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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난장] 노희경의 “모두 행복하세요” 왜 통했나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tvN)가 “과연 노희경”이란 격찬 속에 막을 내렸다. 7.3%(닐슨코리아 조사 결과)로 시작한 시청률도 마지막 회에 14.6%까지 올랐다. 올 tvN 주말 드라마 최고 수치다. 하지만 예술성 측면에서 퇴행이라고 보는 의견도 만만찮다. 계몽적·교훈적 요소를 내세워 시청자를 가르치려 한다는 문제 제기다.   옴니버스식으로 진행된 ‘우리들의 블루스’는 에피소드마다 주인공을 바꿔가며 갖가지 갈등 상황을 보여주고, 그 모든 상황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었다. 가족 부양의 무거운 짐을 진 채 청춘을 보내버린 두 중년을 “잘 자라줘서 고맙다”며 위로하고, 우울증으로 이혼당한 뒤 아들 양육권까지 잃은 첫사랑은 “답답하면 뒤를 봐, 이렇게 등만 돌리면 다른 세상이 있잖아”라고 다독인다. 상처받은 우정은 “이 세상에서 너 하나만은 만만하게 생각하면 안 되냐”는 고백에 회복되고, 장애인 언니를 둔 ‘억울함’은 “힘들었겠다, 네가 고생이 많았어”라며 이해받는다. 10대 고등학생의 임신 문제도 가족과 학교, 지역 사회의 지지와 축복으로 이어졌다.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못 박았던 작가는 이렇게 선명한 ‘행복 행진곡’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마지막 장면에 이런 자막까지 적어 넣는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명 하나. 우리는 이 땅에 괴롭기 위해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모두 행복하세요!”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작가의 목소리가 날것 그대로 노출된 작품”이라며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 나올 법한 메시지에 시청자들이 눈물 흘리며 호응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수용자 개개인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최근의 문화수용 양상에서 벗어난, 매우 이례적인 반응이란 것이다.   왜일까. 심리 전문가들의 분석은 대략 이렇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 불안정한 사회다.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 거짓말이 돼버렸다. 입시 경쟁, 취업 경쟁의 악다구니 속에서 이긴다 한들 집 한 칸 마련이 요원하다. 긴장감과 피로감에 지쳤다. 미래가 안 보이는 데서 오는 무기력감이 드라마의 선하고 따뜻한 결말을 보며 풀린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일종의 대리만족”으로 해석했고, 윤대현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아무도 믿지 않지만 너무나 믿고 싶은 얘기를 해주는 순간 느끼는 힐링 효과”를 꼽았다.   이는 영화관 내 팝콘 취식이 허용되자마자 가뿐히 천만 관객을 넘긴 ‘범죄도시2’ 열풍과도 맥이 같다. 악인의 속 시끄러운 서사 따위는 필요 없다. 대중이 원하는 건 통쾌한 권선징악이다. 정의의 형사 마석도(마동석)의 압도적 주먹이 주는 카타르시스에 취할 뿐이다.   사회 현안에 대한 해법을 암시한 것도 ‘우리들의 블루스’의 특징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옥동(김혜자)과 동석(이병헌) 모자의 화해 장면은 세대 갈등의 해결 방안에 대한 모범 답안이자 희망 사항이다. 아들 동석의 입장에서 옥동은 잘못이 많은 엄마다. 옥동은 남편과 딸을 바다에서 잃은 뒤 동석 친구 아버지의 첩이 된다. 동석은 엄마가 친구 아버지와 한방에서 “이불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고. 본처 아들들의 폭력까지 감내해야 했다. 아들에게 미안해 고개도 못 들어야 할 것 같은 상황인데도 옥동은 시종일관 동석에게 차갑고 당당했다. 이들의 화해를 위해선 깜짝 놀랄 반전 사연이 있을 거란 전망이 많았다. 혹자는 그 친구 아버지가 실은 동석의 친부일 것이라는 출생의 비밀까지 제기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평생 한글조차 익히지 못한 옥동의 불우한 삶을 동석이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금 2030세대에게 ‘꼰대’ 취급을 받는 86세대에게도 이해 안 되는 ‘레드 콤플렉스’ 부모 세대가 있었다. 삶의 뿌리가 달라 가치관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들이 다른 세대 눈높이에 맞춰 대오각성, 미안하다 사과하는 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동석의 내레이션 “미안하단 말도 없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서야 알았다. 난 평생 어머니를 미워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어했단 걸”에서 드러나듯, 그저 그 시대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일 것이다.   순진하면 어떤가, 유치하면 어떤가. 해피엔딩 모범 답안에 기대 희망을 읽고 싶다. 이게 대중의 솔직한 속내일지 모른다. 창작자로선 이유 있는 퇴행, 어쩌면 영리한 퇴행이다.  이지영 / 한국 문화팀장문화난장 노희경 행복 행복 행진곡 노희경 작가 드라마 제작발표회

2022-06-24

[문화난장] 경주서 온 미남불, 어디가 제자리일까

25일 경주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 20여명이 대통령실이 있는 서울 용산을 찾아갔다. 청와대 경내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을 경주로 반환해달라는 청원서를 들고서다. 인솔자 격인 경주문화재제자리찾기 시민운동본부 김윤근 대표는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불법 반출된 이 불상이 오늘날 청와대 경내에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며 “환지본처(還至本處)야말로 정의와 상식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약속에도 일치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반환을 요구하는 불상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77호로, 공식 명칭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다. 청와대 관람객에게 나눠주는 탐방 지도엔 ‘미남불’로 표시돼 있다.   9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미남불은 일제 강점기 주권 강탈의 고초를 톡톡히 겪었다. 본래 자리는 경주 도지동 이거사 터로 추정되지만, 미남불이 이곳을 떠난 게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선총독부 조사서(1939) 등에 따르면, 1912년 11월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경주를 방문했을 때 이미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였던 일본인 고다이라 료조 집에 있었다. 어느 시점엔가 불상이 무단 방출돼 개인 집 정원 장식물이 돼 있었던 것이다.   조사서엔 데라우치 총독이 그 석불을 ‘숙시(熟視)’했다고 기록돼 있다. 눈여겨 자세히 봤다는 것이다. 총독이 미남불을 마음에 들어한다고 해석한 고다이라 료조는 이듬해인 1913년 서울 남산 총독관저(왜성대)로 불상을 보낸다. 총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로 상납한 셈이다. 이후 1939년 총독 관저가 현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불상도 함께 옮겨졌다.   미남불이란 별칭은 석굴암 본존불을 닮은 잘생긴 외모 덕에 붙여졌다. 1934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관련 기사에서도 ‘미남석불’로 소개됐다.   미남불은 청와대 경내에 있는 유일한 국가지정문화재지만, 문화재적 가치보다는 해프닝 거리로 여러 차례 화제가 됐다.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에서 이 불상을 치워버렸다, 훼손했다 등의 유언비어가 돌았던 게 대표적인 사례다. 김영삼 정부에선 1994년과 1996년 두 차례, 출입기자단과 조계종 대표들에게 불상을 공개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왜 특정 종교 상징물이 청와대에 있냐며 타 종교에서 문제 제기를 한 적도 있다. 청와대 개방 이틀째인 지난 11일에도 한 50대 여성이 “난 하나님 아들”이라고 외치며 미남불 앞에 놓인 불전함을 부수고 난동을 부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경주 시민단체들이 불상 경주 반환을 펼치기 시작한 건 2017년부터다. 2019년엔 경주시·경주시의회와 공동으로 청와대·국회·문체부·행안부·문화재청 등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들은 새 정부 출범과 청와대 개방을 계기로 반환 운동을 재개했다. 이번 청원서 전달에는 경주문화원과 경주예총, 경주상공회의소, 경주문인협회, 경주YMCA 등 24개 단체가 동참했다.   미남불에 대한 불교계의 입장은 경주 현지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조계종 임융창 홍보팀장은 25일 “청와대 석조여래좌상의 원자리를 명확히 파악하기 전까지 성급하게 이전하기 보다는 현자리에서 신앙심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불교문화재연구소장 제정 스님은 반환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대해 “지역 이기주의”라고 못박았다. “그런 논리라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유물들을 모두 부여·김해 등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이냐”면서다.   청와대가 개방되기 전까지 미남불은 실물을 본 사람이 거의 없는 베일 속 문화재였다. 경주문화재제자리찾기 시민운동본부의 박임관 운영위원장도 25일 청와대를 관람하며 미남불을 처음 봤다. 박 운영위원장은 “미남불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자비로운 모습이더라”며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데 갖다뒀다는 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미남불은 청와대 관저 뒤쪽 산책로에 자리잡고 있다. 사저 옆 연못을 지나 가파른 계단 길로 10분 정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미남불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니 남산 서울타워를 중심으로 서울 도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방의 감격과 동족상잔의 아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궈낸 서울의 다이나믹한 발전사를 묵묵히 지켜봤을 미남불의 타향살이 100여 년. 이 역시 역사의 한 자락일까, 아니면 청산해야 할 일제 잔재이자 적패일까. 경주 시민과 불교계뿐 아니라 역사·문화계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숙고를 시작할 일이다. 이지영 / 한국 문화팀장문화난장 미남불 경주 당시 경주금융조합 경주 지역 경주 도지동

2022-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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