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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임의 마주보기] '흑백 논리는 창의적 사고의 적이다'

나는 어린이의 창의적 사고가 성장 발달하는 그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의 명제로 짧게 요약 정리하고 싶다. 우선, “흑백논리는 창의적 사고의 적이다.” 그리고 “이분법적 사고는 융통성의 반대다.” 그러나 “어린이가 세상에 대해서 갖는 순수한 경이로움은 열린 사고와 창조적 발견으로 가는 정도이자 튼튼한 토대가 된다.”     따라서 우리의 소중한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자발적 경이로움’과 호기심을 계속 보지하고 살려 나갈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어른은 아이들의 마음이 활짝 열리고, 그들이 꿈을 이루고 빛을 내고 만개할 수 있도록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고 도와주어야 한다. 성장해가는 아이의 호기심을 없애고 기를 죽이면, 남는 것은 수치심과 우울과 불안감이다. 왜냐하면 매사에 자신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자신이 없다 보면, 결국 정신적으로 연약해지고 심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립하기가 어렵고 자존감 없는 삶을 겨우겨우 살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순종과 복종을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의 순수한 아이디어에 호응하고 맞장구를 쳐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자신의 눈으로 보고 관찰한 것을 자신 있게, 자유롭게 글과 그림 그리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싶어한다. 나는 “창조성이란 눈사람의 얼굴과 머리를 ‘하얀 눈’이 아니라, 기꺼이 ‘노란 해’나 ‘파란 별’로도 그릴 수 있는 재미와 재치가 항상 살아 있어야 가능하다”고 본다.     결국 성인이 되어서 과학과 종교 둘 다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도 철저한 흑백논리가 결코 삶의 완전한 논리도 방법론도 될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가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에는 자신들의 입장과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 과학적 종교자나 종교적 과학자가 참 많다. 사실상 우리 인생살이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신앙) 둘 중 하나만 믿고 선택하고 따른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여기서 무엇을 강하게 믿고 의존하는 행위에는 온갖 미신과 잡신, 또 ‘행운의 부적(lucky charm)’과 마스코트, 점/사주, 굿(exorcism), 징크스를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과 행위의 예들은 다음처럼 수없이 많다.     어떤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가 시험 당일에 “너 오늘 시험을 아주 잘 볼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 말로 인해서 오히려 시험을 망치게 된다는 아주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어의 ‘jinx(징크스)’에 해당한다. 또는 아침에 아내가 출근하는 남편에게 잔소리하면, 남편은 그날 하루 종일 모든 운수가 나쁠 것이라고 왕짜증을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린다. 혹은 어떤 젊은이는 빨간색 팬티를 입어야 미팅이 성사된다는 등의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사견을 따른다. 마치 ‘13일의 금요일’처럼 말이다.     다른 우스갯소리로, 과학과 의학, 신기술을 배우고 다루는 의대 레지던트들 사이에서도 ‘오늘은 환자수가 좀 적고 덜 바쁘겠지’라고 확신한 날이면, 그날은 이상하게도 정반대로 환자수가 엄청 많고 정신없이 바쁘게 된다며 쉬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스포츠 분야와 정치계 등을 포함해서, 어떤 이는 럭키 세븐(7)이나 복 삼(3)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또 어떤 이는 각종의 부적 또는 행운의 마스코트를 몸에 지니거나 가방 등에 달고 다니며 영적으로 위로를 받고 심적으로 의존한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일종의 사회문화적 배경 혹은 개인적으로, 나아가 어떤 은밀한 이유로 해서, 매우 비합리적이며 결코 논리적이지 않은 믿음이나 신조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 거대한 우주의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 존재로서, 수많은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행동들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는 인간 삶의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이자 생활 방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각자가 따르는 자신만의 믿음이나 신념을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하게 또 세련되게 갖가지 미사여구로 포장한다 해도, 그 어떤 것도 인간 모두에게 만사형통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에게 자신의 잣대에 의한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함부로 강요하지 말자. 슬프고 안타깝게도 너무 지나친 흑백논리는 우리 아이들의 창의력 계발을 저해할 뿐이다.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손원임의 마주보기 흑백 논리 흑백 논리 종교적 과학자 과학적 종교자

2024-11-19

[아름다운 우리말] 온몸으로 읽다

요즘 저는 법화경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배울 게 참 많다는 생각을 하고, 동시에 배울 게 많아서 참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는 게 많아지면 모르는 게 많아진다는 말은 탁월한 진실의 언어입니다.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즐겁습니다. 종교를 넘나드는 독서는 큰 즐거움을 줍니다. 여러 종교의 책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책에서 법화경 독송에 관한 부분을 보면서 읽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언어교육을 강의하는 사람이어서 읽기 교육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을지 늘 고민입니다. 이 책은 읽기에 대한 제 눈을 밝혀주었습니다.     법화경을 읽다(카마타 시게오 지음)라는 책에서는 읽기의 종류를 네 가지로 나누어 놓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목독(目讀)입니다. 즉, 눈으로만 읽는 겁니다. 요즘 우리의 읽기는 거의 다 목독입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어본 경험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할 정도입니다. 예전에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지금도 교실에서 학생에게 책을 읽어보라고 하면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모두 책을 속으로 읽습니다. 눈으로만 읽으면, 시각으로 감각이 한정되어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끔이라도 소리 내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두 번째 읽기 방법은 낭독(朗讀) 즉, 음독(音讀)입니다. 책에서는 입으로만 읽는 것이라 소개되어 있습니다. 즉, 소리를 내어서 읽는 것입니다. 주로 시 읽기에 사용되는 읽기 방법입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이러한 읽기 방법을 부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입으로 읽는 것이 건성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읽는 모습에 진심이 담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입으로만, 말로만 읽는 겁니다.   세 번째 읽기 방법으로 심독(心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심독을 잘못 이해하면 마음속으로 읽는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전에서도 묵독(默讀)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심독은 소리를 내서 읽되, 마음을 다하여 읽으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게 전체 논리에 맞습니다. 물론 경지에 오른 사람이 마음으로 읽는다면 소리를 낼 필요도 없어질 수는 있겠습니다. 아무튼 심독은 온 마음을 다하여 읽는 것입니다.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책이나 철학책의 경우라면 더욱 심독을 하여야 할 겁니다.   이 책에서는 읽기의 방법으로 소개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심독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하나를 덧붙이고 있는 겁니다. 바로 색독(色讀)입니다. 여기에서 색의 의미가 어렵습니다. 색독은 다른 말로 하자면 체독(體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독에 대한 설명에도 몸[體]으로 읽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몸으로 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읽어야 몸으로 읽는 것일까요? 저는 이 부분이 한참 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독과는 어떤 점이 다를까요? 온 마음으로 읽는 것과 온몸으로 읽는 것은 한 쌍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몸으로 읽는다는 것은 몸으로 실행한다는 의미라는 것이었습니다. 색독의 핵심은 실천에 있다는 겁니다. 색독이야말로 종교적인 읽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리 내어 읽고, 마음 깊이 이해하였다고 하여도 실천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대승불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겁니다. 법화경은 심독하고, 색독해야 합니다. 어쩌면 모든 종교의 경전은 색독하고, 체독해야 할 겁니다. 온몸으로 책을 읽었다는 말은 읽은 바를 실천하고 있다는 말, 깨달음과 삶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읽기 방법 시게오 지음 전체 논리

2024-03-24

[열린 광장]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안보동맹

우리 민족의 선각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은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다”라고 강조했다.   무엇이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만드는가. 조국을 떠나 독립운동을 한 쿠바 이민자 임천택의 자손 헤로니모는 “언어와 문화는 잃어버렸어도 한국사람이 되고 싶은 의지가 한국사람을 만든다”고 말했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기에 타국에 의지하는 국방 개념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를 지양하는 국가는 안보 논리가 경제 논리를 앞설 수 없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과 접경하며, 이념도 다른 동북아의 한반도는 근대 많은 침략과 수난을 겪어왔다.   한국은 6.25전쟁 이후 비약적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안보는 동맹국인 미국과 함께하며 지금도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지속적으로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기체계의 지속적 개발로 한국형 전투기(KF-21)의 완성과 시험 비행을 준비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최근 전투기의 첨단무기체계는 보이지 않는 원거리에서 레이다, 전술데이타 링크 등 모든 무기체계 상호 연동성을 운용하여 중장거리 정밀유도 미사일로 지상 목표와 적기를 격추시킨다.   자주국방과 함께 안보 동맹은 매우 중요하다. 국가간의 관계에서 경제와 안보를 균형있게 유지, 발전시킬 때 종종 합리적이지 않은 경우가 발생한다. 또한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자주 목격한다.     6.25 이후 한국은 미국의 영향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택했고, 오늘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경제력으로는 세계 10위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최근 강대국 러시아 푸틴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옛 소련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다. 간단히 끝날 줄 알고 시작했으나 예상 밖의 우크라이나의 항전으로 커다란 늪에 빠져가고 있다. 동맹국이 없는 우크라이나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맞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흐름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국가주의가 돼가고 있다. 동북아와 한반도 주변은 북한핵무기 체계의 고도화와 위협, 중국의 국방력 강화,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영유권 주장 등으로 국제관계가 복잡하다. 아직 미완성인 한국 자주국방의 현실과 겹치며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확고히 해서 한국이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이루기를 소원한다. 심인태 / 재향군인회 공군부회장열린 광장 안보동맹 항구 한국형 전투기 경제 논리 안보 논리

202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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