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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새롭게 다시 또

그리워서 아득히 먼 곳, 고국! 그곳에도착하였다.
 
오랜 가뭄 끝 내리는단비같이, 기다려왔던 친구를 혜화 아르코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이 만남이 설레어 간밤의 잠자리를 뒤척인 나는, 극장 앞 마로니에 공원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였다. 고국 여행이 안겨주는 들뜬 마음을 6월의 꽃이 활짝 핀 마로니에 큰 나무 그늘에 앉자 고른 숨으로 달래보기도 하고, 주변을 서성거려 보기도 하였다. 아르코 극장의 빨간 벽돌 앞에서 셀카도 찍어보고 포스터, 팸플릿 프로그램을 챙겨 가방에 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광장 마당의 한구석에 세워진 가로 기둥, 세로 기둥, 조각보 같은 언어의 나열, 대형 문자의 조형물에 온전히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세런디피티(뜻밖의 우연)/ 인생은 마라톤/ 난 날 믿어/ 세상에 너 혼자라고 믿지 마/ 참아야 하는 의무/ 휴식이 필요해/ 잘하고 있어/ 아무도 잘못 하지 않았어./ 누가 뭐라 하던 무슨 상관이야/ 내가 네 편이 되어줄게/ love yourself/ 모두 정답/ 새롭게 다시 또/ everything will be okay. (…)  
 
유례없는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의 불확실과 불균형과 패러다임의 혼돈 속에 저마다 버겁게 끌고 나가는 각자의 삶에, 누군가 위안과 용기를 주려고 모아놓은 문자의 조형물!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따뜻하면서도 강렬하고 호소력 넘치는 표어를 천천히 읊조리듯 읽어내려 보았다. 위로 인지, 삶의 버거움의 연민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잠시 울컥했다. 머릿속에는 이곳에 도착하여 만난 가족과 친구의 얼굴이 한명 한명 떠올랐다.  
 
독보적인 개별자의 발걸음으로 저마다 당당하게 밀고 나가는 삶의 모습이지만 언뜻언뜻 스쳐 보이는 뒤 안의 피로와 우울과 외로운 그들에게 각자에게 필요한 상징적 표어를 가져와 가슴에 안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상념에 빠져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여름비, 빗방울이 머리 위로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고 친구는 어느새 왔는지 내 곁에 조용히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비를 피해 들어간 맛집에는 후덥지근한 응어리를 달래줄 와인이 있었고 삶이 소중해서, 비루해서, 감사해서, 황홀해서 우리의 대화는 길어졌고 불빛이 사그라지는 대학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놀랍게도 그날 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자책의 우물 속에 신음하는 옛 친구를 찾아가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어.’라는 문장이 쓰인 쪽지를 건네주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며 앉아 있는 내 머리 위로 everything will be okay…/ …모두 정답/ 새롭게 다시 또, 낮에 본 표어들이 조각별이 되어 새벽 창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곽애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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