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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핵개인을 찾아서

자신의 삶에 주체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는 사회 변화를 관찰하고 이들을 ‘핵개인’이라 정의하는 책을 펴냈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분이 읽으신 후 주신 의견은, 놀랍게도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내친김에 이러한 ‘핵개인’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들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나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모든 개체의 꿈이라 할 수 있지만, 환경의 척박함은 그 꿈을 현실화하기 어렵게 제한했습니다. 홀로 생존할 만큼의 근육을 가지지 못함에도 우리 종이 이 별을 지배하게 된 것은, 무리를 지어 협동했기 때문이라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물을 쉬임없이 대야 하는 쌀농사를 고집스레 지어온 이 땅의 사람들은 더욱, 혼자보다 이웃과의 삶이 절실했다고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는 『쌀, 재난, 국가』에서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오랜 시간 부대끼며 살아와 옆집 숟가락 수도 알 만큼 가깝고, 모내기와 추수를 함께 하며 결속된 관계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기 마련이라 설명합니다. 이러한 문화를 이어온 우리는 친구와 비슷해진 자신의 모습에서 안온감을 느꼈고, 자신의 목소리를 주장하는 당연한 본능에도 왠지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무리에 속하지 않고도 오롯이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분들이 눈에 띕니다. 무엇보다 이런 흐름이 오기 훨씬 전부터 고집스레 자기만의 기예를 펼쳐 온 그들을 보면, 그 자존과 자신감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남들보다 먼저 자신의 길을 만들어 온 분들을 인터뷰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인터뷰 대상은 가수이자 작곡가인 윤종신씨로, 그는 오랜 기간 노래를 만들고 불러 왔습니다. 기성의 시스템에서도 성취가 많았던 그는 좀 더 지속가능한 작품 활동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합니다. 큰 자본이 있어야 음반을 만들 수 있는 환경에서 꾸준히 저작물을 만드는 것은 엄청난 행운을 가진 이들만 가능했습니다. 생산의 주기가 길어지면 지금의 감성이 관객에게 전달될 때까지 지연 역시 필연적이기에 그는 그 간극을 줄이기 위해 ‘월간 윤종신’을 창간하고 매달 새 곡으로 대중에게 직접 다가가고 있습니다. 거대한 시스템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작품활동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독자적 플랫폼을 만든 것입니다.   두 번째 인터뷰는 작가 이슬아씨 입니다. 십대부터 ‘어딘글방’에서 글쓰기를 꾸준히 수련해 온 지망생 시절의 그는 자신의 작품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고민했다 합니다. 작가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 필요했던 등단이라는 기존 통과의례는 일간지의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추천과 같은 방식이 전제되었고, 혹여 등단을 한다 해도 미디어나 출판사를 통해서 독자와의 조우가 허락되는 구조에 그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 대안으로 ‘일간 이슬아’라는 플랫폼을 열고 구독료를 내면 하루에 한 편의 글을 보내주는 ‘글의 직거래’를 실현했습니다. 쌓인 저작물 역시 자신의 출판사를 창업해 직접 발간하고 있습니다. 글의 창작부터 유통에 이르는 전 과정을 내재화하여 저자와 읽는 이의 경로를 스스로 확보한 것입니다.   세 번째 인터뷰는 유튜버이자 작가인 이연씨 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나 쉽다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그는 순수미술과 디자인을 복수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 관련 회사에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산업계의 구조를 배우며, 그는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촬영하고 자기 생각을 특유의 내레이션으로 더한 영상들을 자체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법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창작 과정의 섬세함과 삶에 대한 그만의 관점을 조곤조곤 전달하며 어느덧 구독자는 9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를 찾고 있는, 각자의 시그널을 보내고 싶어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담담한 어투에 팬들은 용기를 얻습니다. 이에 호응해 그의 콘텐트 역시 동영상을 넘어 책으로, 강연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핵개인들은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그의 팬에게 다가갈 수 있는 스스로의 채널을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기존 시스템에 의지하는 한 자신의 목소리를 올곧게 계속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차분히 준비합니다.   몸으로 이야기하는 무용가도, 모노드라마를 연습한 연극배우도, 악기를 숙련한 연주자도, 우리는 모두 무대가 필요합니다. 세종문화회관이 아니어도 예술의전당이 아니어도 족합니다. 나의 마음을 전하고픈 지음의 상대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작은 무대로도 충분합니다. 메세나의 은전을 바라지 않고도 나의 팬에게 울림을 전하기 위해 핵개인은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어 나갑니다.   우리 모두의 꿈은 자신의 건물을 가진 건물주가 아닌, 자신의 무대를 가진 핵개인이 되어갑니다. 송길영 / Mind Miner빅데이터 핵개인 윤종신 사회학자 이철승 독자적 플랫폼 인터뷰 대상

2023-12-10

[기독교와 사회물리학] 교회는 사회 현상 외면 말아야

19세기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Emile Durkheim)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자살률을 비교하여 사회통합이론을 세우고 자살의 원인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그는 자살을 이기적(egoistic) 자살, 이타적(altruistic) 자살, 아노미적(anomic) 자살, 숙명적(fatalistic) 자살로 구분하였다. 이기적 자살은 집단의 결속력이 약화하여 개인주의화된 사회에서 발생한다. 이타적 자살은 개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신이 속한 사회에 더 가치를 둔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노미적 자살은 무질서한 사회 혼란 시기에 나타나는 자살로 대량실업이나 사업의 실패 등으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숙명적 자살은 사회적 압박이 강력하게 가해졌을 때 이를테면 전쟁포로와 같은 상황에서 나타난다. 뒤르켐은 개인주의가 만연해지고 사회통합의 정도가 약화하면 이기적 자살이 나타나고, 반대로 사회통합이 강화되어 집단주의가 득세하면 이타적 자살이 증가한다고 보았다. 사회적으로 갑작스러운 변화가 나타나 규제가 약해지면 집단적 질서가 흔들리고 이때 아노미적 자살이 발생한다.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미국의 사회학자 머튼(Robert King Merton)은 아미노 이론을 발전시켜 경제적 성공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문화 속 사회는 불평등 구조가 심화하여 자살과 같은 일탈 현상이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기독 영성은 인간 자신과 속해 있는 사회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힘으로 자살 생각이나 자살 행동의 위험성을 약화하는 보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자살 보호 요인은 자살에 대한 개인의 심리나 행동의 문제 발생을 완화하는 요인을 말한다. 자아 탄력성(ego-resilience)은 스트레스가 있을 때 정서적 행동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건강하게 적응하는 능력이다. 영성은 자아 탄력성을 보강하여 극단적인 자살 생각을 이겨내게 하는 중요한 자살 보호 요인이다. 미국 원주민을 대상으로 벌인 영성과 자살의 인과관계 연구를 살펴보면 영성이 높을 때 자살 생각이 감소하고 영적 지향성이 높을수록 자살률이 낮게 나타난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개인의 영성이 유지되고 높아졌을 때 자살 생각이 현저히 줄어든다.   기독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수직적 차원의 형이상학적 종교적 영성과 자신과 타인 및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수평적 차원의 실존적 영성을 포함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이웃과 조화로운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성숙한 기독 영성은 지정의와 함께 전인적 삶의 기초가 된다.     교회는 영성을 훈련하는 기관이면서 사회적 통합기능을 강화해주는 신앙 공동체이다. 주일예배와 같은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사회적 통합을 체감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 교인들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영성 프로그램은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 자살 생각을 막을 수 있다. 현대 교회는 모든 교인이 영성훈련에 매진할 수 있도록 영성 프로그램을 창조적으로 개발하고 운영하면서 비교인들도 영성훈련에 초대하여 스트레스를 견디고 극복할 수 있도록 영성을 배양하는 영적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도 자살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일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 현대 교회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사회현상을 외면하지 말고 자살 방지를 교회의 사회적 사명으로 여기고 건강한 영성 개발에 힘써 자살 생각을 막는 첨병이 되어야 할 것이다.   [email protected] 조철수 / 목사·맥알렌세계선교교회기독교와 사회물리학 교회 사회 사회학자 뒤르켐 현대 사회학 사회학적 관점

2023-11-20

[신 영웅전] 막스 베버의 고민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 그 자본주의를 가장 고민하며 성찰한 사람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인데, 정작 그는 자본주의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첫째,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요구다. 노동 계급의 투쟁이 순수하게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며 전개된 역사적 사례는 드물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업과 태업, 공사 중단, 시설 점거, 환경 논란, 피해 보상, 기업 유치 요구, 혐오 시설 등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국민총생산의 27%(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다. 이는 삼성(21%)과 LG(7.7%) 계열사들의 매출을 다 합친 것과 같다.   둘째, 훈련되지 않은 자유 의지의 폭주다. 자코뱅 시대의 심리를 연상하게 하는 군중은 질주, 분노, 복수심, 반일, 고함, 신분 상승의 욕구, 토지·주택에 대한 갈망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다. 인류 역사에서 자유가 자유를 유린한 사례는 허다했다. 그들은 정의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분노하며 질주한다. 그들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함께 요구하지만,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는 없었다. 자유·평등·박애를 함께 이루려던 프랑스혁명은 허구였다.   셋째, 자본가의 탐욕이다. 애덤 스미스의 가장 큰 실수는 끝까지 성선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장밋빛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가가 양심과 자비심에 따라 살리라고 믿었고, 인간이 재화 앞에서 얼마나 비정한지를 예견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본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선량한 예언자였지 지혜로운 선지자는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는 행복하지 않다. 목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수단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 영웅전 막스 베버 막스 베버 사회학자 막스 자본주의 사회

2023-11-19

“한인 사회학자, 제 자리 계승할 수 있었으면”

재외한인사회연구소(RCKC)를 설립, 한인 이민사회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를 해 온 민병갑(사진) 뉴욕시립대 퀸즈칼리지 석좌교수가 내년 은퇴한다.     민 교수는 13일 뉴욕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제 나이가 벌써 81세로, 이제 저는 연구에만 집중하고 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한인 교수를 찾으려 한다"며 "한인 커뮤니티에 대해 잘 알고, 연구소를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내년 여름께 은퇴식을 갖고 은퇴하지만, 그는 한인 이민사회에 대한 연구는 이어갈 계획이다. 그는 "한인 커뮤니티를 다룬 자료를 제공하는 중요한 미션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설립도 타진 중이다. 그는 "충남 보령군에서 출생, 농사짓는 부모 밑에서 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어려운 이들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당초 그는 7남매로 태어났지만, 다들 적절한 의료지원을 받지 못해 세상을 뜨고 혼자만 남게 됐다. 민 교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한 후에도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서 자며 걸어서만 이동했고 점심도 거르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전했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유학을 결심한 그는 1972년 미국으로 왔다. 조지아주립대에서 사학 석사, 교육철학 박사, 사회학 박사학위 등을 잇달아 취득한 그는 고생 끝에 45세가 돼서야 퀸즈칼리지에 취업해 뉴욕으로 오게 됐다.     그는 "대규모 아시안 커뮤니티가 있는 플러싱은 저에게 최적의 장소였다"며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 교수는 뉴욕시 한인 청과인 연구·한인 등 아시안의 결혼 형태와 가정 내 모국어 사용·이민자 기업가 정신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했고 2010년엔 전국 최초로 재외한인사회를 연구하는 '재외한인사회연구소'를 출범했다. 2012년 미국사회학협회에서 아시안 최초로 국제이민부문 우수경력상을 받았고, 최근에는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 후보로도 지명됐다.     그는 "건강하게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매일 새벽 테니스를 하고 있다"며 "이젠 다른 한인 사회학자가 내 자리를 계승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자서전 집필도 준비 중이다.   김은별 기자 [email protected]사회학자 한인 한인 사회학자 한인 커뮤니티 한인 교수

2023-10-13

[기고] 어떤 애도

4월은 애도의 달이다. 4·3이 있고, 4·16이 있었다. 4·16 세월호 참사는 9년째인데도 애도는 희미해지지 않는다. 서울광장에 마련된 10·29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 최근 몇 번 갔다. 논픽션 작가 마쓰모토 하지무라의 『궤도 이탈』을 편집하면서다.   2005년 4월 25일 JR 서일본의 다카라즈카발 도시샤마에행 쾌속 제5418M 열차가 사고를 일으켜 107명이 사망하고, 562명이 부상했다. 이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고 딸이 중상을 입은 아사노 야마카즈라는 사람이 있다. 아사노는 유가족으로서 정부 및 대기업과 진실을 둘러싼 공방을 치열하게 벌이는데, 이 책은 한 작가가 그의 10년 궤적을 쫓는 내용이다.   책을 처음 접한 건 지난해 11월 초로, 번역가는 세월호를, 나는 이태원 참사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편집 과정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분께 원고를 읽어주길 부탁드리며 찾아뵈었다. “지금은 아이들을 기억하도록 해주는 일이라면 기자든 작가든 영상 제작자든 가리지 않고 다 만나지만, 결국 그 사람들은 일 마치면 끝이고 우리 유가족들은 섬처럼 고립되겠지요.” 고 최유진의 아버지 최정주씨는 프로젝트성 만남의 끝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는데, 그건 애도의 진정성을 분별하는 벼락같은 말이었다.   당신은 정말 애도했는가? 애도 후 자리를 떠 만개한 벚꽃 사이를 거닐며 아름답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면, 당신은 두 감정 사이의 널뛰기로 인해 자기를 비난할 수밖에 없게 된다. 파주에 사는 나는 2022년 9월 14일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슬픔과 분노에 젖어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추모 공간을 찾았지만, 그 김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러 최우람 작가의 전시를 보면서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그날 자아분열을 겪는 것처럼 죄책감이 들었지만, 이건 평소 SNS를 하면서 ‘슬퍼요’와 ‘좋아요’를 몇십 초 간격으로 누를 때도 느끼는 감정이다. 요즘의 탄식은 분초를 다투는 단발성 탓에 쓰라림·침잠·분노·참을성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늘 실패한 감정을 산다.(이것은 보르네오섬 다약족 사람들이 2~10년에 걸쳐 치르는 장례, 애도와 대척점에 놓인다.)   그러니 관건은 목격자로서의 반복, 되돌아감, 끈질김이다. 손쉽게 죄책감을 덜어내지 않는 것이 참사를 빈번히 목격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윤리성이리라. 『궤도 이탈』의 작가 하지무라는 유가족을 10년간 쫓았고, 미국의 사진작가 애니 아펠은 마리아라는 빈곤 여성을 카메라에 한 번 담았다가 그 가족에게 꼼짝없이 마음이 붙들려 25년간 아티스트이자 목격자로서 함께했다. 같은 선상에서 사회학자 그레이스 조의 기록도 들여다볼 만하다.   그레이스의 어머니는 주한미군 기지촌에서 남자들을 상대하다 그중 한 명과 결혼해 미국에 이민 갔고, 훗날 딸은 그런 자기 어머니를 인류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아 『전쟁 같은 맛』을 썼다. 이 책은 한국전쟁, 전쟁고아, 미군 ‘위안부’ 여성, 미군의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을 먹던 친인척들, 이민자, 모국의 음식이 불러일으키는 기억, 인종차별과 정신질환의 관련성 등 온갖 층위가 복잡하게 얽힌 연구 에세이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에 나오는 유령처럼, 어느 날 ‘옥희’라는 유령의 목소리가 그레이스 엄마의 세계를 지배한다. 조현병을 앓게 된 엄마는 50대 중반부터 죽을 때까지 방 밖으로 거의 나오지 못했다. 이런 이의 삶은 비극으로 치닫게 마련이지만, 딸이 엄마가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그는 엄마라는 장소로 첨벙 뛰어들어 유령의 목소리를 함께 들어보려고 노력한다. 방구석에서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문지방을 결코 넘지 못하는 엄마에게 다가가기 위해, ‘미친 사람’으로 지목된 엄마가 실은 사회적 요인으로 병자가 된 것임을 밝히기 위해 십몇 년의 세월 동안 엄마 곁에 붙어 위로하고, 먹이고, 이해하려 애쓴다. 엄마의 죽음 이후에는 오랜 애도가 이어지는데, 그 글들이 독자에게도 조현병자의 삶에 몇 번이고 들어가게 한다.   만남, 애도, 연구, 취재가 지속한다는 것은 세간에 떠도는 말과 상관없이 우리가 진실에 가까운 것들을 채집하도록 도와준다. 지속성을 갖는 이들은 종종 전체를 아우르는 ‘구조’의 문제를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레이스는 그 자신이 유령을 다독이거나 유령과 싸우는 장소가 되면서 그 전에는 자기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조현병자나 양극성 장애인들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펼쳐 보여준다. 그건 스쳐 지나간 사람들, 짧게 머물렀던 사람들은 알지 못할 심원함이다. 시간의 축적은 마침내 한 사람의 마음속에 넓은 터를 만들어 역사가 그 안에 새겨지도록 하는 반면, 짧게 목격하고 떨쳐냈던 이들은 훗날 예전의 자신을 반추하면서 알맹이 없는 공허를 마주할지도 모른다. 이은혜 / 글항아리 편집장기고 그레이스 엄마 사회학자 그레이스 세월호 참사

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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