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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가을과 관련한 순우리말

다음 중 충분히 익어 떨어질 정도가 된 열매를 뜻하는 순우리말은?   ㉠한물 ㉡건들마 ㉢오사리 ㉣아람   ‘㉠한물’은 과일·채소 등이 한창 수확되거나 쏟아져 나올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 사과가 한물이니 실컷 먹어라”처럼 쓰인다. “그 사람도 이제 한물갔다”와 같이 ‘한물갔다’는 형태로도 많이 사용된다. 이때의 ‘한물갔다’는 전성기가 지났다는 뜻이다.   ‘㉡건들마’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초가을의 선들선들한 바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길가의 꽃들이 초가을 건들마에 춤을 추듯 하늘거리고 있다”처럼 쓰인다. 비슷한 말로는 ‘건들바람’이 있다.   ‘㉢오사리’는 같은 작물을 제철보다 일찍 수확하는 일 또는 그런 작물을 뜻하는 말이다. ‘오사리 고추’ ‘오사리 호박’ 등처럼 사용된다. ‘오사리 새우’ ‘오사리 멸치’와 같이 해산물에도 쓰인다.   ‘㉣아람’이 정답이다. 밤이나 상수리 등이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 또는 그런 열매를 나타내는 말이다. “밤송이가 저 혼자 아람이 벌어져 떨어져 내렸다”처럼 아람이 활짝 벌어지는 것을 ‘아람(이) 벌다[벌어지다]’고 한다. 아람이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곧 떨어질 상태에 있는 것은 ‘아람(이) 불다’고 한다. ‘아람’은 수확의 계절에 잘 어울리는 순우리말이다. 상호나 단체명 등으로 더욱 많이 사용했으면 한다.우리말 바루기 순우리말 가을 오사리 호박 오사리 새우 오사리 멸치

2024-10-03

[우리말 바루기] 날짜의 순우리말 표현

명절 연휴가 되면 “명절에는 보통 사나흘 정도 쉬었는데, 이번엔 연휴가 길어서 매우 좋았다” “앞으로도 명절 연휴가 네댓새는 됐으면 좋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날짜를 순우리말로 바꿔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사흘’을 ‘3일’이 아닌 ‘4일’로 알고 쓰는 이가 많다는 기사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적이 있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3~4일’ ‘4~5일’ ‘5~6일’ 등을 우리말로 정확히 표현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 듯하다.   우선 ‘3~4일’은 ‘사나흘’이라고 대부분이 제대로 알고 있다. 그런데 ‘4~5일’은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많다. ‘나흘이나 닷새가량’은 ‘네댓새’가 바른 표현이지만, ‘너댓새’라고 쓰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4~5’를 ‘너댓’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으로, ‘네댓’이 바른 표현이다.   ‘5~6일’은 ‘대엿새’라고 한다. ‘대엿’은 ‘대여섯’의 준말로, ‘다섯이나 여섯쯤 되는 수’를 의미한다.   ‘6~7일’은 ‘예니레’라고 써야 한다. ‘6일’은 ‘엿새’, ‘7일’은 ‘이레’라고 하므로 ‘6~7일’은 이를 합쳐 ‘예니레’가 된 것이다.   ‘7~8일’은 ‘일여드레’이다. ‘이레(7일)’와 ‘여드레(8일)’가 만나 이루어진 표현이다.   참고로 ‘9일’은 ‘아흐레’라고 하지만, ‘8~9’일을 나타내는 우리말 표현은 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다.우리말 바루기 순우리말 표현 순우리말 표현 명절 연휴 보통 사나흘

2024-09-23

[아름다운 우리말] 용이 나타났다

용의 순우리말은 무엇일까? 용의 순우리말은 미르이다. 여기저기에서 미르를 상표로 쓰거나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있어서 미르에 익숙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르가 나타나는 문헌들은 많지만 천자문에 보면 명확히 등장한다. 광주천자문에는 미르 진(辰)/ 미ㄹ·룡(光州千字文)으로 나오고, 한석봉의 천자문에는 미르룡(石峰千字文)으로 나온다. 옛 천자문에 귀한 자료가 많다.     고려 태조 왕건은 작제건(作帝建)과 용녀(龍女)의 소생인 용건(龍建)의 아들이었다. 작제건, 용건, 왕건으로 내려오는 것이 나라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면, 용녀, 용건으로 내려오는 것은 용족임을 의미한다.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나 후백제의 견훤도 용의 후손으로 일컫는다.   용은 주로 물을 의미한다. 용왕이 사는 곳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문무왕은 사후에 호국룡이 되겠다고 하여 동해 큰 바위에 장사를 지낸다. 바다의 왕이 되는 것이다.     용은 왕을 상징하고, 출세를 상징하기도 한다. 용비어천가의 해동육룡이 상징하는 것과 잉어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등용문의 이야기도 상징에 기반을 둔 이야기다.     서양의 용은 주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주로 퇴치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똑같이 용을 상상하더라도 상징이 주는 상상의 결과는 전혀 다르다. 꿈에 나타났다면 어떨까? 동양이라면 좋은 징조이고, 훌륭한 자선이 나올 징조이겠지만, 서양이라면 기분 나쁜 악몽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면에서 보면 빅뱅의 권지용 씨, 즉 지드래곤은 용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서양에서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처음 서양 사람들이 지드래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에는 권지용 씨와 마찬가지로 용이 들어가는 이름이 많다. 주로는 남자의 이름에 들어가는데 이는 용이 남성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점에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용이 이름에 들어가는 것은 태몽과도 관련이 있다. 꿈에 용을 보면 큰 인물이 태어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서, 율곡 이이(李珥)를 낳았고 그리하여 어릴 때 이름이 현룡이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야기가 길었다. 2024년은 갑진년(甲辰年) 용의 해이다. 청룡의 해라고 말도 많다. 용은 다양한 능력을 갖춘 상상 속의 동물이다. 그리고 용은 나라를 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용은 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가져서 가뭄이나 홍수를 막아줄 것이다. 그러기 바란다. 한 해 나라의 운도 올라가고, 어려운 사람이 줄고, 어질게 세상을 이끄는 좋은 지도자가 많아지기 바란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아버지께서 나를 낳으실 때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에 용이 들어갔다. 용이 나타났다는 의미로 현(顯)이 함께 쓰였다. 늘 이름의 무게가 간단치 않다는 생각을 한다. 즐겁게,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상징적 의미 용건 왕건 용의 순우리말

2023-12-25

[문화산책] 순우리말의 짙은 감칠맛

LA시의회가 올해부터 매년 10월 9일을 ‘한글의 날’로 지정해 기념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세종대왕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 같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고, 다시 시름이 깊으실 것 같다. 왜냐? 한글이 망가지는 소리가 온 사방에서 요란하기 때문이다.   ‘해날, 달날, 불날, 물날, 나무날, 쇠날, 흙날’.  이렇게 적어놓고 작은 소리로 읽어보면 같은 요일 이름이라도 한결 정겹게 느껴진다. 삶에서 우러난 순우리말의 감칠맛 때문이다. 이렇게 맛깔스러운 우리말이 많아졌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세상은 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앞선 선각자들께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삶에 두루 쓰이도록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다. 가령, 이화여자대학교를 ‘배꽃계집큰배움터’로 하자는 식의 주장부터 따지면, 제법 긴 세월 우리말 사랑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어령 선생께서는 평생 이룬 많은 일 중에서 무엇을 가장 보람 있게 여기느냐는 질문에 문화부장관을 하면서 ‘갓길’이라는 낱말을 널리 쓰이게 정착시킨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 많은 업적 중에서 ‘갓길’이라니, 우리말에 대한 짙은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백기완 선생의 지극한 우리말 사랑도 유명하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같은 말들이 선생께서 처음으로 쓴 낱말들이다. 조금 덜 알려진 어여쁜 순우리말로는 땅별(지구), 한살매(인생), 배내기(학생), 덧이름(별명), 새뜸(뉴스), 들락(문), 눌데(방) 등이 있다. 선생께서는 평소 말과 글에서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 같은 외래 어휘를 삼가고 순우리말을 살려 쓰려 애쓰셨다.   아름다운 순우리말 살리기는 글 쓰는 이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훌륭한 작가들께서 우리말 지킴이 역할을 든든히 해주셨다. 많은 시인을 비롯해서, ‘토지’의 박경리 선생, ‘혼불’의 최명희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정겹고 아름다운 순우리말, 특히 토박이 우리말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왔다. 최근의 작가로는 ‘국수(國手)’의 김성동을 꼽을 수 있겠다. 이분들의 작품에는 낱말 사전이 함께 붙어 있을 정도로 감칠맛 나는 순우리말의 보물창고다.   이분들이 이처럼 우리말 지키기에 헌신한 까닭은 말이란 단순히 의사소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겨레의 얼과 넋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정신의 열매라고 믿기 때문이다. 말이 망가지면 정신도 허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순우리말 지키기는커녕 외래어, 무차별적으로 발명해내는 신조어에 떠밀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어떤 가치를 바로 세우기는 힘들고 시간이 걸리지만, 망가뜨리기는 한순간이다. 말도 그렇고, 정신도 그렇다. 지금 우리말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   문제는 우리말 망가뜨리기를 나라에서 솔선수범하고, 언론들이 부추기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나 공공기관의 공식 문건에 사용되고 있는 외래어를 모아놓은 자료를 살펴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으로 심각하다. 무슨 뜻인지 모를 말도 많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카르텔’이라는 낱말….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고, 꼭 이런 말을 써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고위공직자나 정치인이 공식 석상에서 외국어를 마구 사용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외국어가 마구잡이로 난무한다. “시리어스한 논의도 별로 못 했어요. 지금까지 어프로치가 좀 마일드한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가 한 국제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열린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하신 말씀이다. 아무리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하는 분이라지만, 고위 공직자가 공개 석상에서 영어를 남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없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적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순우리말 감칠맛 순우리말 지키기 순우리말 살리기 우리말 사랑

2023-10-05

[우리말 바루기] ‘두루치기’는 팔방미인

고기에 채소와 양념을 버무려 볶아낸 ‘두루치기’는 반찬이 부족해도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는 음식이다. 대개 식탁 위의 ‘두루치기’만 떠올리지만 의외의 뜻이 있다. 음식뿐 아니라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그는 회사 일, 운동, 집안 살림 등 못하는 것 없는 두루치기다” 등에서와 같이 여러 방면에 능통한 사람을 가리켜 ‘두루치기’라 한다. ‘팔방미인’과 의미가 일맥상통해 바꿔 써도 무방하다. ‘두루치기’ 외에도 사람을 나타내는 다양한 순우리말 표현이 있다. 잘 쓰지 않아 생소하지만, 단어와 뜻이 재미난 표현이 많다.   송기숙 작가의 ‘녹두 장군’을 보면 “강쇠는 여태까지 동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한테도 무슨 일이나 가르친사위로 그저 시키는 대로만 고분고분했었으나, 이번에는 그것이 아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가르친사위’가 무슨 뜻인지 단어만 봐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가르친사위’는 창조성이 없이 무엇이든지 남이 가르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와 같은 슬기주머니에게 이만 일을 처리할 꾀가 없을 리 없었다”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슬기주머니’는 그 모양으로 의미를 추측할 수 있다. 남다른 재능을 지닌 사람을 비유적으로 ‘슬기주머니’라 부른다.우리말 바루기 두루치기 팔방미인 순우리말 표현 운동 집안 녹두 장군

2022-10-03

[잠망경] 꽃의 맛

옛날 정신과 수련의 시절에 어느 우울증 환자에게 “Keep your chin up!(턱을 치켜드세요! - 힘내세요!)”라 한 적이 있다. 그 퉁명스러운 60대 여자는 그런 말은 자기도 할 수 있다면서 발칵 화를 내면서 방을 나가버렸다. 낯이 뜨거웠다.   지도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건 마치도 우울증 환자에게 우울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충고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가 말한다. 내과 의사가 배가 아픈 환자에게 아프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싸가지 없는 말을 한 셈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행복하세요! 하는 싸구려 입버릇처럼.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나중에 ‘will power, 의지력(意志力)’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입에 올렸다. 그게 뭔지 모른다며 설명을 해달라 해서, ‘will’은 의도(意圖), 즉 무엇을 원하는 상태라 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원하는 예를 든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까지 침을 튀기면서 설명한다.   한자어 ‘뜻 意’를 생각한다. 의도, 의지 외에도 의사(意思), 의견(意見), 의욕(意欲), 의의(意義) 같은 말들이 입에 붙어 다닌다. 우리는 늘 자신의 생각과 견해와 욕심과 옳음을 주장하고 싶은 법이다.   의미(意味, 순우리말로 ‘뜻’)에 ‘맛 味’가 들어간다는 사실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러니까 의미라는 한자어는 대뇌 기능이 아니라 미각이다. 말초감각 중에 하나다. 사물의 뜻을 알기 위하여 꼭 그렇게 자장면이나 짬뽕처럼 무엇이든 단무지를 곁들어 먹어봐야 한다는 재래식 중국적 사고방식이다.   사물의 의미라는 것은 개개인의 입맛처럼 주관적인 기능에서 태어난다. 삼라만상의 의미는 팩트가 아니라 미각적(味覺的) 해석일 뿐. 그것은 개인의 심리상태이기도 하다. 물리학을 제외한 우주의 객관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은 무의미하다. 무색, 무취, 무미(無味)!   ‘뜻’에 해당하는 ‘meaning’은 좀 드라이하다. 13세기에는 ‘기억하다, remember’라는 의미였다. 뜻은 연상작용에서 온다. 전인도유럽어에서는 의도, 의견, 생각이라는 말이었으니 이 또한 주관적 심리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철학의 거성, 칸트(1274~1804)의 ‘thing-in-itself, 물자체(物自體)’ 개념이 당신과 나 사이에 훌륭히 거론된다. 내가 은하수에 고춧가루라도 뿌려 맛보지 않아도 내가 자는 사이에도 은하수는 자체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이 은하수에 애써 부여하는 의미는 철두철미하게 무의미하다.   김춘수(1922~2004)는 그의 대표 시 ‘꽃’에서 꽃의 이름에 큰 의미를 하사했다. 이름이 없는 꽃은 한갓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1976년도 저서 ‘의미와 무의미’에서 그는 시의 무의미성을 성심성의껏 선포한다. 구태의연한 시적 자아의 설렘을 떠나서 언어의 즉물성(卽物性)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괜스레 물자체, 즉물성 같은 어려운 말을 해서 당신에게 좀 미안하다.   초현실주의 시류(詩流)가 나를 휩쓴다. 개꿈,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몽, 꿈을 각색하는 자각몽, 등등 모든 꿈과 초현실은 내게 각별히 유효하다. 김춘수가 초현실주의의 텃밭이었다는 생각을 간간 한다.   옛날 그 환자에게 니체의 명언을 풀이해서 설명해줄 걸 그랬다. “삶은 고통이다. 생존한다는 것은 그 고통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다”라고. 니체가 신의 사망선고를 내린 후 삶의 니힐리즘에 대항하는 그의 초인사상을 알기 쉽게 풀어서 이야기해줄 걸 그랬지, 정말.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의미 순우리말 초현실주의 시류 우울증 환자

2021-11-16

[잠망경] 따스한 가을

티. 이. 흄(T. E. Hulme: 1883~1917)의 짧은 시 ‘가을’(1908) 전문을 소개한다.   약간 차가운 가을 밤에/ 시골 길을 걸었네/ 그리고 얼굴이 벌건 농사꾼 같은/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 몸을 구부리는 걸 보았네/ 나는 멈춰 서서 말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네/ 그리고 주변에는 동네 아이들처럼 얼굴이 하얀/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었다네   시에 있어서 흄은 낭만과 고전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오는 이미지즘(imagism)을 이룩한 창시자로 손꼽힌다. 말 수와 수식어를 최소한으로 줄여 말하는 이미지즘 기법은 시뿐만 아니라 껍데기를 벗겨 놓은 언어의 누드(nude) 데생 같다.   이미지즘은 로코코 스타일의 은유와 상징에 익숙한 예술 비평가들에게는 데면데면하게 느껴지는 시작법이다. 햇볕에 타서 붉어진 농사꾼의 얼굴처럼 보이는 달과 그 주위를 감싸 도는 동네 아이들의 하얀 얼굴, 어른과 아이, 달과 별의 관계가 왠지 참 따스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옛날 내 시를 들척이다가 읽기에 데걱거리는‘따스한 가을’(2004)을 훑어본다. 좀 너저분한 전문이 이렇다.   바람 찬 오후에/ 간들간들 떨어지는 잎새에서/ 비릿한 향기가 나는구나 그 냄새는/ 중세기 시절 몸집이 우람한 기사가 사랑하던/ 송충이 같은 속눈썹에/ 코가 알맞게 큰 귀부인 체취라고/ 우기면 고만이다, 나는/ 바람결에 바스락대기만 하고/ 전혀 딴짓을 못하는 빨강 노랑 잎새들은/ 자기들이 어떤 향기를 풍기건 말건/ 도무지 개의치 않는다/ 하늘 빛 짙은 어느 오후에/ 나 몰라라 하며 밑으로 밑으로만 떨어지면 고만이다, 곧장   시대와 환경을 전혀 다르게 태어난 흄과 내가 우연히도 ‘약간 차가운 가을 밤’, ‘바람 찬 오후에’ 하며 거의 같은 억양으로 피부에 와 닿는 가을 공기의 촉감에 첫 운을 던졌다는 일이 신기하다.   흄은 이미지즘의 속성에 걸맞게 시각적인 묘사로 독자의 감각을 유인한다. 반면에 나는 후각을 들먹이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나 또한 몸집, 송충이 같은, 코가 알맞게 큰, 빨강, 노랑 등등 시각에 신경을 쏟으면서 ‘바람결에 바스락’대는 청각효과마저 삽입한다. 흄에 비하여 나는 좀 너절하고 반복적이라서 간결성에서 점수가 많이 떨어지지만, 시대가 다르고 사람 성격이 다른 걸 어찌하나.   가을은 다채로운 색감(色感)이 아우러지는 시각의 계절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계(色界)가 따로 없다니까. 온 천지가 삼원색(三原色)으로 뒤범벅이 된다. 새빨간 단풍, 꾀꼬리단풍이라는 별명을 가진 단무지처럼 샛노란 잎새들, 그리고 저 물색 모르고 파랗기만 한 인디고블루, 쪽빛 하늘!   가을이 여름보다 더 뜨겁다는 생각을 오늘 처음 했다. 기실 한자어 가을 추(秋)도 벼 화(禾)에 불 화(火)가 합쳐져서 농익어 타오르는 한가을 황금 논밭을 연상시키는 시적(詩的) 표현이다. 가을은 뜨거운 계절이다. 갑골문자에 벼 禾 옆에, 불 火 대신 메뚜기 그림이 있었다지만 솔직히 나는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순우리말 가을은 더욱더 시적이다. 가을의 어원은 곡식이나 과일을 ‘끊어내다’는 뜻의 고어 ‘갓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시옷 발음이 이응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남부 지방에서는 ‘추수하다’의 방언으로 ‘가실하다’는 말을 쓰고 있다 한다. 가을에 곡식과 과일을 끊어내지 않는다는 것은 갓난아기의 탯줄을 끊지 않는 것이나 조금도 다름없다.   가을은 정말 따스한 수확의 계절이다. 가을은 계절의 클라이맥스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가을 한가을 황금 순우리말 가을 한자어 가을

202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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