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이 아침에] 비 오는 날의 일기

겨울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고 산타아나 강둑을 걷는다. 빗방울 소리가 부드럽다. 비닐우산 위에 떨어지던 다급하고 신산한 소리가 아니다. 그새 꽤 멀리 오긴 온 모양이다.   빗줄기가 강해진다. 바람도 덩달아 날뛰기 시작한다. 오래전 산티아고 길을 걷던 날도 이렇게 비가 내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 진흙탕 길을 걷는데 한 발 옮겨놓기가 힘이 들었다. 비바람에 우장이 찢겨 나가고 신발은 물이 질컥거렸다. 춥고 배가 고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전거를 메고 들고 흙탕길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길게 이어졌다. 쏟아지는 빗속을 한 발 한 발 말없이 걸어가는 인간의 행렬은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였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저 고생을 하며 이 길을 걷고 있을까. 나는 또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고 있는가.   살다 보면 비바람 치는 날을 만나기 마련이다. 어느 날 눈보라가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번쩍인다면 기회가 멀지 않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날씨가 항상 좋으면 사막이 된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어느새 어둑어둑하다.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눈썹부터 꼼꼼히 늙어가는 거울 속 내가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웃는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내 방에 들어와 의자에 앉는다. 네 평 남짓 작은 방이다. 새 책의 첫 장을 넘긴다. 내 세상이 한 뼘씩이라도 넓어져 가면 좋겠다.     밤이 깊어간다. 어둠은 세상을 낳는다. 새를 낳고 꽃을 낳고 나무를 기른다. 사람도 기른다. 깜깜한 밤, 자리에 누워 바람 부는 소리를 듣는다. 전기선을 울리며 지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무섭다. 살점이라도 떼어갈 것 같다. 투두두둑 지붕을 쓸어가는 빗방울 소리가 울린다. 홈통을 내려오는 물소리를 들어보니 적잖이 오는 모양이다. 높은 곳은 저 비가 눈이 되어 내리겠다. 이 춥고 으스스한 시간, 뒷마당을 드나들던 토끼들은 옹기종기 제집에 나처럼 옹송거리며 숨어있겠지. 다리 밑 홈리스들은 이 밤을 어떻게 지낼까. 저녁이나 제대로 먹었을까.     태풍이 불어오는 모양이다. 우리들의 가슴도 태풍이 휩쓸어 갈 때가 있다. 예고도 없이 벼락이 치고 자락비가 쏟아지듯, 견딜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밤새도록 온몸을 흔들어 댈 때가 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두 번, 혹은 몇 번씩 겪어내야 하는 일이다.     슬픔에 섬처럼 잠겨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더는 어쩔 수 없는 그때야 하느님을 찾는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그 분을 생각하면 나에게 평온이 깃든다. 전지전능하신 당신이 잘잘못을 판단하여 다 해결해 주겠다는데 내가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 어떤 이로부터 들었던 말들을 생각해본다. 스치듯 지나며 그가 던진 한마디가 고맙고 눈물겹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고 죽인다. 말의 한계는 생각의 한계라 했다. 말은 품격을 가늠하는 잣대다. 나는 오늘 허툰 말로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나 않았는지 곰곰 되뇌어본다.    오늘 읽었던 성서의 욥기 구절. ‘인생은 베틀의 북처럼 빠르다’ 는 말이 떠오른다.  정찬열 / 시인이 아침에 일기 빗방울 소리 오래전 산티아고 산타아나 강둑

2024-02-19

[삶의 뜨락에서] 새롭게 다시 또

그리워서 아득히 먼 곳, 고국! 그곳에도착하였다.   오랜 가뭄 끝 내리는단비같이, 기다려왔던 친구를 혜화 아르코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이 만남이 설레어 간밤의 잠자리를 뒤척인 나는, 극장 앞 마로니에 공원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였다. 고국 여행이 안겨주는 들뜬 마음을 6월의 꽃이 활짝 핀 마로니에 큰 나무 그늘에 앉자 고른 숨으로 달래보기도 하고, 주변을 서성거려 보기도 하였다. 아르코 극장의 빨간 벽돌 앞에서 셀카도 찍어보고 포스터, 팸플릿 프로그램을 챙겨 가방에 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광장 마당의 한구석에 세워진 가로 기둥, 세로 기둥, 조각보 같은 언어의 나열, 대형 문자의 조형물에 온전히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세런디피티(뜻밖의 우연)/ 인생은 마라톤/ 난 날 믿어/ 세상에 너 혼자라고 믿지 마/ 참아야 하는 의무/ 휴식이 필요해/ 잘하고 있어/ 아무도 잘못 하지 않았어./ 누가 뭐라 하던 무슨 상관이야/ 내가 네 편이 되어줄게/ love yourself/ 모두 정답/ 새롭게 다시 또/ everything will be okay. (…)     유례없는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의 불확실과 불균형과 패러다임의 혼돈 속에 저마다 버겁게 끌고 나가는 각자의 삶에, 누군가 위안과 용기를 주려고 모아놓은 문자의 조형물!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따뜻하면서도 강렬하고 호소력 넘치는 표어를 천천히 읊조리듯 읽어내려 보았다. 위로 인지, 삶의 버거움의 연민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잠시 울컥했다. 머릿속에는 이곳에 도착하여 만난 가족과 친구의 얼굴이 한명 한명 떠올랐다.     독보적인 개별자의 발걸음으로 저마다 당당하게 밀고 나가는 삶의 모습이지만 언뜻언뜻 스쳐 보이는 뒤 안의 피로와 우울과 외로운 그들에게 각자에게 필요한 상징적 표어를 가져와 가슴에 안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상념에 빠져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여름비, 빗방울이 머리 위로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고 친구는 어느새 왔는지 내 곁에 조용히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비를 피해 들어간 맛집에는 후덥지근한 응어리를 달래줄 와인이 있었고 삶이 소중해서, 비루해서, 감사해서, 황홀해서 우리의 대화는 길어졌고 불빛이 사그라지는 대학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놀랍게도 그날 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자책의 우물 속에 신음하는 옛 친구를 찾아가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어.’라는 문장이 쓰인 쪽지를 건네주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며 앉아 있는 내 머리 위로 everything will be okay…/ …모두 정답/ 새롭게 다시 또, 낮에 본 표어들이 조각별이 되어 새벽 창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곽애리 / 시인삶의 뜨락에서 아르코 극장 여름비 빗방울 마로니에 공원

2022-06-17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