라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사실 미국에서는 수년 전 아이들에게 독이 든 사탕을 주는 범죄가 발생하면서 열기가 옛날 같지 않고, 한인 교회들은 이날, 아이들을 교회로 불러 안전하고 은혜스러운 새 어린이 축제로 승화시켜나가고 있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대형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데는 같은 원인과 징조가 사전에 수십 차례에 걸쳐 나타난다는 통계적 논리다. 1931년 Traveles 보험회사 손실통제 부서에서 근무하던 허버트 하인리히라는 사람이 ‘산업재해 예방’이라는 책을 통해 주장하여 유명 해졌는데 지금도 그 분야의 교과서다.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다. 단지 징후와 대비방책은 넘쳤지만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이 법칙을 무색게 했을 뿐이다. 오히려 4시간여 동안 죽음의 현장에서 몸을 아끼지 않은 79건의 한국 디지털 세대들의 거룩한 신고음성만이 선한 기록으로 남았다. 바라기는 이 음성들을 새 항목으로 추가한 제2의 하인리히 법칙을 만들어 세계 재난사에 새로운 이정표로 제시되었으면 한다. 그래야 저들의 무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고 또 다른 유형의 압사, 붕괴, 침몰, 깔림 같은 후진성 인재들이 마침표를 찍지 않을까 싶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하인리히 승화 하인리히 법칙 이태원 참사도 한국 디지털

2022-11-11

[문화 산책] 예술로 승화된 아픈 기억들

내가 영화 ‘사코와 반제티’를 처음 감상한 것은 50년 가까이 전인 일본 유학시절이었다. 오랜 옛날 일인데도, 영화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새내기 극작가였던 내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 모양이다.   ‘사코와 반제티’는 100여년 전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가난한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삼은 ‘마녀재판’이며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엄청난 국제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특히 이민자들에게는 이야기하는 바가 큰 영화다. 사건을 간추리면 이렇다.   1920년 4월 매사추세츠 보스턴 근교의 한 구두 공장에서 경리담당 직원과 경비원이 총에 맞아 죽고, 현금 1만6000달러가 털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얼마 뒤 이탈리아 이민자인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가 용의자로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사코는 구두수선공이었고, 반제티는 생선장수로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이민자였다.   경찰은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음에도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 갔다. 이를 위해 두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이고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거부한 무정부주의자라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당시 미국 사회는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심각한 물가상승과 빈부격차, 과격해진 노사분규,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진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테러가 일어나자 정부로서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여기에 무고한 사코와 반제티가 걸려든 것이었다. 따라서 이 재판은 ‘사상재판’의 성격을 띠며 국제적 관심을 모았다. 두 사람은 재판 내내 결백을 주장했고 증인도 있었고 제3자가 범행을 자백하기도 했으나 이들에게 공정한 재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1921년 7월14일 두 사람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자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편견과 적개심에 근거한 불공정한 재판에 분노하는 항의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파리에서는 미국 대사의 집이 파괴되고 구명운동을 벌이던 시위대에 폭탄이 터져 20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을 정도였다.   버트런드 러셀, 아인슈타인, 시인 아나톨 프랑스, 마리 퀴리, 이사도라 덩컨 등 세계 지성인들도 ‘최악의 사법살인’이라고 항의하며 구명운동에 나섰다.   그러자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사형 집행을 연기하고 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위원회가 내린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1927년 8월23일 두 사람은 전기의자에 앉아 죽음을 맞았다. 두 사람은 처형 직전 마지막으로 제공된 스프와 고기, 토스트, 차 등으로 최후의 만찬을 즐기고 당당하게 죽었다. 처형 당시 사코는 33세, 반제티는 36세였다. 사형집행으로 엄청난 항의가 뒤따라 파리, 런던 등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사형 당한 지  30여년이나 지난 1959년 진짜 범인이 나타나자 그제야 진실이 밝혀지고 이들에게 사면이 제안됐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뒤인 1977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사코와 반제티의 무죄를 확인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억울한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데 50년이나 걸린 것이다.   4·29 30주년을 맞으며 미술, 문학 등의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이민자와 디아스포라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 사건과 영화 장면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편견과 의혹이 가져온 폭력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치유의 지혜를 공유하기 위해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사코와 반제티 두 사람은 그림과 노래로도 명예가 회복됐다. 미국화가 벤 샨이 그린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 시리즈 23점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겪은 4·29 아픔도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어 오래도록 남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예술 승화 매사추세츠 주지사 세계대전 참전 매사추세츠 보스턴

202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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