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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이 보안관? 풍자와 조롱, 파격의 전복적 서부극

1970년대 서부극에 흑인 보안관의 등장이라니, 믿어지는가? 1974년, 미국 영화계에 한 차례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그 폭풍의 이름은 바로 ‘불타는 안장(Blazing Saddles)’.     멜 브룩스 감독의 이 걸작은 전통적인 서부극 장르를 신랄한 풍자와 파격적인 유머로 재창조하며 당시 관객들의 기대를 완전히 뒤엎었다.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인종 문제와 사회적 부조리를 가차 없이 조롱하며 미국 사회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  그의 유머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통쾌하다.     영화는 평화로운 서부의 백인들만 살던 작은 마을 락 리지에 철도가 놓이면서 시작된다. 주 법무장관 헤들리 라마는 철도 사업을 이용해 마을 땅을 헐값에 매입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인종 차별이 만연한 마을 분위기를 이용해 흑인 사형수였던 바트를 보안관으로 임명하는 교묘한 계략을 쓴다. 예상대로 마을 주민들은 바트를 경계하고 적대감을 드러내지만, 극한의 상황 속에서 바트의 용기와 재치에 감화되어 점차 마음을 열게 된다. 라마는 결국 무력으로 마을을 장악하려 하지만, 바트와 마을 주민들의 끈끈한 유대감과 맞서 싸우다 실패하고 만다.   정의로운 보안관이 악당을 물리친다는 내용은 서부극에 잘 사용되는 소재이기는 하나 흑인 보안관을 주인공으로 세운 것은 당시로써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한 인종적 다양성을 넘어,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또, 백인 영웅 대신 흑인 보안관이 등장하고, 선악이 분명하게 대립하는 단순한 구조 대신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예측불허의 상황을 연출했다.   코미디 영화의 아름다움은 사회의 문제점과 현실의 부조리를 꼬집어 유쾌하게 풀어냄과 동시에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 역시 유머와 풍자를 절묘하게 조화시켰다는 것이다. 서부극 특유의 배경 음악과 영상미를 과장되게 표현해 코믹한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를 통해, 인종차별과 서부극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동시에 풍자하며,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대표적으로 감독은 KKK 단원과 나치를 비롯한 악당들이 줄지어 등장하는 장면이나 ‘Yes’와 ‘No’를 칠해 놓은 황소, KKK단의 하얀 가운 뒤에 적힌 ‘Have a nice day’, 평원에 등장하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시각적인 개그로 작품의 풍자적 깊이를 더했다.     또, 이 영화는 브룩스 감독 특유의 기발한 연출 기법이 돋보이기도 한다. 초현실주의와 슬랩스틱 코미디, 패러디, 당시로써는 파격적일 정도의 저속함이 조화를 이루며,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과장된 총격전, 기상천외한 무기, 슬로우 모션과 속도감의 조화, 극단적인 리액션 등을 통해 서부극의 전형적인 액션 장면을 파격적으로 비틀고 코믹하게 재해석했다.   멜 브룩스 감독이 이 작품에서 사용한 유머는 단순히 시대의 유행을 좇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과 사회 구조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권력 남용,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 인간의 욕망 등 시대를 초월한 주제들을 유쾌하게 다루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1970년대는 미국 사회가 격동기를 겪던 시기였다.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인해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불타는 안장’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권위에 대한 반항,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비판, 인종차별, 새로운 가치관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   정하은 기자 chung.haeun@koreadaily.com브룩스 서부극 서부극 장르 서부극 특유 브룩스 감독

2024-08-28

칠레 독립에 묻은 인디언의 피를 담은 서부극

20세기 초 칠레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 펠리페 갈베스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칠레의 2024년 아카데미상 국제영화 부문 출품작이다. 2023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어 국제비평가협회(FIPRESCI)상을 수상했다.     식민지 시대의 1901년. 칠레의 정착민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지만 여전히 모든 권력과 부는 유럽인들의 몫이다. 칠레가 독립을 선언하기 전 이 땅의 유럽인들은 되도록 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 측량작업에 한창이다.     아르헨티나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티에라 델 푸에고 지역의 과두제 지주이며 스페인 재벌인 호세 메넨데즈(알프레도 카스트로)도 엄청난 면적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3명의 총잡이들을 고용한다. 스코틀랜드의 전직 군인 알렉산더 맥레넌(마크 스탠리), 텍사스 출신의 카우보이 빌(벤자민 웨스트폴), 그리고 백인과 인디언 혼혈 세군도(카밀로 아린시비아)가 그들이다. 과묵한 세군도는 목적지를 향하던 중 자신의 진정한 임무가 원주민 인디언들을 메넨데즈의 땅에서 ‘제거’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들 일행은 파타고니아에 이르러 그들처럼 땅 확보에 나선 아르헨티나 기병들과 맞닥뜨린다. 그러나 그들 여정의 주목적인 원주민 학살을 이어간다. 권위적이며 오만한 맥레넌은 빌과세군도에게 강간과 살상을 명령한다. 세군도는 살상의 주역이 되길 거부하지만 맥레넌의 강압에 어쩔 수 없는 공모자가 된다. 그의 마음속에 분노와 살의가 쌓여간다.   도망가는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향해 총을 쏘아대는 3명의 저격수들. 짙은 안개 속에서 산발적으로 보이는 총구의 섬광에 화면 밖 죽어가는 인디언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지옥을 보는 듯한 무자비하고 노골적인 살상은 그들이 지나는 파타고니아의 장엄한 산맥, 평온한 초원과 대조를 이룬다.     7년의 세월이 흐른다. 대통령의 특사 바쿠나가 메넨데즈를 방문한다. 그가 사주했던 인디언 학살을 조사하기 위해서다. 메넨데즈는 자신이 국가 이익에 공헌(?)했다고 주장한다. 바쿠나는 인디언 여성 키에피아와 결혼하여 외딴 섬에서 살고 있는 세군도를 찾아간다. 피비린내를 머금은 세군도의 독백, 바쿠나의 촬영을 거부하는 키에피아의 무표정에 저항과 울분이 서려있다.   땅을 정복하고 통제하려는 유럽인들의 식민주의, 돈과 땅에 무너지는 인류의 본성. 약탈과 기만의 형태로 되풀이되는 역사. 단지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무자비하게 희생된 칠레 원주민들을 보며 인간 본성의 최악을 목격한다.     칠레의 독립과 건국 언저리에서 자행됐던 무자비한 학살을 서부극의 형태로 그려낸 갈베즈 감독은 유럽인들의 인종차별과 백인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영화는 가려진 역사의 처벌되지 않은 폭력을 징벌하고 있다.   김정 영화평론가인디언 서부극 칠레 독립 원주민 인디언들 인디언 학살

2024-01-12

[영화몽상] 서부극의 오묘한 변신

 대개의 영화 장르가 미국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그 중에도 서부극은 지극히 미국적인 장르라는 데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     미국적이라고 곧 미국산이란 뜻은 아니다. 1960~70년대에는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 즉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산 서부영화가 붐을 이루기도 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같은 스파게티 웨스턴은 미국으로 역수출돼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스타로 만들었고, 지금도 할리우드 고전들과 나란히 서부극의 명작으로 꼽힌다.   지난달 극장 개봉을 거쳐 이달 초 넷플릭스에 공개된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는 새로운 서부극이다. 1925년 미국 몬태나의 목장이 배경인데, 총싸움이나 결투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물리적 폭력 대신 언어·심리적 폭력에 움츠러드는 인간, 유약해 보이지만 무섭도록 비정한 인간 등이 얽혀 결말을 예상하기 힘든 드라마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서부극의 전형성과 사뭇 다른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인다. 그 중에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필은 곱씹어볼 만한 오묘한 캐릭터다. 함께 목장을 경영하는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가 무던한 사업가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필은 말과 행동이 거칠고 담대한 카우보이다. 한데 이와 다른 면모가 켜켜이 드러난다. 실은 예일대를 다닌 지적인 인물이고, 혼자 연주하는 벤조 솜씨도 일품이다.  식당에서 종이로 만든 꽃을 보고 그 솜씨에 감탄하는 것도, 꽃을 만든 사람이 여성이 아니라 식당 주인 로즈(커스틴 던스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라는 것을 알고 무자비한 조롱과 모욕을 안겨주는 것도 필이다. 교양과 폭력을 동시에 분출하는 필은 동생 조지가 남편 잃은 로즈를 아내로 맞은 이후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캐릭터의 면면에서 짐작하듯, 기존 서부극과 사뭇 다른 이 영화에선 황량하고 광활한 자연을 비롯해 서부극의 고전적 분위기가 물씬하다. 한데 이 자연은 미국 서부가 아니라 뉴질랜드에서 촬영했다. 주연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알다시피 미국 서부는 커녕 영국 출신이다. 장엄한 분위기를 북돋우는 음악은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의 솜씨다. 그리고 감독은 제인 캠피온이다. 1993년 ‘피아노’로 칸영화제에서 여성감독으로는 사상 처음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로 그 뉴질랜드 감독이다. 이 영화는 그에게 무려 12년 만의 신작이다. 어느덧 6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군더더기 없고, 빈틈없는 유려한 연출의 이 새로운 서부극으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서부극의 본고장, 미국 영화제의 반응도 궁금해진다. 이후남 / 한국 문화디렉터영화몽상 서부극 오묘 기존 서부극 유럽산 서부영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2021-12-19

[J네트워크] 서부극의 오묘한 변신

 대개의 영화 장르가 미국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그 중에도 서부극은 지극히 미국적인 장르라는 데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 카우보이나 총잡이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고, 생존을 위해 싸우는 배경은 다름 아닌 서부 개척 시기의 미국이다.   미국적이라고 곧 미국산이란 뜻은 아니다. 1960~70년대에는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 즉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산 서부영화가 붐을 이루기도 했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같은 스파게티 웨스턴은 미국으로 역수출돼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스타로 만들었고, 지금도 할리우드 고전들과 나란히 서부극의 명작으로 꼽힌다.   지난달 극장 개봉을 거쳐 이달 초 넷플릭스에 공개된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는 새로운 서부극이다. 1925년 미국 몬태나의 목장이 배경인데, 총싸움이나 결투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물리적 폭력 대신 언어·심리적 폭력에 움츠러드는 인간, 유약해 보이지만 무섭도록 비정한 인간 등이 얽혀 결말을 예상하기 힘든 드라마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서부극의 전형성과 사뭇 다른 캐릭터의 매력이 돋보인다. 그 중에도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필은 곱씹어볼 만한 오묘한 캐릭터다. 함께 목장을 경영하는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가 무던한 사업가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필은 말과 행동이 거칠고 담대한 카우보이다.     한데 이와 다른 면모가 켜켜이 드러난다. 실은 예일대를 다닌 지적인 인물이고, 혼자 연주하는 벤조 솜씨도 일품이다. 식당에서 종이로 만든 꽃을 보고 그 솜씨에 감탄하는 것도, 꽃을 만든 사람이 여성이 아니라 식당 주인 로즈(커스틴 던스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라는 것을 알고 무자비한 조롱과 모욕을 안겨주는 것도 필이다.     교양과 폭력을 동시에 분출하는 필은 동생 조지가 남편 잃은 로즈를 아내로 맞은 이후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캐릭터의 면면에서 짐작하듯, 기존 서부극과 사뭇 다른 이 영화에선 황량하고 광활한 자연을 비롯해 서부극의 고전적 분위기가 물씬하다. 한데 이 자연은 미국 서부가 아니라 뉴질랜드에서 촬영했다.     주연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알다시피 미국 서부는커녕 영국 출신이다. 장엄한 분위기를 북돋우는 음악은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의 솜씨다. 그리고 감독은 제인 캠피온이다. 1993년 ‘피아노’로 칸영화제에서 여성감독으로는 사상 처음 황금종려상을 받은 바로 그 뉴질랜드 감독이다. 이 영화는 그에게 무려 12년 만의 신작이다. 어느덧 6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군더더기 없고, 빈틈없는 유려한 연출의 이 새로운 서부극으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서부극의 본고장, 미국 영화제의 반응도 궁금해진다. 이후남 / 한국 중앙일보 문화디렉터J네트워크 서부극 오묘 기존 서부극 유럽산 서부영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20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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