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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마음의 거스러미

발톱 옆에 거스러미가 생겼다. 스치기만 해도 따가워 신경이 쓰인다. 살짝 당겨보니 확 아린 것이 자칫하면 죽 찢어지게 생겼다. 일단은 그냥 두어 보기로 하지만 종일 거슬린다. 거슬려서 거스러미인가. 손톱깎이로 잘랐다. 그런데 며칠 만에 그곳에서 자른 부분이 자라나 또 아프다. 이번에는 손톱으로 뜯어 결국 피가 나고 말았다. 조금 살살 다룰걸. 딴생각을 하다 발등을 계산대 모서리에 콩 부딪쳤다. 외마디를 내지르고 깽깽이를 뛰면서 순간의 통증을 이겨냈지만 한참 뒤에 내려다본 발등의 색이 퍼렇게 변했다. 그제야 욱신대는 것 같기도 하고 뼈에 실금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걱정되어 괜히 절룩이며 조심했다. 별거 아니라고 여겼던 생채기와 멍울도 인지한 순간부터 거치적거리고 신경 쓰이고 아프다. 슬며시 궁금증이 들어선다. 그간 몰랐던 마음의 티끌을 우연히 발견했다.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영 부담스럽게 알아 버렸다. 과연 우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멍과 거스러미는 어떻게 어루만지고 있을까.   우리 가게에 자주 오는 루시는 유나이티드 항공사에서 25년을 재직하고 62살에 은퇴했다. 아직은 젊고 힘이 넘친다. 일주일에 3일 운동하고 가끔 복지회관에서 봉사 활동하고 94살 친정어머니 집에 들러서 이야기하고 일주일에 두 번 차이나타운에 있는 한의사에게 체중조절 침을 맞는다. 입으로는 바쁘다고 하지만 너무 일찍 퇴직한 걸 후회한다. 일할 때는 상사의 잔소리도 귀에 거슬리고 동료와도 사이가 서먹하고 출퇴근도 번거로웠지만 퇴직하고 보니 귀찮게 여겼던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시간이 많으니 사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많아졌다. 유나이티드 항공사에서는 25년 이상 근속하면 세계 어느 곳이든 비행기가 무료다. 1주일씩 현지 관광 경비도 많이 들고 호텔비 하며 씀씀이가 커져 퇴직금을 야금야금 꺼내 쓰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루시가 가게에 오면서 색다른 이야기, 내가 모르는 미국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나 경험, 유머 같은 것을 좋아했다. 가게 앞에 몇 시간씩 앉아 좀도둑도 지켜주고 나도 일하면서 심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루시가 가게에 와서 간섭하고 내 시간을 빼앗는 느낌이 들면서 거슬렸다.   동네 소식이 빠른 루시가 가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큰 교회에서 벼룩시장이 열린다고 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쓰지 않는 물건을 팔겠다고 했다. 하루 자리 사용료가 30달러. 미국 사람들은 이사를 하면서 거라지 세일을 한다. 그 사람들이 살면서 요긴하게 썼지만 더 이상 필요치 않아 세일을 한다. 가끔 좋은 것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행운도 있지만 요상한 물건을 누가 살까 하는 의구심도 많다. 오늘 첫날인데 80달러를 팔았다고 좋아한다. 무엇을 팔았냐고 물었더니 어렸을 때부터 모은 동물 인형이다. 이제는 방구석에 쌓아놓은 인형들이 거슬려 치워버렸더니 속이 시원하다고 털어놓는다. 다음 주는 우리 가게에 찾아가지 않은 옷들을 주겠다고 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옷들은 언젠가 찾으러 오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쓸 만한 옷들이 제법 많다. 테이블에 펼쳐놓고 접어서 옆에 놓고 줄을 만들어 걸어 놓으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사갈 것 같다. 눈에 띌 때마다 정리해야지 외치며 마음속으로 무척 거슬렸는데 빈자리를 쳐다보니 막혔던 파이프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이제는 루시와 조금 거리를 두었다. 한결 편해진 나의 마음을 지킴과 동시에 오히려 가끔 듣는 루시의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에 거스러미도 생긴 이유가 있지 않을까. 건조하다든지 거칠게 다루었다든지. 타인의 문제점에는 명확한 훈수를 두고 자처해 상담해 주기도 하면서 왜 내 마음에만 가혹한지. 발톱 옆에 거스러미도 슬금슬금 달래 뜯을 걸 혼자만의 괭이질이 너무 힘들거나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거스러미 마음 유나이티드 항공사 우리 가게 계산대 모서리

2024-08-05

[글마당] 그 날처럼 눈은 내리고

눈은 내리고   창끝 모서리에서 그냥 녹아 얼음이고   가는 눈발 솔잎 사이로 울면서 섞이니     바람마저도 하소연 없이 떠는구나       그때 그 날도 몹시 바람이 불었지   방향을 잃은 감각처럼 울안을 휘돌다가 내 영혼 훑고     그림자도 쓸고 간 그 바람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에 두고     햇볕을 밟았을 뿐인데 내 발자국 차가운 유리 속에 있어     돌멩이도 미끄러워 여윈 솔바람 비껴간다       외롭게 닫힌 문은 여적 하나     날카롭게 쪼개지던 얼음 조각들 살 속 파고들 때     젊은 외길 몹시도 재촉이더니     이젠 섣달의 내리막길에 선 옛 같은 오늘이   닫힌 내 맘 창 앞에 서게 하네         가슴 휜 달조차 울음 비우고 낙엽 누운 빈 뜨락에     냉기 쏟아부어 온기 찾는 이 새벽     그대가 놓고 간 줄이 짧아서 생각이 긴 것일까     생각이 길어 가파른 고갯길이던가     모든 길은 돌아오기 위해 있는 길이라는데     그 길은 아니어서     지워지지 않는 그대의 눈 덮인 마지막 길     녹아내리질 않아 나 외로움 달고 가는 길       이젠 보채지 않으려 온기 안고 느긋한 찻잔을 기울이는데   기우는 해가 산그늘을 넘어서고 있으니     뜨는 해는 얼마일까 돌아보는 아쉬움이 한 번 더 감기는     그 날처럼 눈이 내리네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얼음 조각들 창끝 모서리 눈발 솔잎

2024-01-26

[이 아침에] 쓸개 없는 우리 부부

 남편과 나는 쓸개 없는 사람이다. 불과 몇 년 차이를 두고 그리 됐다. 남편은 폐 CT를 찍다가 쓸개에 물혹이 발견돼 제거했고 나는 돌이 있어 떼어냈다.     5년 전 한국에서 수술을 했다. 이른 새벽 긴 병원 복도를 걸어갔다. 보호자와 같이 온 사람은 신고 있던 신발을 건네주고 소독된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나는 신발을 받아 줄 사람이 없어 침대 끝에 매어 두었다. 새벽 공기가 서늘했다. 벗어 놓은 신발을 다시 신지 못하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에 순간 슬픔이 몰려왔다.   한잠 자고 일어나니 수술은 끝나 있었다. 배에 생긴 네 개의 구멍에는 거즈가 붙어 있었다. 의사가 건네준 플라스틱 병에 콩알 만한 돌이 다섯 개나 들어 있었다.     돌을 보며 생각했다. 도를 닦아 경지에 이른 스님의 몸에서는 사리가 나온다는데 나는 어찌하여 쓸데없는 돌멩이만 지니고 살았는가. 그동안 화를 너무 많이 내고 살아 돌멩이로 만들어졌을까. 쓸개 빠진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중학교 시절 맹장을 떼어냈다. 몸에서 다른 장기를 떼어낸 것이 두 번째인 셈이다. 맹장 없이도 지금까지 불편함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러니 쓸개가 없어도 별일 없을 것이다.     다음엔 또 어떤 장기에 문제가 생길까. 늙는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일까. 젊은 시절 세상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산다는 것은 상처를 하나씩 더해 가는 것인가 생각한 적이 있다. 지나고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있던 것이 없어지기도 하고 불필요한 것이 혹처럼 붙기도 한다.     쓸개도 없는데 왜 이렇게 사는 일이 어려운지 모르겠다. 화를 삭이고 잘 다스려야 할 나이에 여전히 작은 일에 화를 낸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면 작은 일에 화를 낸 자신 때문에 또 화가 난다.     오늘도 작은 일에 화를 냈다. 어찌 보면 중요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일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받는 약인데 준비해 놓지 않아 약국을 다시 가야했고, 전화로 주문한 음식은 내가 찾으러 갈 때까지 잊고 있어 오래 기다렸다. 의자 모서리에 정강이를 부딪혀 피를 보기도 했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화가 났다.     남편은 쓸개를 떼어낸 때문인지 갱년기가 온 탓인지 요즈음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젊을 때는 강하고 거침없던 사람이 TV에 나오는 잔혹한 장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쓸개의 다른 이름인 담낭에서 ‘담대하다’라는 말이 나왔다더니 담낭이 없어지며 담대함도 사라졌나 보다. 점점 자잘한 존재가 되어간다.     쓸개 없는 인간 둘이 한 집에 산다고 늘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소리 높여 다투지는 않는다. 서로 의견이 달라지면 남편은 슬며시 자리를 피하고 나는 입을 다문다.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어도 사는 모습은 마찬가지다.   쓸개 빠진 인간이 되었으니 실실 웃으며 살고 싶은데 쉽지 않다. 쓸개 없는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을까. 갈등할 필요 없이 웃기만 하면 될 터인데 그게 어렵다. 쓸개를 떼어냈으니 화도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쓸개 부부 우리 부부 새벽 공기 의자 모서리

2021-12-19

[이 아침에] 삶의 모서리를 돌아갈 때…

아파트 9층에서 뛰어내렸는데 자동차 위에 떨어져 살았다는 뉴스가 TV를 장식했다. 그 상황을 손님이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우리 가게에서 3~4블록 떨어진 저널스퀘어 9층 아파트에서 길가에 주차된 BMW 차량에 떨어졌다. 차는 유리창이 부서지고 완전 박살 났다.     떨어진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일어났고 팔 하나가 부러졌다. 죽고 싶다고 외친다. 젊은 백인 청년이다. 나이도 젊고 적어도 영어는 잘할 것이고 좋은 아파트에 살면 보통 사람보다 여건이 좋은데 왜 죽고 싶었을까? 청년 속마음은 모르지만 사는 재미와 의미를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후에는 흑인 할아버지가 왔다. 낮인데도 술 냄새가 났다. 몸무게가 줄어 양복 수선을 부탁하러 온 것이다. 왜 바지가 헐렁하냐고 물었다. 지난해에 아내와 여동생을 코로나19로 잃었고 하나 남은 남동생이 또 병원에서 숨졌다는 것이다.     숨이 헉 막혔다. 내일모레가 장례식인데 양복이 맞지 않았다. 그 양복은 동생이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란다. 입어보니 지금 유행하는 옷이 아니다. 펑펑했다. 그것을 줄이면 어떠냐고 묻기에 그냥 그대로 입고 허리만 줄이자고 했다. 혹시라도 동생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못 알아보면 실망할 것 같다고 했더니 수긍했다.     그리고 울먹이며 어깨를 보여준다. 어깨에는 ‘조부(祖父)’라고 하나뿐인 손녀딸을 위해 타투를 했다. 손녀 8살 생일날 100달러를 선물로 주었더니 하나에서 백까지 손가락을 꼽으며 세더니 너무 많은 돈이라며 돌려주려고 했다면서 눈물 방울을 보인다. 일본계 손녀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다.   인생이 급하게 커브 길에 접어들면 생활의 몸체나 마음의 몸체 따위가 일상 바깥쪽으로 훌쩍 기울어 버린다. 그러면 정신을 평소처럼 가누기가 어렵다. 경황이 없으면 마음도 마음인데 시야가 너무 흔들린다. 눈에 뵈는 게 없으면 요즘 말로 멘탈이 붕괴되기 쉽다. 그로 인해 괴로움을 호소하는 이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다고 해도 차 안에 있는 한 차체의 흔들림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듯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산다고 해도 이 생 안에 있는 한 생의 격변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유능한 운전사라도 미동 없이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의 운전사도 마찬가지다. 차가 커브 길에 접어들 때 차창에 얼굴을 부딪히지 않으려면 차가 나아가는 방향 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한다.     인생의 커브 길에 접어들 때 우리가 인생의 모서리에 몸이나 마음을 부딪히지 않으려면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심신을 기울여야 한다. 예기치 못한 진로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는 일단 어딘가에 닿을 때까지 그 방향으로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것이 이 생 안에서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최대치의 처세술 아닐까.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싶다면 생이 직선 도로에 진입했을 때 유턴할 수 있는 곳을 찾으면 된다. 흑인 할아버지처럼 희미한 그림자를 잡고도 살아갈 의지를  찾아야 한다. 죽을 것 같지만 죽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를 슬그머니 들어 올려 새로운 목적지를 발견하고 반듯한 아스팔트 길을 닦아야 한다.  양주희 / 수필가이 아침에 모서리 청년 속마음 양복 수선 아파트 9층

202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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