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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젊은 느티나무로, 그래도 살아

깃털까지 붙잡고 살자.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다 떠나자. 죽을 때까지 죽은 게 아니다. 남은 시간이 살아온 시간보다 적다 해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늘 하던 것들이 힘에 부대끼고, 기억의 창가를 맴도는 강물이 느리게 흘러도 절망하지 않기로 한다. 과속으로 달리던 브레이크를 급히 잡으면 전복되기 쉽다. 과욕 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하면 크게 떠벌리던 일들도 별 거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청춘은 불에 댄 사랑처럼 뜨겁고 힘겨웠다. 소용돌이 치는 파도와 힘겨루기 하며 피를 철철 흘리며 장년을 보냈다. 세월이 마디마디 금을 긋고, 타다 남은 촛불처럼 삶이 흘려내려도, 기적처럼 버텨온 생의 순간들을 붙잡고 버티기로 한다.   꽃잎들은 겨울동안 말라 비틀어진 가지 추스르며 다투어 햇살 아래 속살 드러낸다. 맨 땅이라도 뿌리만 땅속 깊이 내리면 싹이 돋고 잎이 자란다. 사랑이 허허벌판 굳은 땅에서 느티나무로 뿌리내리는 것처럼.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로 시작되는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는 부모의 재혼으로 오누이가 된 청춘남녀의 사랑을 감각적이고 세련된 문체로 그려 싱싱하고 풋풋한 사랑을 담아낸다. 윤리의 껍질 벗고 연인으로 사랑해도 괜찮을 방법을 찾자며, 각자가 처한 현재의 길을 걷자고 맹세하는 사랑은 아름답다.   느티나무는 사회적 통념에 굴하지 않는 젊은 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상징한다.   느티나무 꽃말은 ‘운명’이다. 느티나무는 운명을 거스르지도 운명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운명을 바꾸려 용쓰지 않고 처음 뿌리내린 곳에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비바람 눈보라에도 쓰러지지 않고 무성한 잎을 가지마다 매달고 넓은 그늘 만들어 그대가 돌아올 시간을 기다린다. 천년을 하루같이 올곧은 사랑의 약속을 지킨다.   언젠가부터 단단했던 느티나무의 몸에 옹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옹이는 나무의 몸에 박힌 가지의 일부분이다. 길고 긴 세월 동안 세월을 견뎌낸 뒤틀린 아픔이다. 살아남기 위해. 더 단단해지기 위해, 느티나무는 품 속에 가지를 키웠는지 모른다.     천년을 견디는 느티나무도 사는 것이 녹록지 않았을까? 옹이가 많은 나무는 갈라지거나 뒤틀려서 목재로서 가치가 없어진다. 옹이가 껍질을 허물고 상처를 도려내도 느티나무는 옹이를 품고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사랑에 불씨 하나 가슴에 불 질러놓고/ 냉정히 등을 돌린 그 사랑 지우러 간다/ 얼마나 달려가야 이 사랑 내려놓을까/ 어디쯤 달려가야 그리움도 내려놓을까/ 너무 깊어 옹이가 된 사랑 때문에 내가 운다(중략) 빼지 못할 옹이가 된 사랑 때문에 내가 운다’ -조항조 노래 ‘옹이’ 중에서   산다는 것은 수많은 옹이를 품고 견디는 일이다. 옹이는 휘몰아친 생의 고난과 시련이 남긴 못자국이다. 지게꾼으로 자식을 키운 아버지의 손에 남은 인고와 흔적이다. 산다는 것은 아버지의 손바닥에 굳은 살로 남은 옹이가 아닌지.   아프지 않는 것은 없다. 성장은 고통의 흔적을 남긴다. 청춘의 불길이 뜨겁고 목말라도 상처와 고통으로 옹이 진 그대 심장에 사랑은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사는 것이 힘들고 외로워도, 젊은 느티나무로, 그래도 살아있기를.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느티나무 느티나무 꽃말 옹이가 껍질 사랑 때문

2024-05-21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코스모스 씨를 받으며

이렇게 행복한 적이 있었나. 가슴 깊은 곳에서 맑은 샘물이 용솟음친다. 하얀 장갑 끼고 코스모스 씨를 받는다. ‘하나도 버리지 마라.’ 소녀가 소년에게 말했던, 가장 좋아하는 소나기의 구절을 떠올린다. 한 톨도 땅에 떨어트리지 않게 조심조심 씨를 받는다. 사실 땅에 떨어져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싹이 돋을 텐데 괜스레 수다를 떤다.     새집으로 이사 와서 코스모스 씨를 구해 뒤뜰에 뿌렸다. 옛집은 나무 숲이 울창해서 채소도 안 자라고 코스모스는 심을 생각도 못했다. 담장 따라 뿌린 씨앗이 여린 싹을 돋우더니 가을이 오기도 전에 긴 모가지 흔들며 연분홍색 분홍색 빨강 자주색 보라빛 꽃들 속에 하얀 코스모스가 점을 찍으며 여기저기 수를 놓는다.     바다처럼 깊고 넓은 코발트빛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목화꽃을 뿌려놓은 듯 뭉개구름이 실타래처럼 떠다닌다. 담장 따라 갈대가 서걱이는 연못에 닿을 때까지 코스모스는 뒤뜰을 경호하듯 지천으로 피어있다. 지천(至賤)은 ‘더할 나위 없이 천한다’는 뜻인데 ‘으로’라는 토씨가 붙으면 매우 흔하다는 뜻이 된다. 천하다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매우 흔하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사랑은 지천에 깔려 있어도 하나같이 소중하다.     코스모스는 산들바람이 부는 유년의 피리소리다. 측백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는 초등학교 교문을 나서면 황토빛 꼬부랑길 따라 핀 코스모스가 실바람에 흔들린다. 탱자나무 아래서 다시 돌아 올 거라고 다짐을 했다. 삼륜차에 이사 보따리를 실을 때 소꼴을 베던 머슴아이의 소처럼 크고 어진 눈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코스모스는 무리 지어 핀다. 여러 꽃이 꽃대 끝에 모여 머리 모양을 이루어 한송이 꽃처럼 보이는 두상화서(頭狀花序)다.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면 까맣고 진갈색인 씨앗을 암술머리에 얹는다. 코스모스는 자가수정식물로 수술이 성숙해서 노란색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붙어 발아하면 수정이 되기 때문에 번식력이 강하다.     내 나이 스물 셋, 홀어머니 남겨두고 떠나온 고향은 눈물로 아롱진 공항의 이별이다. 편지는 늘 여러 번 다시 써야 했다. 방울방울 눈물 자국이 번진 편지를 보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눈가가 짓물러지셨으리라. 번개불에 콩 튀기듯 사느라 코스모스 씨 구해 심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 새 집에 심을 정원수를 사러 갔는데 눈에 익은 코스모스 꽃봉지가 보인다. 늦가을이라 반값 세일, 큰맘 먹고 싹쓸이 해서 몽땅 샀는데 봉지를 열어보니 겨우 일곱개가 전부다. 틸러로 담장 아래 파고 소똥과 부드러운 흙 사다 붓고 한알 한알 보물처럼 심었다. 봄이 되자 여린 싹이 땅을 뚫고 올라 왔고 그 해 가을 떨어진 씨앗들이 다음 해에 바람에 날려 무리를 이루며 피기 시작했다.     올해는 작정하고 씨앗 받아 내년 봄에 아기 사슴이 기웃거리는 오솔길까지 뿌릴 생각을 한다. 과일 나무도 종류별로 두 그루씩 심고 먼 훗날 추수할 날을 기다린다. 부자가 따로 없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보름달 같이 부풀어 두둥실 창공을 떠다닌다.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깔리면, 단술(식혜) 빗고, 수정과 담그고, 약식 만들고, 청포묵 쑤어 한인회 도와준 구닥다리 임원들 초대할 생각이다. 함께 손 잡고 오색 코스모스 핀 길 따라 걸을 생각을 하면 혼자 함박꽃처럼 웃는다.     코스모스 꽃말은 순결과 순정이다. 화려하고도 찬란했던, 멀고도 먼 길을 돌아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던 날로 돌아오는 시간은 따스하고 행복하다.     오직 그대만을 사모했던 순정의 날들로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다면,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향기로운 가을길’을 천번이고 만번이고 맨발로 걸을 수 있으리.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코스모스 코스모스 꽃봉지 코스모스 꽃말 오색 코스모스

202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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