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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순우리말의 짙은 감칠맛

장소현 시인, 극작가

장소현 시인, 극작가

LA시의회가 올해부터 매년 10월 9일을 ‘한글의 날’로 지정해 기념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세종대왕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 같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고, 다시 시름이 깊으실 것 같다. 왜냐? 한글이 망가지는 소리가 온 사방에서 요란하기 때문이다.
 
‘해날, 달날, 불날, 물날, 나무날, 쇠날, 흙날’.  이렇게 적어놓고 작은 소리로 읽어보면 같은 요일 이름이라도 한결 정겹게 느껴진다. 삶에서 우러난 순우리말의 감칠맛 때문이다. 이렇게 맛깔스러운 우리말이 많아졌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세상은 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앞선 선각자들께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 삶에 두루 쓰이도록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다. 가령, 이화여자대학교를 ‘배꽃계집큰배움터’로 하자는 식의 주장부터 따지면, 제법 긴 세월 우리말 사랑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어령 선생께서는 평생 이룬 많은 일 중에서 무엇을 가장 보람 있게 여기느냐는 질문에 문화부장관을 하면서 ‘갓길’이라는 낱말을 널리 쓰이게 정착시킨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 많은 업적 중에서 ‘갓길’이라니, 우리말에 대한 짙은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백기완 선생의 지극한 우리말 사랑도 유명하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같은 말들이 선생께서 처음으로 쓴 낱말들이다. 조금 덜 알려진 어여쁜 순우리말로는 땅별(지구), 한살매(인생), 배내기(학생), 덧이름(별명), 새뜸(뉴스), 들락(문), 눌데(방) 등이 있다. 선생께서는 평소 말과 글에서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 같은 외래 어휘를 삼가고 순우리말을 살려 쓰려 애쓰셨다.
 
아름다운 순우리말 살리기는 글 쓰는 이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훌륭한 작가들께서 우리말 지킴이 역할을 든든히 해주셨다. 많은 시인을 비롯해서, ‘토지’의 박경리 선생, ‘혼불’의 최명희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정겹고 아름다운 순우리말, 특히 토박이 우리말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왔다. 최근의 작가로는 ‘국수(國手)’의 김성동을 꼽을 수 있겠다. 이분들의 작품에는 낱말 사전이 함께 붙어 있을 정도로 감칠맛 나는 순우리말의 보물창고다.
 
이분들이 이처럼 우리말 지키기에 헌신한 까닭은 말이란 단순히 의사소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겨레의 얼과 넋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정신의 열매라고 믿기 때문이다. 말이 망가지면 정신도 허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순우리말 지키기는커녕 외래어, 무차별적으로 발명해내는 신조어에 떠밀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어떤 가치를 바로 세우기는 힘들고 시간이 걸리지만, 망가뜨리기는 한순간이다. 말도 그렇고, 정신도 그렇다. 지금 우리말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
 
문제는 우리말 망가뜨리기를 나라에서 솔선수범하고, 언론들이 부추기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나 공공기관의 공식 문건에 사용되고 있는 외래어를 모아놓은 자료를 살펴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으로 심각하다. 무슨 뜻인지 모를 말도 많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카르텔’이라는 낱말….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고, 꼭 이런 말을 써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고위공직자나 정치인이 공식 석상에서 외국어를 마구 사용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외국어가 마구잡이로 난무한다. “시리어스한 논의도 별로 못 했어요. 지금까지 어프로치가 좀 마일드한 것 같아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가 한 국제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열린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하신 말씀이다. 아무리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하는 분이라지만, 고위 공직자가 공개 석상에서 영어를 남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없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적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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