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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충정공’ 민영환을 생각한다

광복절 아침이다. 책을 편다.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부처 최후의 말씀을 읽는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명제는 만고의 진리다. 그런데 ‘정진하라’는 말씀 앞에서는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다.    이 아침, 부처님 말씀과 함께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삶을 되짚어 본다. 광복,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날이다. 언제 나라를 빼앗겼는가. 을사년인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대한제국을 압박하고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을사늑약이다. 일본은 우리의 국권을 빼앗아 갔고, 어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오호, 통제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수많은 애국지사가 이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민영환이 자결했다.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등 사대부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했다.    후일, 그가 자결한 방에서 대나무 네 줄기가 자라났다. 사람들은 포은 정몽주의 선죽(善竹)에 빗대어 이를 ‘혈죽’(血竹)‘이라 불렀다. 놀라운 것은 대나무 잎의 개수가 45개로 순국 당시 민영환의 나이와 일치했다. 이 소식이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전해지자 이를 보려는 인파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사대부들은 죽음으로 항거한 민영환의 충절을 기렸다.   그런데 세월을 거슬러 그로부터 10년 전으로 올라가 보면 민영환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 앞에 등장한다. 1895년 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이 갑오농민운동을 일으켰다. ’관리들의 탐학‘을 거사 이유로 들었다. 그는 민영준· 민영환· 고영근을 ’탐관오리 3인방‘으로 꼽았다. 충정공의 이름이 들어있다. 매천 황현(1855~1910)선생은 “민씨 일파는 한결같이 탐욕스러워…중앙 관리는 물론 지방의 수령까지 차지했다”고 ’매천야록‘에서 민씨의 권력 독점과 탐학을 비판했다. 이상하지 않는가. 전봉준에게 ’탐관오리의 대표‘로 낙인 찍힌 분이 불과 10년 만에 망국의 책임을 지고 자결 순국했다니.      필자는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부처의 말씀을 다시 떠올린다. 민영환은 고종과 사촌 사이였다. 열여덟 살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초고속 승진한다. 스물한 살이던 1881년 당상관에 발탁됐고, 스물두 살에 도승지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에 이어 유럽 6개국 특사 자격으로 방문했다. 지구를 두 바퀴나 돌고 돌아왔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조선도 개혁하지 않고는 나라가 유지될 수 없다고 설파했다. ’매천야록‘은 “구라파와 미국을 둘러보고 천하대세를 연구하고 국사를 걱정한 민영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독립신문도 “민영환이 새사람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광복 79주년이다. 요즈음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심상치 않다.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진정한 광복을 얻었는가. 부처님 말씀과 함께 국권을 찬탈한 일본에 죽음으로 맞선 충정공의 삶을 되새긴다. 탐관오리에서 애국지사로 변모한 그의 족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찬열 / 시인열린 광장 충정공 민영환 충정공 민영환 충정공의 이름 맞선 충정공의

2024-08-19

[김형석의 100년 산책] 악한 권력에 맞선 선한 개인의 역사

태평양전쟁 법정에 선 일본 교수 일본 군국주의가 낳은 죄악 증언   테러 위협에서도 성경 놓지 않아 암흑의 역사에서도 진리는 빛나   히틀러·스탈린 등 독재자의 만행 러시아·중국·북한은 지금 어떤가   제2차 세계대전 주동자의 한 사람인 일본의 도조 히데키 수상의 처형 기록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 때는 일본 육군을 대표하는 도조 수상의 정치 행적을 직접 보았다. 일본 해군은 태평양전쟁을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장교들이 사관학교 시절에 영·미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들의 전력과 실상을 관찰했기 때문에 전쟁에 승산이 없음을 짐작했던 것 같다. 다수의 일본 지성인들,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휴머니즘에 동조하는 국민의 반전론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천황의 권위를 애국심으로 가장해 태평양전쟁을 감행했다.   패전 후에 도조 수상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자로 판결받고 사형집행을 대기하는 처지가 되었다. 1948년 12월 23일, 이른 아침, 사형집행관이 스가모형무소 감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도조는 예감했었는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속죄의 염불을 하고 있었다. 형리의 안내를 받아 형장으로 가면서도 염불을 드렸다. 밧줄이 목에 걸리고 의식을 잃을 때까지 속죄의 염불을 계속했다는 기록이다. 그가 64세 때였다.   트로츠키 암살한 스탈린의 최후(제목)   일본과 동맹국인 독일의 히틀러는 러시아군의 접근을 보고받고 자기 시신을 완전히 불태워 적군에 한 점도 넘기거나 남기지 말라고 지시했다. 1945년 4월 30일 56세로 생애를 끝냈다. 또 같은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같은 해 4월 28일 총살당했다.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기 직전의 사건들이다.   역사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미 공산국가가 되어 있었다. 레닌의 주도 아래 공산혁명정부가 출범했다. 레닌이 신병으로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자, 공산당 서기장인 스탈린이 그 뒤를 계승하였다. 스탈린은 레닌의 후계자로 지목받던 트로츠키 세력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레닌의 지시와 하명을 가장하고 트로츠키 측근들을 축출했다.   위기감을 느낀 트로츠키는 터키로 망명했다. 그러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어 멕시코로 망명처를 옮기고, 멕시코 정부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스탈린 비밀경찰의 마수는 피할 수 없었다. 트로츠키 거처의 외부인 출입은 허락받은 사람에만 제한되었다. 마치 딸처럼 사랑받았던 트로츠키의 여비서만이 출퇴근할 수 있었다. 그 여비서와 친분을 맺은 남자가 여비서와 사랑을 가장한 약혼자가 되었다. 여비서가 트로츠키에게 약혼자를 소개하겠다며 면담 허락을 받았다. 남자가 출입검사를 받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미리 집안에서 보아 두었던, 장작을 패기 위해 놓여있던 손도끼를 사용해 트로츠키를 살해하고 집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트로츠키는 암살되고 스탈린은 역사에 보기 드문 독재정권을 휘두르게 된다. 히틀러 못지않은 권력으로 공산정권의 본성을 발휘하기에 이른다. 폴란드에서는 지식인 2만 명을 카틴숲에서 학살하고도 히틀러 나치의 소행이라고 허위 선전한 일도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스탈린의 행위였음이 입증되었다. 유고의 티토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는 소련의 혁명완수까지 500만 명을 희생시켰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 스탈린이 말년에 6·25 한국전쟁을 감행하는 죄악을 범했다. 이후 1953년 3월 각종 정치적 모략과 독살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독재적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런 비극적 사회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스탈린의 뒤를 계승하는 러시아의 푸틴은 제2의 한국전쟁과 흡사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켰다. 레닌의 후계자로 자처했던 중국의 마오쩌둥은 수많은 실정을 거듭하며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또 시진핑은 자국 내 홍콩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했을 뿐 아니라 대만을 공산국가로 점령하려는 야망을 선언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레닌, 스탈린의 뒤를 따라 한반도의 완전적화를 시도했다. 지금은 그 독재폭력이 김씨 왕국으로 굳혀가고 있다. 김정은은 정권유지를 위해 친형인 김정남을 암살했고, 김정남의 아들은 세계 어디에선가 은신하고 있다. 지금도 기회와 여건만 채워지면 대한민국 적화통일을 의도하고 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자. 일본이 태평양 전쟁 후 열린 국제재판 무대에 도조 수상이 섰을 때다. 그 법정에 전범들과 군국주의 일본의 죄악상을 입증한 두 증인이 있었다. 일본 밖에서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은 중국 청나라 왕실 마지막 후예인 푸이 왕이었다. 그리고 일본 국내에서 증인으로 법정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라는 도쿄대 정치학 교수였다.   순교를 각오한 기독교 지도자(제목) 야나이하라는 무교회 성서주의 기독교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반전 평화주의를 신봉하는 크리스천이다. 그 사상 때문에 국립대 교수직에서 추방되었다, 경시청의 감시는 물론 극우세력의 테러 위험에도 노출됐다. 반정부 지도자로 구속 수감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성서공부와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에는 순교를 각오하고 제자들에게 다음 일요일에 내가 동석하지 못하면 일본의 장래와 자유를 위해 법정에 서거나 여러분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다.   야나이하라는 다행히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과 종전이 선포되면서 절박했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도쿄대에 복직되었고, 교수회의에서 추대하는 총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정치학 외에도 여러 권의 기독교 관련 저서를 남겼다. 나도 그의 책을 통해 기독교 이해의 도움을 받았다. 역사의 암흑기 속에서도 진리의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권력 맞선 태평양전쟁 법정 기독교계 지도자들 트로츠키 측근들

2022-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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