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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코스모스 씨를 받으며

이기희

이기희

이렇게 행복한 적이 있었나. 가슴 깊은 곳에서 맑은 샘물이 용솟음친다. 하얀 장갑 끼고 코스모스 씨를 받는다. ‘하나도 버리지 마라.’ 소녀가 소년에게 말했던, 가장 좋아하는 소나기의 구절을 떠올린다. 한 톨도 땅에 떨어트리지 않게 조심조심 씨를 받는다. 사실 땅에 떨어져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싹이 돋을 텐데 괜스레 수다를 떤다.  
 
새집으로 이사 와서 코스모스 씨를 구해 뒤뜰에 뿌렸다. 옛집은 나무 숲이 울창해서 채소도 안 자라고 코스모스는 심을 생각도 못했다. 담장 따라 뿌린 씨앗이 여린 싹을 돋우더니 가을이 오기도 전에 긴 모가지 흔들며 연분홍색 분홍색 빨강 자주색 보라빛 꽃들 속에 하얀 코스모스가 점을 찍으며 여기저기 수를 놓는다.  
 
바다처럼 깊고 넓은 코발트빛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목화꽃을 뿌려놓은 듯 뭉개구름이 실타래처럼 떠다닌다. 담장 따라 갈대가 서걱이는 연못에 닿을 때까지 코스모스는 뒤뜰을 경호하듯 지천으로 피어있다. 지천(至賤)은 ‘더할 나위 없이 천한다’는 뜻인데 ‘으로’라는 토씨가 붙으면 매우 흔하다는 뜻이 된다. 천하다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매우 흔하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사랑은 지천에 깔려 있어도 하나같이 소중하다.  
 
코스모스는 산들바람이 부는 유년의 피리소리다. 측백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는 초등학교 교문을 나서면 황토빛 꼬부랑길 따라 핀 코스모스가 실바람에 흔들린다. 탱자나무 아래서 다시 돌아 올 거라고 다짐을 했다. 삼륜차에 이사 보따리를 실을 때 소꼴을 베던 머슴아이의 소처럼 크고 어진 눈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코스모스는 무리 지어 핀다. 여러 꽃이 꽃대 끝에 모여 머리 모양을 이루어 한송이 꽃처럼 보이는 두상화서(頭狀花序)다.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면 까맣고 진갈색인 씨앗을 암술머리에 얹는다. 코스모스는 자가수정식물로 수술이 성숙해서 노란색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붙어 발아하면 수정이 되기 때문에 번식력이 강하다.  
 
내 나이 스물 셋, 홀어머니 남겨두고 떠나온 고향은 눈물로 아롱진 공항의 이별이다. 편지는 늘 여러 번 다시 써야 했다. 방울방울 눈물 자국이 번진 편지를 보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마도 눈가가 짓물러지셨으리라. 번개불에 콩 튀기듯 사느라 코스모스 씨 구해 심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 새 집에 심을 정원수를 사러 갔는데 눈에 익은 코스모스 꽃봉지가 보인다. 늦가을이라 반값 세일, 큰맘 먹고 싹쓸이 해서 몽땅 샀는데 봉지를 열어보니 겨우 일곱개가 전부다. 틸러로 담장 아래 파고 소똥과 부드러운 흙 사다 붓고 한알 한알 보물처럼 심었다. 봄이 되자 여린 싹이 땅을 뚫고 올라 왔고 그 해 가을 떨어진 씨앗들이 다음 해에 바람에 날려 무리를 이루며 피기 시작했다.  
 
올해는 작정하고 씨앗 받아 내년 봄에 아기 사슴이 기웃거리는 오솔길까지 뿌릴 생각을 한다. 과일 나무도 종류별로 두 그루씩 심고 먼 훗날 추수할 날을 기다린다. 부자가 따로 없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보름달 같이 부풀어 두둥실 창공을 떠다닌다.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깔리면, 단술(식혜) 빗고, 수정과 담그고, 약식 만들고, 청포묵 쑤어 한인회 도와준 구닥다리 임원들 초대할 생각이다. 함께 손 잡고 오색 코스모스 핀 길 따라 걸을 생각을 하면 혼자 함박꽃처럼 웃는다.  
 
코스모스 꽃말은 순결과 순정이다. 화려하고도 찬란했던, 멀고도 먼 길을 돌아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던 날로 돌아오는 시간은 따스하고 행복하다.  
 
오직 그대만을 사모했던 순정의 날들로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다면,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향기로운 가을길’을 천번이고 만번이고 맨발로 걸을 수 있으리.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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