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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편지] 영웅 만들기

얼마 전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캐나다 방문 기념으로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와 함께 의회에 참석했다. 그때 98세 우크라이나 출신의 퇴역 군인이 소개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와 맞서 싸웠다는 영웅이라는 이유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과거에 나치 친위대 ‘갈리시아’의 제1 우크라이나 사단 소속 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캐나다는 국제적 망신을 샀다. 트뤼도 총리는 공식 사과했고, 하원 의장 안토니 로타는 사임했다. 러시아는 캐나다를 맹비난하며 우크라이나 침공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갈리시아 사단에 자원한 이들은 고국을 소련의 끔찍한 지배에서 독립시키기 위해 활동한 전쟁 영웅이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복잡한 지정학적인 세력에 얽매인 피해자라는 사실은 한국인으로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기원전 6세기 말 아테네의 아고라에 세워진 조각상 ‘폭군 살해자들(Tyrannicides)’이 떠올랐다.   이는 그리스 역사상 처음으로 신화 속 인물이 아닌 실재 인물을 기념하는 동상이었다. 젊은 청년 하르모디우스와 그의 연상 연인인 아리스토게이톤이 검을 내리치는 순간을 포착한 모습이다. 이들은 아테네의 폭군을 암살한 주인공으로, 민주주의를 일으킨 영웅으로 추대받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기원전 5세기의 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이들 두 명의 영웅담을 개인적인 명분의 암살이라고 지적한다. 하르모디우스가 폭군의 아우 히파르코스에게 성희롱당한 것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사건이며, 폭군 히피아스가 아닌 그 아우를 암살했다고 상기시킨다. 새로운 민주정치 체제를 도입한 아테네는 시민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영웅이 필요했고, 이 두 인물이 퍼펙트한 모델로서 부상했던 것이다. 인류사에서 영웅이 만들어지고 취소되는 수많은 사례의 원천이라 볼 수 있겠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영웅 우크라이나 사단 우크라이나 침공 우크라이나 출신

2023-10-13

[우리말 바루기] ‘사단’, ‘사달’

“사달이 나게 된 데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등과 같은 내용의 문구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방심이 이러한 사단을 가져왔다” “불안불안하더니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처럼 ‘사달’ 대신 ‘사단’이란 낱말을 쓰기도 한다. 어느 것이 맞는 말일까?   ‘사달’과 ‘사단’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이므로 구분해 사용해야 한다. 우선 ‘사달’은 사고나 탈을 뜻하는 낱말이다. 따라서 위의 예문 모두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사달’이 들어가는 게 맞다. 마지막 두 개의 예문 역시 “방심이 이러한 사달을 가져왔다” “불안불안하더니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로 고쳐야 한다.   ‘사단(事端)’은 사건의 단서나 일의 실마리를 뜻하는 낱말이다. “무분별한 개발이 사단이 되어 지역 일대의 환경오염을 초래했다”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사단’은 ‘단초(端初)’나 ‘실마리’로 바꿔 사용할 수도 있다.   ‘사달’은 주로 ‘나다’와 어울려 쓰인다. ‘사고가 났다’ ‘탈이 났다’처럼 ‘사달이 났다’가 의미가 잘 통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단’은 ‘나다’와는 어울리기 어렵다.‘사단’이 일의 실마리를 뜻하므로 ‘실마리가 났다’는 의미가 잘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단’은 주로 ‘사단이 됐다’ ‘사단을 찾았다’ ‘사단을 제공했다’ ‘사단을 구했다’ 등과 같이 ‘되다, 찾다, 제공하다, 구하다’ 등과 어울려 쓰인다.우리말 바루기 사단 사달 지역 일대 예문 모두

2023-04-13

[우리말 바루기] ‘사단’, ‘사달’

“방심이 이러한 사단을 가져왔다” “불안불안하더니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처럼 ‘사달’ 대신 ‘사단’이란 낱말을 쓰기도 한다. 어느 것이 맞는 말일까?   ‘사달’과 ‘사단’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이므로 구분해 사용해야 한다. 우선 ‘사달’은 사고나 탈을 뜻하는 낱말이다. 따라서 위의 예문 모두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사달’이 들어가는 게 맞다. 마지막 두 개의 예문 역시 “방심이 이러한 사달을 가져왔다” “불안불안하더니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로 고쳐야 한다.   ‘사단(事端)’은 사건의 단서나 일의 실마리를 뜻하는 낱말이다. “무분별한 개발이 사단이 되어 지역 일대의 환경오염을 초래했다”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사단’은 ‘단초(端初)’나 ‘실마리’로 바꿔 사용할 수도 있다.   ‘사달’은 주로 ‘나다’와 어울려 쓰인다. ‘사고가 났다’ ‘탈이 났다’처럼 ‘사달이 났다’가 의미가 잘 통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단’은 ‘나다’와는 어울리기 어렵다. ‘사단’이 일의 실마리를 뜻하므로 ‘실마리가 났다’는 의미가 잘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단’은 주로 ‘사단이 됐다’ ‘사단을 찾았다’ ‘사단을 제공했다’ ‘사단을 구했다’ 등과 같이 ‘되다, 찾다, 제공하다, 구하다’ 등과 어울려 쓰인다.우리말 바루기 사단 사달 지역 일대 예문 모두

2022-11-13

[우리말 바루기] '사단'과 '사달'

코로나19 감염자가 다시 늘어나면서 부쩍 많이 접하게 된 단어가 ‘사달’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방역수칙을 잘 안 지켜 이런 사달이 났다” “집단감염이라는 사달이 나게 된 데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등과 같은 내용의 문구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방심이 이러한 사단을 가져왔다” “불안불안하더니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처럼 ‘사달’ 대신 ‘사단’이란 낱말을 쓰기도 한다. 어느 것이 맞는 말일까?   ‘사달’과 ‘사단’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이므로 구분해 사용해야 한다. 우선 ‘사달’은 사고나 탈을 뜻하는 낱말이다. 따라서 위의 예문 모두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사달’이 들어가는 게 맞다. 마지막 두 개의 예문 역시 “방심이 이러한 사달을 가져왔다” “불안불안하더니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로 고쳐야 한다.   ‘사단(事端)’은 사건의 단서나 일의 실마리를 뜻하는 낱말이다. “무분별한 개발이 사단이 되어 지역 일대의 환경오염을 초래했다”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사단’은 ‘단초(端初)’나 ‘실마리’로 바꿔 사용할 수도 있다.   ‘사달’은 주로 ‘나다’와 어울려 쓰인다. ‘사고가 났다’ ‘탈이 났다’처럼 ‘사달이 났다’가 의미가 잘 통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단’은 ‘나다’와는 어울리기 어렵다. ‘사단’이 일의 실마리를 뜻하므로 ‘실마리가 났다’는 의미가 잘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단’은 주로 ‘사단이 됐다’ ‘사단을 찾았다’ ‘사단을 제공했다’ ‘사단을 구했다’ 등과 같이 ‘되다, 찾다, 제공하다, 구하다’ 등과 어울려 쓰인다.우리말 바루기 사단 사달 지역 일대 예문 모두

2022-07-05

[문화 산책] 김지하 시인이 남긴 숙제들

김지하 시인이 세상 떠났다는 기사를 읽고, 명복을 빌며,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책들을 찾아서 다시 읽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황토’ ‘오적’ ‘애린’ 등의 시집은 물론이고, 김지하의 사상이 담긴 ‘남녘땅 뱃노래’ ‘밥’ ‘살림’ 같은 산문집을 주로 챙겨 읽었다.   김지하는 민족정신의 큰 예술가이자 사상가다. 우리 문화 예술에 미친 영향력도 매우 크다. 하지만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말년의 행적으로 인해서 ‘변절자’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고, 예술가로도 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참 안타깝다. 소설가 이문열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지하는 “한때 헹가래 받았다가 떨어져 냉담한 대접받는 사람”이 되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인은 여러 차례 투옥되며 고초를 겪고 평생 후유증을 앓았으며 최근 수년간 지병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온갖 박해와 고통을 이겨내며 자신의 예술과 사상세계를 세워간 시인은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김지하의 예술과 사상을 정치적 이해관계나 운동권의 진영논리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일이 너무도 많았고, 그 바람에 많은 정신적 자산을 잃었다. 큰 손실이다.   한국사회의 현대화, 민주화 과정에서 투사도 물론 필요했지만 더 소중한 것은 정신을 바로 세워줄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은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평가되고, 구체적으로 계승 발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한국의 문화예술이 세계로 힘차게 뻗어나가는 지금이야말로 김지하의 사상과 철학을 든든한 도약대로 삼아야야 할 때다.   김지하의 사상 공부는 생명사상, 화엄사상, 율려(律呂), 후천개벽, 풍류, 신바람, 흰 그늘과 시김새의 미학 등 우리 겨레의 마음바탕을 읽어내고, 그것을 오늘의 삶에 구체적으로 접목시키려는 것이었다. 그 정신적 뿌리는 불교, 동학,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와 우리의 예술, 특히 민중들의 삶에서 우러난 전통이었다.   김지하는 여느 사상가들처럼 이론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시나 연극, 판소리 사설 등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표현하고, 짙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행동가였다. 또한, 원주의 지학순 주교나 장일순 선생과 함께 생명사상을 실천하는 일에도 힘썼다.   60~70년대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젊은 문화패들 사이에서 김지하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다. 문학, 연극, 탈춤이나 판소리 등의 전통예술, 미술 등 넓은 범위에서, 특히 민족민중 예술에서 ‘지하 형’으로 불리는 김지하의 생각과 주장은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에 문화 운동을 심은 민족예술 1세대의 대부였다.     이른바 ‘김지하 사단’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림의 오윤, 노래의 김민기, 춤 이애주, 창작 판소리 임진택, 탈춤 채희완, 연극의 김석만을 비롯한 ‘연우무대’ 단원들, 국악하는 김영동까지 민족민중 예술 1세대가 김지하의 영향을 받으며 각자 자기 분야에서 80년대 미학과 예술론의 성과를 이루었다.   미술 쪽에서도 80년대 초부터 활발하게 전개된 민중미술의 정신적 주춧돌을 놓은 것이 김지하 시인이었다. 1969년에 쓴 ‘현실동인 선언문’이 그것이다.   이렇게 활기차게 전개되었던 김지하의 사상과 예술의 정신을 오늘날에 되살리는 일이 바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숙제다.   끝으로 김지하를 이야기하면서 그 뒤에서 헌신한 부인 김영주와 장모 박경리 선생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여성의 존재는 늘 숨은 영웅이다. 역사의 굽이마다 그랬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김지하 시인 김지하 시인 김지하 사단 예술과 사상세계

2022-05-26

[살며 생각하며] 아! 다부동

다부동은 대구에서 불과 20㎞ 떨어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지역으로 유학산과 팔공산 사이의 큰 골짜기다. 당시 다부리와 유학산은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곳이며, 피아(彼我) 공방의 화포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었던 곳이다.    그해 1950년 8월 1일부터 9월24일까지 55일간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피아 모두 2만7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부동 전투에는 국군과 유엔군의 활약 외에도 경찰, 학도병, 노무병, 지역주민 등  보이지  않는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6·25전쟁 당시, 남침을 받은 이래 50여 일 동안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은 이곳에 최후의 교두보를 구축하고 밀고 밀리는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처음으로 적의 막강한 주력에 패배를 안겨주며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끝까지 대구를 사수했던 다부동 전투는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해낸 결정적인 전투였다.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였다. 유엔군의 작전은 어떻게든 적의 전진을 지연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 1950년 8~9월 낙동강 전선에는 김책 전선 사령관 휘하의 북한군 13개 사단이 집결해 있었고, 이에 맞서는 한국군은 5개 사단, 미군은 3개 사단이었다. 신속하게 부산까지 밀고 가서 전쟁을 끝내라는 김일성의 재촉을 받고 있던 북한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미군 사이에 처절한 결전이 벌어졌지만, 북한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전선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싸움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마다 접근전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수류탄전으로 치러졌다. 육박전도 드물지 않았다. 당연히 병력 손실이 컸다. 이 어려운 상황을  국군 1사단은 잘 버텨냈다.    북한 최고사령부가 대구 점령 시한으로 정한 8월 15일이 가까워지자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1사단이 맡은 전선 전부에서 근접전이 벌어졌다. 이즈음 북한군 105 전차사단은 새로 보급받은 전차 21대를 모두 대구 공격 사단에 투입했다. 화력이 약한 데다 전차를 갖지 못한 1사단으로선 중대한 고비였다. 백선엽 장군은 상부에 거듭 증원을 요청했다. 미 8군사령부도 1사단의 절박함을 듣고 증원군을 보냈다.     8월 15일은 그야말로 위기의 절정'이었다. 전투는 참혹했다. 사단의 모든 정면은 서로 몸으로 뒤엉키는 백병전(육박전) 양상이 됐다. 적과 너무 가까이 대치해 소총 사격보다 수류탄을 주고받는 혈투가 밤낮으로 계속됐다. 고지 곳곳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우는 지옥도가 전개된 것이다. 8월 16일 왜관 일대에 6·25 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융단폭격이 실시됐다. 이보다 앞서 8월 14일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의 1사단 정면에서 3·13·15 사단 등3개 사단으로 중앙돌파를 기도하고 있었다.     미군 27연대가 다부동에 도착했다. 1개 전차 중대와 2개  포대가 배속된 강한 화력을 가진 부대였다. 그리고 미군 2사단 23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까지 1사단을 돕기 위해 27연대 후방에 배치되었다. 국군과 미군의 3개 연대가 동원됐을 만큼 다부동 전투는 중요했다.  27연대의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11연대 1대대가 기선을 제압당해 다부동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미 1 기병사단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8군 사령부에 철수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에 백선엽 장군이 후퇴하는 병사들 앞으로 달려갔다.     "모두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 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다. 더 밀리면 나라가 망한다. 우리가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이렇게 말하고 그는 돌격 명령을 내린 채 선두에 서서 앞으로 달려 나아갔다. 이에 병사들도 사단장의 뒤를 따라 돌격했고 대대는 삽시간에 고지를 탈환했다. 8월 21일 다부동 전투는 절정으로 치달았고, 8월 22일 전세가 드디어 국군과 미군 측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고지 아래 불리한 지형에서 싸워야 했던 12연대가 드디어 유학산 정상의 적을 섬멸하고 고지를 탈환한 것이었다.     다부동 전투 현장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포격과 폭격으로 산은 한 껍질 벗겨져서 풀 한 포기 살아남은 게 없었다. 진물이 나고 냄새가 진동하는 적의 시체를 쌓아 방벽을 삼았고 적의 시체에 걸터앉아 밥을 먹었다.    포탄이 터지면 사방에 널려 있는 시체의 살점과 창자가 범벅되어 사방으로 튄다. 밥 먹다가도 그것을 뒤집어써야 했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나뭇가지에 시체의 창자가 걸려 있기도 했다. 주먹밥을 받으면 순간 똥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먼저 먹는다. 그래도 파리를 쫓아가며 그 밥을 먹어야 했다. 핏물이 괴인 계곡물을 마셨고 오줌도 마셨다. 당시 종군 문인으로 싸움터를 찾았던  조지훈 시인은 뒷날 ‘다부원에서’라는 시에서 전투 현장의 끔찍했던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5690여 명이, 국군과 미군은 3500여 명이 전사했다. 부상자까지 더해 남북이 2만7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캄캄한 밤에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 쏘고 찌르고 후려쳤다. 어둠 속에 비명이 절규했다.   다부동 전투는 전세를 바꿨다. 북한군의 기세를 꺾었다. 북한군은 다부동 패전으로 낙동강 전선 돌파에 실패했다. 반면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을 고수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전쟁은 역전됐다.    낙동강 방어선의 정면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만일 국군과 미군이 인민군에 의해 돌파당했다면 임시수도인 대구가 곧바로 함락되었을 것이고,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하였을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남은 것은 미군의 철수였다.     결국 이 다부동 전투는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아낸 결정적인 전투였다.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기적적으로 막아낸 덕분에 유엔군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백선엽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후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했고, 1·4 후퇴 뒤엔 서울을 최선봉에서 탈환했다.     한국 사람 중 11월 23일이 고 백선엽 장군 탄생 101주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 군인 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엔군사령부는 페이스북에 “오늘(11월 23일)은 백선엽 장군이 태어난 지 101주년 되는 날”이라며 추모 글을 올렸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 보여주신 리더십, 조국을 위한 일생의 헌신과 끝없는 전우애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과 중공의 침략에 맞서 대한민국을 함께 지켜낸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백선엽 장군이 100세로 별세했을 때 청와대와 민주당은 애도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국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도 조문하지 않았다. 집권 세력은 그가 일제강점기 20대 초반 나이에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반역자’로 몰고 갔다. 그런데 백악관과 국무부, 전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모두 애도 성명을 냈다. ‘한국의 조지 워싱턴’,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는 최고의 헌사를 바쳤다. 마땅히 우리 정부가 해야 할 말을 외국이 대신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외국의 사랑과 우정은 올해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101번째 생일도 유엔사가 대신 챙겨주었다.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이 올해 처음으로 ‘국군 포로’ 문제를 포함했다. 반면 문 대통령이 김정은을 세 번이나 만났지만 ‘국군 포로’를 언급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보훈처는 6·25 영웅 포스터에 국군 아닌 중공군 모습을 그려 넣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누구의 희생 덕분인가. 부끄러울 뿐이다. 대한민국은 71년 전의 다부동 전투를 잊었는가. 이승하 시인은 그의 ‘우리들의 유토피아’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아들아, 너는 아느냐. 다부동 그날 산 허물어져 하늘 뚫리어 네 할아버지 혼령조차 혼비백산했는가. 무덤은 어디서고 찾을 수 없었다. 아들아 너는 볼링 앨리 (다부동을 가리킴) 그날 대낮 같던 밤의 부르짖음을 상상할 수 있느냐…”   그로부터 71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다부동을 잊고 있다. 호국의 영웅들이 푸대접을 받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누가복음 19:40) 조그만 산마을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온 산하가 젊은이들의 피로 물들이고,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늘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그 황폐했던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조국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김건 칼럼 사단 미군 국군 1사단 국군과 유엔군

202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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