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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바다 사자들의 독백

우리는 시 라이언이라 불리는 물개입니다.   본래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인간 관리인에게 우리를 잘 보호하도록 임시로 위탁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도 너무하는 관리인의 폭력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창조주 하느님께 고발하려고 합니다.   우리 동료 중의 하나가 처참히 맞아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글서글한 눈망울과 수염 난 주둥이가 피투성이 되도록 우리 물개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거든요. 왜, 무참히 살해 당했는지 우리는 영문을 모릅니다. 들리는 말로는 우리가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 관리인 어부의 밥숟갈을 빼앗는다고 분풀이를 했다는군요.   하느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인간들은 우리 물개들을 잡아서 기름을 짜내어 영양제와 화장품을 만드는 것도 부족해 우리 생식기까지 탐냅니다. 멸종될 뻔 했던 우린 자연보호 운동가들 덕분에 생존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바다도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끼니만 채우면 물 밖으로 나와 따뜻한 햇빛에 일광욕을 즐기지만 다른 물고기들은 플라스틱인지 뭔지 하는 쓰레기 때문에 내장이 터져서 죽어 간다고 합니다.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도와주세요. 멋지게 만드신 대양의 참 모습을 파괴와 폭력으로부터 지켜주세요.   저희 물개들이 다른 물고기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인간 관리인들이 인정해 주면 오죽 좋으련만 그렇지 않은 현실이 염려 됩니다.   지구의 속사정을 알아채는 일은 우리 물개들이 인간 관리인 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인지능력이라고 하는데, 능력으로 부르기엔 우리는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지요. 자연에 동화될 수 있었던 비결은 경외심이었습니다. 우주를 창조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풍랑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평화롭게 생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물개들의 눈에도 물 밖의 세상이 험악하게 보입니다. 아니, 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한테도 불똥이 튀어 바다 깊은 곳으로 숨어들게 합니다.   우리는 바다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인간 관리인들의 사정이 딱해보입니다. 안전한 곳이 없는 것 같아서지요.     그런데 자기들의 거주지를 보존하려는 의지도 없어 보입니다. 물고기들은 쓰레기 때문에 숨이 막힙니다만 우리가 물고기를 많이 잡아먹는다고 우리 동료를 때려 죽일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청지기의 사명을 쇄신해야 하지 않나요.   지구가 괴로워하고 있는데 어찌 그리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것인지 우리들은 울화가 터집니다.   우리도 지구 공동체의 일원인지라 마음 같아서는 일손을 보탰으면 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저희는 바다를 벗어날 입장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구의 이변은 모든 생명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최경애 / 수필가발언대 사자 독백 인간 관리인들 창조자이신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

2025-01-30

[잠망경] 독백

옛날 정신과 수련의 때 뉴저지 큰 정신병원에서 주말 문라이팅, ‘알바’를 한 적이 있다. 노인 병동에서 두 노인이 하는 대화를 엿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쪽이 자기는 변비가 심하다고 투덜댄다. 다른 쪽은 수십 년 전 취중운전으로 아들이 감옥에 갔던 이야기를 한다. 둘은 서로 말을 오버랩하지 않고 상대가 말을 멈추면 자기 말을 한다. 상대의 말에 대한 반응은 없다.   계속해서 웃는 표정으로 독백을 이어가는 그들!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말을 ‘주고받는’ 행위를 대화(對話)라 하지 않는가. 자기 말만 열심히 할 뿐 상대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그들이다.   그룹테러피 중 환자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혼잣말을 하는가. ‘멘탈 체크, mental check’를 하기 위해서라고 누가 답한다. 나도 가끔 그런다. 할 일이 많을 때, “가만있자, 무엇부터 먼저 하지?” 하며 자신에게 소리 내 묻는다. 멘탈 체크는 자신에게 짧게 물어보거나 좌절감에서 내뱉는 욕지거리처럼 순간적인 이벤트일 때가 대다수다.   환청증상이 있는 환자가 병동을 걸어가며 길게 하는 혼잣말은 뭐냐, 하는 질문이 터진다. 환자와 환청 목소리와의 대화인 경우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안개 자욱한 새벽에 선친의 유령과 나눈 대화는 참으로 리얼한 장면이다. 맨해튼 한복판을 홀로 걸어가면서 허공을 향하여 크게 소리쳐대는 남루한 옷차림의 노숙자의 독백 또한 리얼한 대화로 보아야 한다. 두 경우 다 대화의 상대자는 실상이 아닌 완전 허상이다.   중학교 때 끄적거렸던 내 시(詩)는 노골적인 독백이었다. 이윽고 대담한 시인들이 대화체의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차츰 문어체가 구어체로 바뀐다. 우아한 아어(雅語)보다 투박한 구어(口語)가 판을 친다.   내가 좋아하는 김수영의 시 ‘눈’(1956)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중략) …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줄담배를 피는 문학청년의 만성 기관지염을 들먹이며 시인의 기백을 부추기던 김수영!   환자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진다. 환청이 있으면 조용히 듣고 있을 일이지 꼭 그렇게 큰 소리로 대화를 해야만 하느냐? 누군가 언론의 자유를 내세운다. 언론의 자유라는 건 남들 앞에서 말도 안 되게 소리치는 행동이 아니라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내 행동은 다 옳으니까 비판하지 말아라, 하는 논조가 있고, 이유야 어쨌든 남들을 괴롭히는 행동은 나쁘다, 하는 ‘원칙과 상식’을 강조하는 유파(流派)가 몇 있다. 한국 정치판과 비슷한 데가 있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깔려야 할 기본 도덕을 역설한다. 환자들은 그런 고상한 발언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대화, conversations’는 어원학적으로 당신이 어머나, 하며 놀랄 정도로 이상한 말이다. 14세기에 라틴어로 ‘거주하다’라는 뜻과 ‘성교하다’의 명사형으로 거의 동시에 쓰인 적이 있었다가, 18세기경 ‘대화’라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의미로 변천된 말이다. 독백은 중이나 수도승이 하는 말이고 대화는 친근한 남녀들이 ‘주고받는’ 말이라는 학구적 견해가 있다. 어떤가. 좀 이상한가.   엊그제 ‘독백’이라는 제목으로 쓴 내 단시(短詩)의 전문이 이렇다. “캄캄한 방에서 내가 너를 대면하는 동안/ 너는 내게 무슨 말이든지 한다/ 그래요 당신도 그러잖아요/ 제3자인 저도 이 대화가 참 재미있습니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독백 대화 conversations 환청 목소리 노인 병동

202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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