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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지 아니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

    세례요한은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습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요한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는 요한의 세례를 거부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누가복음 7장30절.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례요한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과 그로 인해서 구원자가 도래할 것, 회개해야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요한의 세례’를,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버리다’는 ‘아데테오(ἀθετέω)’로, ‘거부하다, 인정하지 않다’의 뜻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은 것이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이 구원의 계획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계획은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 믿지 않는 것은 구원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이 완성됨은 구약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待望)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하고,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교회와 성경과 가까이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내가 깨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깨어 있어야 상황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깨어 있어야 들려지고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또한 이들이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던 상황은 그들이 누리는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선생으로, 지도자로 추앙받는 그 위치가 마치 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명 그들의 위치는 권력이 아니라 말씀으로 섬기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권력으로 생각함으로 자신들을 드러내는 수단, 자신들을 나타내는 방식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말씀의 의미보다는 그 말씀을 빙자해서 말씀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고, 순결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성전에서 돈을 주고 받으면서 이익을 취하고, 불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며, 하나님께 예배 드려지는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 곳에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권력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잡히시고, 고난받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날에 외식도 하지 않고, TV, 인터넷도 금해야 하며, 즐거운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며, 얼굴을 어둡게 하고 다닙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행동이 또 다른 나의 의로움과 나의 존재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그러면서 나처럼 하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묵상입니다. 나의 나 됨은 권력도, 물질도, 명예도 아닙니다. 뭔가 의로워 보이는 행동도 아닙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 됨이 나의 수고가 될 때에는 하나님의 은’임을 잊어 버립니다. 나의 나 됨이 권력, 명예, 물질이라면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 것은 한순간 잠깐 잊어버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왜곡하고, 신앙도 왜곡된 신앙으로 살면서 그것이 옳은 것으로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바로 깨달아 아는 삶으로 주님의 은혜, 그리스도 예수를 바로 알고, 믿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바리새인 세례 율법 교사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2024-03-29

신약의 인물 탐구: 바리새인(Pharisee)

 복음서를 읽다 보면 ‘바리새인’이 자주 등장합니다. 주로 등장하는 경우가 부정적인 역할로 나옵니다.오늘은 ‘바리새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바리새파’의 사람입니다. 헬라어로 ‘바리새’는 히브리어의 ‘파라쉬’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 뜻은 ‘분리된 자’, ‘구별된 자’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의 포로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합니다. 그런데 헬레니즘 문화의 유입으로 인해서 신앙이 점점 세속화가 되어 갑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경건함으로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하시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 중에도 어떤 것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서 여러 분파로 나누어지는데, 그중에서 율법주의, 형식주의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과 전승을 중시하며, 사두개파와는 다르게 부활을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복음서 당시에 바리새파는 아주 큰 세력을 형성한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치우쳐서 율법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이 바리새인이 복음서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은 마태복음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태복음 3장7절.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 때에 바리새인들이 세례요한이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독사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바리새인들에게 하십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복음 12장34절. ‘독사의 자식’에서 ‘자식’은 ‘겐네마’로 ‘낳은 자, 자손’의 뜻입니다. 그래서 독사의 자식을 직역을 하면 태어날 때부터 뱀의 자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뱀은 ‘에키드나’로 ‘독이 있는 뱀’입니다. 독사는 독을 가지고 동물이나 사람을 물어서 죽게 만듭니다. 그래서 ‘독사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다른 사람의 신앙을 어지럽게 만드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잘못된 내용, 자신들의 주장으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내용으로 사람들의 지도자 자리에 있었습니다.         소위 성경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격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에서 아주 심각한 영향을 줍니다. 단순하게 성경이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잘못된 길로 걸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기적과 사역하심이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꾸며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살인의 계획까지 꾸밉니다. 자신들만 왜곡된 신앙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마저도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며, 그들의 왜곡된 신앙처럼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율법과 형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며 사는 자들, 장로들의 전통과 전승을 고수하면서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자주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핍박과 박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믿음이 ‘바리새인’과 같은 상태는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할 것은 다합니다. 지켜야 할 것은 다 지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는 인정받지 못한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목사인 저를 비롯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냉철하게 스스로의 믿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바리새인 신앙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구별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선이며, 악인 지도 판단하지 못합니다. 사탄이 꾸민 거짓된 일이 진리인 줄 알고 좇아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잘못된 길이 진리의 길이라고 말하며 안내합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성경을 읽는다고, 기도한다고 모두가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주신 말씀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잘 분별할 줄 아는 제대로 된 믿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바리새인 pharisee 바리새인 신앙 하나님 말씀 형식주의 율법주의

2022-04-01

[삶과 믿음] 종교개혁가 예수의 투쟁 (눅 14:1-6)

예수의 삶을 나눔, 가르침, 저항·투쟁, 영적인 삶, 선포, 보내심으로 이해할 수 있고, 지난 칼럼을 통해 나눔과 가르침을 다루었다. 이제 저항·투쟁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예수는 악, 불신앙, 마귀,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불의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다. 간혹 전통신학이 예수의 저항을 오로지 영적으로만 이해하거나, 혹은 일부 현대신학이 이를 비판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데, 예수의 저항과 투쟁은 인간이 직면하고 살아가는 총체적 문제들을 포함한다.     예수는 자유의 투사였다. 이사야서(61:1)를 인용하면서 자신이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렸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리라”(눅4:18). 가난과 포로됨, 눈멂과 눌림은 영적, 사회적, 정치적 억압을 의미하고 예수는 이들을 해방하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셨다. 또한 악한 영에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하셨고(눅8:26-39), 보기를 원하는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셨다(눅18:35-43). 바울은 죄로부터 해방을 중점적으로 증거했다면(롬3:23-25), 예수는 인간의 총체적인 한계와 얽매임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 싸우셨다.     자유와 해방을 위한 예수의 거룩한 투쟁은 ‘종교적’이기도 하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은 잘 알려진 사건이다(눅19:45).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눅19:46)라고 선포하면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막11:15). 거룩한 성전 안에서 행한 예수의 이 파격적인 행동은 예수의 혁명적 투쟁을 가장 잘 드러낸다. 어느 종교이든, 종교가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면 강도의 소굴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늘 있어왔던 일이며, 예수는 이런 종교적 타락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투쟁적으로 싸운 ‘종교개혁가’다.         폭력과 타락을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면 종교는 가장 무서운 족쇄가 된다. 지도자들이든 일반 신도이든 간에 서로를 부추겨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데 종교를 악용한다면 제 스스로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데, 예수께서는 민중들의 무지함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던 반면에 지도자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싸우셨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한 바리새인 지도자(우두머리)의 집에 들어가셨다(눅14:1). 바리새인들은 상하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우두머리’라고 표현한 대목이 특이하다. 종교적 위선에 빠진 자들의 가장 촉망받는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을 책망하는 예수의 과감한 행동이 이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예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셨다(눅14:3). 그들이 잠잠하자 다시,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도 곧 끌어내지 않겠는가!”고 하셨고, 그들은 또다시 침묵에 빠졌다(눅14:5-6). 결국 ‘계명의 틀’에 갇힌 자들에게 생명이 계명보다 더 우선한다는 종교의 본질을 가르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면서(눅6:5) 안식일을 소중히 여기셨다. 그러나 안식일에 어떤 행동까지 허용되는가를 놓고 오랜 논쟁을 거듭해온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외형에 갇힌 노예라는 것을 ‘침묵’으로 드러냈고, 예수께서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의 본성’에 빗대어 안식일의 거룩한 본질, 즉 ‘인간의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투쟁하셨다. ‘강도의 소굴’ ‘침묵의 노예’ 된 종교를 생명의 사랑으로 해방하는 종교개혁가 예수의 투쟁과 싸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차재승 / 뉴브런스윅 신학대학원 교수삶과 믿음 종교개혁가 예수 종교개혁가 예수 혁명적 투쟁 바리새인 지도자

202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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