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문화산책] 보라색 동그라미 태극기

집안 환경 탓으로 우리 아이들은 어린 시절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림 그리는 엄마 옆에서 놀면서 자연스럽게 붓을 잡아 휘두른 것이다.   두 살 남짓 무렵 아이들의 그림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좋았다. 아무런 꾸밈도 거침도 생각도 없는 그림…. 첫 아이의 그림은 엄마 개인전 때, 한구석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전시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그들이 성장한 후에도 예술가로 남을 수 있는가이다”라는 피카소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그 무렵, 어느 날 문득 태극기가 눈에 띄기에 아이에게 주며 이걸 그려보라고 한 적이 있다. 아이가 태극기가 무엇인지, 거기에 어떤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지 알 리 없고, 나도 그냥 호기심에 그려보라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그린 태극기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한가운데 보라색 동그라미가 크고 당차게 자리 잡고 있고, 그 네 주위를 시커먼 작대기가 감싸고 있는 작품(?)이었다. 보라색은 붉은색과 푸른색이 자유분방하게 뒤섞이며 만들어낸 색깔이었다.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이것은 통일의 모습 아닌가! 붉은색과 푸른색이 온전히 하나가 된!”   오랜 옛날의 그 장면이 불쑥 떠오른 것은 아마도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오른쪽 왼쪽으로 갈라지고 쪼개지고 부서져, 사분오열 서로 원수가 되어 핏발 선 싸움박질에 여념 없는 위험한 현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양한 생각과 이념이 자연스럽게 부딪치고 어울리며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건강한 민주사회다. 내 생각만 옳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한 자는 적이요 원수라는 식의 아집은 독이다.   혹시라도 말이 잘 안 통해서 싸움이 일어나고 대립이 심각해질 때, 중재에 나서라고 존재하는 것이 정치다. 정치는 타협과 조정, 화합의 예술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정치가들이 앞장서서 국민 갈라치기를 선동하는 망국적 판국이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 편 아니면 모두 적이니 죽여없애야 한다. 이건 도무지 사람의 논리가 아니다. 정치는 격투기가 아니다.   오죽하면, 대중가수의 한마디 발언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지경이다. 자초지종을 간추리면 이렇다. 물론,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가수 나훈아가 자신의 은퇴공연에서 말했다. “그만두는 마당에 아무 소리 안 하려고 했는데… 왼쪽이 오른쪽을 보고 잘못했다고 생난리다. (왼쪽 팔을 가리키며) 니는 잘했나?”   더불어민주당은 당연히 발끈했고, 나훈아도 물러서지 않고 거친 말로 맞받아쳤다.     “나보고 뭐라고 하는 저것들, 자기 일이나 똑바로 하라. 어디 어른이 이야기하는데 XX들을 하고 있느냐. 안 그래도 작은 땅에 선거할 때 보면 한쪽은 벌겋고, 한쪽은 퍼렇고 미친 짓을 하고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진보 경향의 가수, 배우 등 연예인들이 ‘어른과 노인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로 비난하고 나섰다고 한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시시비비를 따지고 싶지 않다. 세상일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갈라칠 수 있는가? 부질없다. 그저 한 가지만 묻고 싶다. 보수와 진보는 원수지간이고, 좌와 우는 정말 그렇게 다른 적인가? 간절한 마음으로 옛 어른들의 가르침을 되새긴다. ‘대동소이(大同小異), 화이부동(和而不同)’   멀리 바다 건너에서 그런 참담한 장면을 바라보면서, 아이가 그린 태극기의 보라색 동그라미를 떠올리니 처량하고 서글프기 한이 없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동그라미 보라색 보라색 동그라미 한가운데 보라색 거침도 생각

2025-01-23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남겨진 바람이 되는 것이네

알프스의 숨겨진 보석 동쪽 계곡 돌레미티(Dolomiti)로 가는 길은 너에게로 가는 길과 닮아있네. 기억나지 않는 일을 기억하려는 시간 동안 나무는 숨 쉬지 않았고 들꽃은 개화를 멈추었네. 2.000 고지 높이의 산행은 숨이 차지 않았네. 보는 사람들과 누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난 왜 마음이 아파지는 걸까? 얼마나 더 걸어야 하나? 뒤돌아보지 않는 삶을 살 순 있을까? 오랜 시간 누리고 살지 못해 내게 또 미안하네. 하늘은 산등성이를 내려다보고 산에는 작고 앙증한 꽃 비올라, 꽃 한 송이 흐드러진 마음 보라색 꽃잎으로 펼쳐 보듬고 보라색 메아리, 비올라 꽃 한 송이.   산을 오르다 보면 산이 나를 데리고 가네. 푸른 가지 흔들며 오라 하네. 산에 잠깐 머무는 동안 발끝으로 수액이 흐르고 여러 장의 꽃잎이 피어나네. 하늘이 맞닿은 곳에 구름계단을 만들고 한참을 오르다 보면 덩그렇게 산봉우리와 구름과 나만 남았네. 맞은편 산등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나는 이곳에, 또 저곳에도 살고 있었네. 버려진 땅은 없었고 눈이 녹아 내리는 물가에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네. 소리가 사라져 버린 땅, 그림자 지나간 숨결과 걸음 흔들어 깨워도 기척이 없네. 누구는 집으로 가고, 누구는 집을 떠나고 있네.   산을 내려오면서 집으로부터의 나를 기억하지 못하네. 차창 밖으로 너를 보고 있네. 너는 산 정상을 향해 걷고 있네. 멀어지는 너를 돌아다보았네. 햇살 아래 사라져 버린 너는 눈 덮인 알프스로부터 내려온 보라색 메아리가 되었다. 나의 사랑이 죄가 된 날부터 산 속에 피어난 비올라 한 송이 안개처럼 내 속에 살아가고 있네.   독수리의 높은 창공을 날았네. 아래는 아찔했었네.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는 게 신기했네. 성당의 뾰족한 탑 위 십자가 고공 낙하를 시작했네. 양팔로 방향을 조절하고 오른발은 엑셀레이터, 왼발은 브레이크 도착한 곳은 알프스 산골 마을, 작은 돌멩이로 높지 않은 담장을 쌓고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알프스 작은 정원엔 들꽃이 피기도 하였네.   한때는 사랑에 목이 메었네. 밤낮 그의 이름에 토씨를 달고 그의 주변에 꽃씨를 뿌렸네. 그에게 나는 하루가 열리는 호흡이었다가 버린 후 어딘가에 남겨질 먼 발 등성이가 되기도 하였네. 나의 발끝부터 사라지는 꿈. 거의 몸의 절반이 보이지 않았네. 백포도주 한 잔을 비울 즈음 나는 사라졌네. 콘도라를 타고 구름 운하를 건너는데 신기하게도 우린 한 배를 타지 못했네.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내 곁에 없었네. 나는 그의 향기를 가져와 들꽃이 되었네. 베네치아의 새벽이 되었네.   하늘에 오래 남겨진 구름은 없네. 늑대가 양의 다리를 물었다가 두 마리의 악어가 되기도 하고 저무는 노을로 피어나기도 하였네. 누구나 그런 거라네. 처음 그 설렘으로 몇 년은 버티고 몇 년은 지워져 가는 것이네. 알프스 설산 눈물처럼 흘러내려 한 번도 손 잡지 못한, 막연히 따뜻했을 다른 하늘, 다른 풍경으로 마주 잡는 것이네. 백팔번의 천둥이 치고 셀 수 없는 별들이 저물어도 나는 그 앞에 그는 내 앞에 무엇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네. 출렁이는 물결 위에 내려놓은 시간, 그 시간이 여전히 나를 끌고 가고 있네. 베네치아에 남겨진 바람이 되는 것이네. (시인, 화가)     Kevin Rho 기자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바람 알프스 산골 보라색 메아리 마음 보라색

2024-04-22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사월의 시

이렇게 나이를 먹나 봅니다.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애틋해 보이는, 그래도 뒤돌아 가고 싶지 않은 지금이 좋은 건 왜인지 모르겠네요. 꽃샘추위로 싹들이 얼면 어쩌나. 괜히 쌓인 눈을 밀쳐냅니다. 작고 여린 것들에 눈길이 가는, 쓰러지고 밟히는 것들이 소중해지는 이렇게 나이를 먹나 봅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면 살포시 한쪽으로 기우는 갈대가 서러워 두 팔 벌려 서 있는 막무가내가 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나이가 되었구나 여겨집니다. 소리 없이 찾아드는 연둣빛 언덕에 반해 걸어도 걸어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저린 무릎으로 잠시 앉았다 눈에 뜨인 냉이 푸른 싹, 달래 뾰족 내민 잎에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기도 합니다. 낙엽을 들추다 만난 보라색 패랭이꽃, 색색 숨 쉬는 꽃숨, 꿍꿍 뛰는 나의 심장 소리, 등이 따신 햇살에 앉아 느껴보는 봄날 오후입니다. 이렇게 느릿 나이를 먹나 봅니다.     사월의 시       한 움큼의 말을 뿌렸다 한동안 잊혀진 말은   씨가 되어 싹을 내었고 땅은 얼굴을 바꾸었다   이야기가 되어 자라나고   그 자리마다 채워지는   바람의 소리며 모로 눕는 햇살의 따가움 그대들의 눈물들이며 손짓하는 자유가 되었다   슬픔은 꽃으로 피어나고   바람으로 다가온 외로움 절망의 손짓은   푸른 잎으로 돌아와 사월 하늘에 가득하다     사월은 푸르러도 먹먹히 아파 붉어지는 시간 걸음마다 길이 되어 오는   그대들의 말은   십자가로 세워지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사월은 한없이 숙연해져 고개 들 수 없는 미안함 그대들 안으로 들어가는 사월은 망각 중 이거나, 기억해 내는 거울 이거나 사월은 기뻐도 슬픈 계절   높이든 빈 잔에   빨갛게 담겨지는   사월의 숨결, . . 부활의 십자가         나뭇가지 사이로 확 시야로 들어오는 모양이 있어 놀랐습니다. 잔가지가 만들어낸 하트모양이었어요.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다음날 그곳에 가서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루 만에 그 형체를 어디에서도 찿을 수 없었습니다. 각도와 높이 때문인가 하여 눈길을 여러 곳으로 움직여 보았지만 찿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만나게 된 그게 뭐라고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의 마음을 도닥여 주었습니다. “그래 가지에 꽃잎이 피고, 점점 무성해지면 가지만으로 만들어지던 형체는 영영 사라지고 말 거야. 어쩌면 영영 찾을 수 없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잠깐이나마 눈에 담기고 가슴에 품었던 따뜻했던 소회가 소중한 기억으로 남겨지겠지.”     Easter Sunday를 하루 앞둔 토요일. 암 투병을 하는 B장로의 모습이 아련해 봄꽃을 화병에 담아 찿아갔습니다. 계단을 내려올 힘이 없어 이층으로 올라가 누워있는 그를 만났습니다. 손을 잡아 내 무릎 위에 끌어당겨 기도해 주었습니다. “손이 뽀송하네?“ 묻는 말에 ”손이 부었어.” 하며 웃던 그 모습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많이 말랐지만 봄꽃만큼 귀했습니다. 무슨 말로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나 사이의 깊은 손 잡음은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 삶을 마지막까지 인도하시는 그분의 손안에 있음을 알고 서로 안아주고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차창으로 길게 펼쳐지는 가로수마다 영글어가는 꽃망울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어디에 있어도 어느 곳을 걸어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눈이 녹고 겨우내 쌓였던 낙엽을 들추니 살아나는 생명, 푸른 싹들이 무성히 올라오고 있습니다. 나뭇가지 끝마다 뾰족한 잎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황홀한 봄의 생기, 생명의 부활이 목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슬퍼하지 말지니 그 슬픔으로 오히려 기뻐할지니 죽음의 계절을 참고 견디면 만물이 살아나는 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니….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심장 소리 보라색 패랭이꽃 나뭇가지 사이

2024-04-0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설레는 봄처럼

설레는 봄처럼    아름다워서는 안 되는 말이 있지 /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이야기할 때 / 열을 세고 난 후 말해야 하지 / 나는 나의 언어로, / 당신은 당신의 언어로 말해야겠지 / 입을 다무는 봄 // 구렁이 담 넘듯 계절이 오고 / 강물같이 시간은 지나쳐 가는데 / 시카고 겨울은 춥고 길기만 했지 / 봄인가 싶으면 다시 눈이 내리고 / 함께 없어도 함께일 수 있다는 말에 / 봄은 일찍부터 설레었지 / 눈처럼 쌓였던 침묵을 녹이고 /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다가오는 봄 / 아름다워서는 안 되는 말을 마구 쏟아내고 싶었지 / 함께 걸을 수 있다는 어처구니 / 입을 다무는 나무가지 마다/ 하얀 꽃망울을 품고 / 봄처럼 설레고 있지     지난 늦가을 한국방문에서 돌아온 후 심한 불면증으로 고생하였다. 생각에 생각이 끊이지 않아 잠들 수 없었다. 시카고에 도착한 후 거의 두 달 동안 깊은 잠을 잘 수 없어 낮시간에도 졸음이 몰려 와 사람을 만나고 운전하는 일조차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다. 입춘이 지난 지가 언제인데 몇차례 또 눈이 내렸고, 장마비처럼 며칠 동안 쉼 없이 비도 뿌렸다. 봄은 걸음을 재촉했지만 겨울은 호락호락 그 길을 내 주지 않았다.   뒤란의 꽃밭을 가꾼지 30년이 되어간다. 집을 지어 이사 온 후 그 다음 해부터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뒷쪽으로 펼쳐있는 무성한 잡목들을 정리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매년 봄이면 꽃나무를 심고 정원을 넓혀갔다. 봄이 오면 창가에 유난히 새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어서 일어나라는 얼람소리보다 듣기 좋은 새소리에 잠이 깨곤 하였다. 봄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쌀쌀한 새벽공기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몸의 세포들을 눈뜨게 했다. 겨우내 쌓여있던 낙엽들을 들추니 바늘 같이 뾰족히 올라오는 싹들이 보인다.   “어서 자라나거라.” 한겨울을 힘겨워했던 내 모습을 보는듯해서 측은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언제 다시 쏟아내릴 지 모를 눈을 피하라고 젖은 낙엽을 덮어주었다. 나무가지마다 움트는 꽃망울들이 아침햇살에 반짝인다. 싹이 트고, 입이 자라고, 꽃이 피어나는 모든 과정을 우리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상상해볼 수는 있다. 깜깜한 불면의 시간을 견디어낸 후 봄을 향해 일어서는 싹에게서 배운다. 누구의 관심도 사랑도 받지 못한 싹도 봄이면 제 생명을 키워 세상으로 얼굴을 보이거늘 우리는 봄의 설렘 앞에 무엇이더냐.   이른 봄부터 피어날 꽃 중에서도 제일 기다려지는 꽃이 있다. 볼품 없는 잎사귀들이 살아나면 긴 대궁이 올라오고 그 대궁에 작은 꽃망울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무더기의 보라색 꽃무덤을 이루면 그야말로 뒤란은 보라색으로 변하게 된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부터 한 달 남짓 그 꽃을 보려고 잠을 설친 적도 많았다. 그 사이 아이리스가 우아한 꽃을 학처럼 피어내고, 하얀 데이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노란 달맞이꽃, 향기로운 보라색 라벤다가 연이어 피어나는 뒤란은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저마다의 색깔을 뽐내며 꽃을 피운다.   누우면 잠드는 나였다. 신기한 겨울을 어떻게 견디어 냈냐고 물으면 “시간은 멈추지 않고 가더라” 그게 궁색한 답변이 될 수 있을려나? 이어폰을 끼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베개를 무릎 사이에 끼고 옆으로 몸을 누이고, 숫자를 세보기도 하였지만 허사였다. 잠들지 못해 엎치락 뒷치락 했던 밤이 아니라 설레는 봄을 맞이하려 일찍 잠들어야 했다. 잠들지 못했던 어떤 이유보다 더 큰 봄의 설렘은 초조함에서 관조의 힘으로 스스로 지어낸 울타리를 넘어 새처럼 자유로이 날아들 것이다. 불면의 밤은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지혜와 기쁨으로 설레는 봄을 맞이할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보라색 라벤다 보라색 꽃무덤 시카고 겨울

2023-03-20

[우리말 바루기] ‘카나리아색’

“카나리아색 좀 빌려줄래?” “카나리아색은 없는데. 대신 크롬노랑색을 빌려줄까?”   이처럼 ‘카나리아색’이나 ‘크롬노랑색’이란 얘기를 들으면 무슨 전문 용어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단어들은 색연필이나 물감, 크레파스, 색종이 등 어린이나 청소년이 많이 사용하는 문구류에 적혀 있는 색이름이다.   무슨 의미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색이름은 이뿐이 아니다. ‘대자색’ ‘상아색’ 등도 이름으로 색깔을 유추해내기 어렵다. 그래서 국가기술표준원은 문구류 산업표준(KS) 7종의 색이름을 보다 쉽게 바꾸어 공표했다.   ‘카나리아색’은 ‘레몬색’, ‘크롬노란색’은 ‘바나나색’, ‘대자색’은 ‘구리색’, ‘상아색’은 ‘연노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과 실제 색의 차이로 혼란을 유발하는 것도 포함됐다. ‘진보라’라고 하면 ‘진한 보라색’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진보라’는 연한 보라색을 지칭하고 있어 헷갈리기 십상이었다.  ‘진보라’를 ‘밝은 보라’로 바꿔 의미가 혼동되지 않고 의사소통이 원활해질 수 있도록 했다.   ‘진갈색’과 ‘진녹’도 마찬가지 이유로 ‘밝은 갈색’과 ‘흐린 초록’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 밖에 ‘연주황’은 ‘살구색’, ‘밝고 여린 풀색’은 ‘청포도색’, ‘녹색’은 ‘초록’, ‘흰색’은 ‘하양’, ‘개나리색’은 ‘진노랑’으로 바뀌었다.우리말 바루기 카나리아색 문구류 산업표준 진한 보라색 대신 크롬노랑색

2023-02-21

[삶의 뜨락에서] 사랑의 입자

 ‘정명숙 당신은 한 마리 보라색 나비’라는 캘리그래피와 왼쪽 상단에 화려한 보라색 나비가 그려져 있는 조그만 액자가 내 작업실 눈높이에 걸려있다. 지난 3월 코스타리카에 갔을 때 5일을 함께 보내고 마지막 날 밤에 식당에서 가이드가 즉흥적으로 그려준 특별한 선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 어떻게 그분은 그 많고 많은 색 중에 보라색을 또 그 많은 생명체 중에 나를 나비라고 표현했을까.     보라색 나비를 구글로 찾아보았다. 보라색은 귀족과 황실을 상징하며 사랑을 많이 받는 고귀한 색으로 인식되어 있고 직관력, 통찰력, 상상력, 자존심, 관용, 우아함, 품위, 화려함을 상징하며 신비스럽고 개성 있는 색이라고 나와 있다. 나비의 생물학적 특성으로는 변신, 상징적 의미로는 인연과 행복, 죽음과 영혼, 부활과 변신, 자기 개성화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분의 직관력과 순간적인 표현이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웠다. 참고로 남편은 ‘늘 푸르른 숲처럼 상쾌한 당신’이라는 글을 받았다.     살면 살수록 인간의 다양성에 경외감을 갖는다. 한때는 인간의 하드웨어인 신체적 특징에 놀란 적이 있다. 키(1~2m), 몸무게(30~500kg), 피부색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한 종(species)인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는 것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에 들어서는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의 소프트웨어인 정신적 삶이 너무나 다르고 인지적 세계가 특히나 다르다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다. 같은 시대, 거의 같은 생활환경과 조건에서도 우리는 모두 다르게 보고, 듣고 인식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지식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파이드로스(Phaidros)’에서 전생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이번 생이 결정된다고 한다. 전생에 진리를 많이 탐구한 영혼은 이번 생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미술가나 음악가로 살아간다. 전생을 좀 부족하게 살아낸 자는 이번 생에 왕족, 정치가 혹은 철학자가 된다. 새로움을 창작해 내는 미술가, 음악가의 삶을 가장 높은 단계라 여겼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같은 시대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감을 얻고 직관력과 창의력을 이용한 예술가들의 삶은 인정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토록 서로 다른 호모 사피엔스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일까. 때로는 점으로, 선으로, 면으로 혹은 공간으로 만나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하지만 이 세계도 결국 꼭 붙잡아 주는 응집력이 없으면 흩어지고 흘러가고 지나간다. 이 응집력이 바로 사랑의 입자가 아닐까. 사랑의 입자가 자장의 원리에 따라 끌고 당기고 밀어낸다. 그때 공명현상이 일어난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강력하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할 때 이 공명현상은 최고점에 이른다. 부부애, 자식애, 우정 등은 사랑의 입자가 가장 강하게 끌린 현상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사랑의 입자의 끌림에 의해 가까워지고 멀어지고를 반복한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리듬을 타고 우리 인간관계는 변화해간다. 그 공명의 순간들이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나의 삶에 등장했던 중요하고 귀한 사람들이다.     지금까지는 사랑의 입자 작용으로 끌리면서 공명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연현상이라고 믿어왔다. 이제는 이 자연현상을 우리가 조절할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이 조절과 변화를 위해서 한 마리 보라색 나비가 되어 경이롭고 아름다운 우주를 향해 날아가고 싶은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사랑 입자 보라색 나비 호모 사피엔스들 입자 작용

2022-06-24

[이 아침에]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

요즘 남가주 주택가나 거리에는 보라색 자카란다꽃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늦은 봄 은은한 향기와 자태를 뽐내는 자카란다는 멀리서 보면 비밀의 성처럼 신비한 모습을 연출한다. 미국에 와서 마주한 자카란다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인데다 이름도 어려워 외우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20여년을 보다 보니 이제 무심코 길을 지나다가 자카란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걸 보면 ‘아. 벌써 5월이구나’ 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봄이 끝나가나 싶어질 때쯤 주택가나 거리 골목 어귀에서 보라색 군락을 이루며 피어나는 자카란다는 왠지 우리나라의 철쭉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봄꽃은 남쪽의 매화나 샛노란 산수유부터 시작돼 북상하며 진달래 개나리가 만개하고 벚꽃이 화려한 대미를 장식하며 마무리된다. 여름이 시작되나 싶을 정도의 날씨가 되면 철쭉꽃이 뒤늦은 향연을 펼친다. 조금 높은 산의 산철쭉은 6월경 절정을 이루며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어렸을 때는 이른 봄 지천으로 피어 있는 진달래 꽃잎을 따먹고 놀기도 했던 터라 좀 늦은 봄에 피어나는 진달래와 비슷한 철쭉꽃을 따 먹었다가 배가 아파 고생한 적도 있다. 그래서 진달래꽃은 참꽃이라 불리지만 철쭉 꽃잎에는 독성이 있어 개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진달래나 개나리, 벚꽃같이 조금 일찍 피어나 울긋불긋한 아름다움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꽃들과 달리 뒤늦은 시기에 홀로 피어 묵묵히 빛을 발하는 철쭉은 파피꽃이나 유채꽃이 지고 나서 보라색 향연을 펼치는 자카란다와 겹친다. ‘봄꽃’의 화려한 영광은 다른 꽃들에 내어주고 사람들에게 잊혀 갈 때쯤 피어나 은은하고 지순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그런 점이 서로 닮았다.    사람들의 삶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이나 조직 사회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승승장구하며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이른 나이에 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빛나지도 않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오래도록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다하는 사람도 있다. 누가 더 성공한 삶을 살았는지는 가치 기준이 다르겠지만, 늦게까지 빛나지 않아도 자기 몫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들의 주위에 많은 이들이 따르는 걸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한인 이민사회의 교회나 조직에서도 화려한 영광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남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어느 조직이나 빠짐없이 등장하는 감투싸움이나 이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민사회의 부끄러운 모습과는 다르다. 말은 쉽지만, 사실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나의 노년의 삶을 그려본다. 화려한 영광도 없었던 젊은 시절의 삶이었지만 이제 늙어서라도 자카란다처럼 철쭉꽃처럼 은은하고 묵묵하게 빛을 발하는 그런 남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송훈 / 수필가이 아침에 진달래 개나리 진달래 꽃잎 보라색 향연

2022-05-19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