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산책] 숫자 사슬에 묶인‘사람살이’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네 ‘사람살이’를 지배하는 큰 약속들이 여러 가지 있다. 시간, 돈, 법, 글자나 언어, 윤리 도덕, 숫자 등이 그런 약속이다. 우리는 그걸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가진 ‘문명’이라고 부른다. 초, 분, 시, 하루, 일년… 흐르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쪼개서 삶에 적용하자고 약속했고, 그런 약속이 모이고 쌓여서 긴 세월이 되고 역사가 된다. 양력과 음력의 차이, 윤년, 서머타임 따위의 해결 방안은 그때그때 마련된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돈이라는 괴물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막강한 약속일 뿐이다. 그저 뭔가를 인쇄한 종이 쪼가리인데 사슬처럼 우리를 묶는다. 신용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약속들은 인간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존재로 군림하게 되었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쳐서 그렇지, 사실은 인간이 이미 노예로 묶여버린 경우도 적지 않다. 벗어나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막강한 숫자의 위력에 대해서 상세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숫자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숫자다. 표를 많이 긁어모으는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그래서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사생결단 피터지게 싸운다. 표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태세다. 표를 얻기 위해서 이대남, 2030, 5060, 386 하는 식으로 국민을 갈라치기 하고, 좌우로 나누어서 갈등을 부추긴다. 그걸 민주주의요, 다수결 원칙이라고 우긴다. 그런데 정작 표를 가진 유권자가 늘 똑똑한 것은 아니고, 다수결이 정답인 것도 아니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 31, 815, 625, 419, 516, 1026, 1212, 518, 429… 이렇게 적어 놓으면 무슨 간첩 난수표 번호처럼 보이는데, 이 숫자들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지칭하는 ‘한국식 명칭’이다.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왜 숫자로 표시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일어난 날짜가 아니라 사건의 내용일 텐데…. 사람을 숫자로 표시하면 그 순간 인격이나 개성은 사라져버린다. 죄수번호, 군번, 학번 등등. 그렇게 보면 실제로 우리는 주민등록번호, 사회보장번호, 운전면허증 번호, 여권번호, 크레딧카드 번호 등의 온갖 숫자에 묶여 있는 셈이다. 당당한 인격체가 아니라, 그냥 몇 억 인구 중의 고유번호를 가진 하나이거나 소비자 중의 하나일 뿐이다. 걸핏하면 ‘민쯩까기’를 해서 나이순으로 질서잡기, 군번이나 학번 따지기… 나이가 많으면 무조건 존경하고 받들어야 하는… 주민등록번호를 가지고 인격이나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요새는 누구나 비밀번호를 몇 개쯤 가지고 살게 마련인데, 나이를 먹으면 그걸 까먹는 통에 한바탕 난리를 치르기도 한다. 번호를 까먹으면 존재도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창조성이 생명인 예술에서도 숫자의 위력은 막강하다. 밀리언셀러, 천만 관객, 베스트셀러, 그림값, 시청률, 청취율, 조회수, 회원수, 판매부수 등등… 예술은 결코 다수결이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런 예를 들자면 차고 넘친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벗어날 수 있는 숫자의 횡포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람을 숫자로 평가하는 고약한 버릇이다. 아파트 평수, 월급 액수, 시험 성적, 석차 같은 것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것들은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 줄 세우는 기준이 될 수 없다. 행복을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숫자의 사슬에서 벗어나야 살 만한 세상이 될 텐데.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사람살이 숫자 숫자 사슬 주민등록번호 사회보장번호 죄수번호 군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