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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인물탐구: 데오빌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데오빌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1차 수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전달합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헬라어 원어를 보면, ‘데오필로스’인데,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몇몇 신학자는 이 데오빌로가 어느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데오빌로에 대해서 ‘각하’라는 ‘크라티테스’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 호칭은 당시 로마 총독을 부를 때에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도 ‘벨릭스, 베스도’ 총독을 부를 때에도 이 호칭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해석은 데오빌로는 특정한 인물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오빌로가 어느 특정한 인물이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키든, 누가복음의 내용은 단순한 어떤 특정한 인물에게 쓰여졌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일차적인 독자는 특정한 사람이라 해도, 전체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 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이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라고 해서 그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만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서 편지를 쓰게 하심으로 오늘 날 그리스도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사도행전’도 그리스도인 전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만으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그 내용을 특정한 사람 데오빌로에게 기록한 것은 당시 헬라 문학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글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헌정하는 유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데오빌로를 수신자로 기록했다는 것은 데오빌로가 당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누가복음 1장1절-3절.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 1장4절. 여기에 ‘각하가 알고 있는 바’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 ‘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가 ‘카테케오’라는 단어로, ‘가르치다, 배워주다, 깨닫게 하다’의 뜻입니다. 단순하게 데오빌로가 가지고 있는 궁금증이 아닙니다. 데오빌로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고, 배우고, 깨달은 상태입니다. 거기에 더 확실한 내용을 누가복음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소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율법, 말씀에 대해서 능통하다고 자부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데오빌로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가 아니라 깊이 깨닫고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 상황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박해와 핍박이 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고상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핍박과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위치에 있는 데오빌로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최고의 지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또한 어떤 것이 최고 가치의 지혜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의 학문을 아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알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위대한 지혜와 지식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우리는 예수를 알고, 말씀을 깨닫는 것에 열심을 내고 있을까요?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그 누구에게도 뒤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살면서 정작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애타하지도, 답답해 하지도 않습니다. 이 당시 데오빌로 정도가 된다면 세상적으로 남 부럽지 않을 삶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또한 그냥 믿는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믿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욕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알고, 깨닫기를 원하는 믿음의 갈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 말씀을 바로 알고, 깨닫고 신앙 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런 믿음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인물탐구 신약 정작 그리스도인 당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 전체

2023-08-04

"소외와 수치 당해도 포용·존중해야 그리스도인"

올해 들어 잇따라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아시아계를 비롯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테네시주 멤피스 지역에서는 교통 단속 과정에서 흑인 타이어 니컬스가 경찰관 5명에 의해 구타를 당해 숨졌다.   피해자들은 유색 인종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가해자도 유색 인종이었다. 아시아계가 아시아계에 총을 쐈고, 흑인 경관들이 흑인을 구타했다.     그럼에도, 범죄를 야기한 혐오, 증오 등의 감정은 인종의 틀 안에서 소수계를 다시 한번 조명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강우중 교수(기독교 사회윤리학)는 "혐오, 증오범죄는 이민자가 미국 사회 내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해악을 끼친다"고 말했다.     강 교수에게 증오 범죄 현상을 기독교 윤리 차원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야 하는지 물었다.   -사회가 흉흉하다.   "이제 '미국 사회'를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미국은 다양성에 대한 포용, 이질성을 수용했지만 동시에 특정 집단의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우월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지금은 그러한 부분이 배제와 차별로 연결되고 있다. 혐오 범죄 현상을 들여다보면 '누가 미국인임을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된다."   -소수계도 미국인 아닌가.   "인종적, 민족적, 사회적 기준 등을 보면 진짜 미국인이란 무엇일까. 암묵적으로 이 사회는 특정 기준에 부합되어야 진짜 '미국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가운데 소수계로 불리는 이들은 '내부의 이방인'으로 구분되어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최근 잇따라 발생한 유색 인종에 대한 사건들은.   "이는 단순히 인종적 정체성과 가치를 무시하는 제도적 폭력 수준에서 정리될 수 없는 일들이다. 최근의 사건들은 공통 핵심 사항이 '수치심'이다.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침 뱉기, 폭행, 조롱, 협박을 당할 때 피해자가 겪는 두려움, 공포, 아픔, 상처는 극한의 수치심으로 각인된다.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짓이겨진 것이다. 소수계 사이에서 이러한 '사회적 수치심'이 지금 미국 사회 가운데 확산하고 있다."   -수치심의 확산 속에서 주목할 점은.   "폭력의 다양한 형태가 얼마나 일반화, 일상화되어 있는지 주목해 봐야 한다. 수치심이 일상화하면 우리도 폭력의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동시에 가해자도 될 수 있다. 한인들 역시 LA폭동과 같은 사건을 통해 소외와 차별이라는 사회적 수치를 경험하지 않았나."     -기독교인은 무엇을 할 수 있나.   "그리스도인은 소외당해도 포용할 수 있다. 수치를 당해도 존중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게 그리스도인이다. 한인들 역시 다른 소수 인종에게 소외와 수치를 경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연합과 화해의 모습으로 반응하고, 사회적 도덕성과 신앙의 견고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윤리 관점에서 해결 방안은.   "수치를 당하는 이들의 현실을 당사자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들과 화해와 연합을 이루어가고 책임을 다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깨우쳐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어떻게 찾을 수 있나.   "예수는 화해와 연합을 통해 소외된 우리를 회복시켰다.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과 연합한 존재가 되지 않았나. 우리도 당연히 수치를 당하는 이들과 연합하고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존재로서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할 책임도 있다. 신앙 고백과 다짐이 사회적 맥락에서도 발견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인과 교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며, 변화들이다."   -한인 교계는 적극적인 행동이 부족한데.   "사랑은 감정적 호소와 막연한 도덕, 윤리 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렇게 역동적인 힘이 있음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통해 구원받은 사실은 소외와 수치를 당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 점검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피해자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여해서 위로하고, 정의 실천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석해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사회적 연대가 될 수 있다. 지역 사회에서 자원봉사자가 되고, 소외 계층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인 교회가 꾸준하게 진정성을 갖고 진행하는 선교 활동, 이웃을 섬기는 활동에 좀 더 참여하고 열심을 낸다면 좋겠다."   -교회가 그렇게 할 때 생겨날 변화는.   "연합된 모습을 통해 결국 복음의 재생산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다. 수치를 당하는 이들에게 복음의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연합과 화해를 이루어낼 수 있다. 어색함을 떨쳐 버리고 함께하려는 작은 노력을 기울일 때 가능하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미국 그리스도인 사회적 수치심 기독교 사회윤리학 혐오 증오범죄

2023-02-06

[기독교와 사회물리학] 디지털 네이티브와 교회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면서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 같은 방대한 정보와 AI (인공지능)에 의한 맞춤형 정보가 제공되었다.     요즘 청소년은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기기로 둘러싸여 있는 '디지털 네이티브 (Digital Native)'이다. 온라인 플랫폼 활용이 익숙하여 그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많으며 관심과 흥미 있는 주제의 관련 지식을 엄청난 지식과 정보 속에서도 손쉽게 획득한다.     영상 콘텐츠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고 나눔으로써 자기 힐링을 이루고 일상의 활력을 찾는다. 인생의 고민과 인간관계의 문제 중요한 결정과 선택의 시간에도 필요한 조언을 온라인상에서 얻는다. 이들은 오프라인과 온라인 공간의 차이가 없어서 대면 대화 중에도 문자를 보내며 소통한다. 온라인으로 맺게 된 친밀한 인간관계는 오프라인상에도 그대로 연계되어 친밀감을 유지한다.   과거에는 교사 부모 교역자 같은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구조였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는 오히려 필요한 정보와 문화를 다음 세대에게 받게 되면서 기성세대나 다음 세대가 정보의 바다를 헤쳐가는 동료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세대가 지식과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자아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고민하며 생물학적 변화와 성인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고민하는 혼란의 성장통을 겪는 세대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함께 곁에서 지지해 주는 신실한 기성세대가 필요하다. 청소년은 성적이나 재능과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으며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인식할 기회와 공간이 필요하다. 그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편견 없이 수용하고 소중히 여기는 공감의 감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청소년 사역자인 마크 드브리스는 지속적인 청소년 사역을 위해서는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연결이 필수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청소년 사역의 실패는 청소년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놓은 교회학교 구조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청소년 눈높이의 신앙교육은 성숙한 청소년 그리스도인은 배출했는지 모르지만 지속해서 성장해야 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가족과 확대 가족으로서 교회는 다음 세대를 신앙으로 양육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이 두 공동체가 디지털 네이티브 청소년들이 겪는 다양한 성장통을 건강하게 극복하고 버틸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팬데믹 기간 가족들이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족 간 소통과 상호작용이 늘어난 반면 태도에 대한 지적 생활습관에 대한 간섭 등이 발생하면서 갈등지수도 높아졌다. 확대 가족으로서 교회는 이런 갈등 경험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소그룹 목장에서 이런 갈등을 나눔으로써 이 같은 문제가 우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반응하고 기도하며 간구할지를 깨닫게 된다.   확대 가족으로서 경험하게 되는 신앙공동체의 긍정적 경험은 오프라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대면하고 접촉하여 그 마음을 전달받고 공감할 때 비로소 느끼게 된다. 교회라는 확대가족이 청소년과 그들의 가정을 지원하는 형태로 협력할 때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 수 있다.   goodchul@gmail.com 조철수 / 목사·맥알렌세계선교교회기독교와 사회물리학 네이티브 디지털 디지털 네이티브 청소년 그리스도인 교회학교 구조

2022-09-12

[기독교와 사회물리학] 유기적 신앙 성숙

많은 교회지도자 및 신학자들은 현대 교회를 성찰하면서 그동안 교회가 성장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성숙을 이루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성장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도록 계량화되어있다. 교회의 성장은 예배당의 크기 교인의 수 재정상태 운영중인 프로그램 소그룹 수 침례(세례)자 수 선교비 지출액 파송 선교사 등등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성장의 자료를 근거로 교회들을 비교하기도 한다.     혹자는 성장한 교회의 직분자가 된 것을 신앙성장과 성숙의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종교적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직분자가 되면서 외식(hypocritical)하는 그리스도인을 양성했기 때문이다. 주일예배 참여 헌금 십일조 생활 기도 봉사 성경공부 제자훈련 교제 등을 단순하게 계량화해서 영적 성장과 성숙을 가늠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표리부동한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향해 질책했던 것과 같이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지만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그리스도인들을 잘못된 신앙성숙의 기준으로 교육한 결과이다.   신앙성숙은 영성과 심리학을 영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으로 양분하지 않고 통전적으로 고려한다. 웨스트 조지아 주립대학교의 심리학자 다니엘 헬미니악은 과학기술 사고가 만연한 현대에는 영성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영성의 과학적 사고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을 육체와 심리 및 영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영적 발달이 신체적 정서적 지적 도덕적 자아를 결정하는 신앙발달과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앙성숙을 가늠할 수 있는 영성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심리적 성숙이 자기초월로 이루어질 때 성숙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빌라노바 대학교의 월터 콘 신학교수는 신앙성숙을 먼저 자기(self)가 되어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을 실현해 가면서 자기를 뛰어넘어 세계 타자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형성해 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자기(self)가 되는데 밑거름이 되는 자기 인식은 성숙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지식이다. 자기가 되려는 갈망과 자기를 초월하려는 갈망은 분리와 애착 독립과 포함 자율과 관계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다가 궁극적으로 자기초월을 이룬다.     자기인식과 자기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이루어지는 영성으로 확립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 질수록 자기인식이 분명해지고 자아(ego)를 발전시켜 점차 성숙에 이르게 되어 자기를 초월하여 이웃사랑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심리적 성숙 과정에서도 영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타자로 확장하는 관계성의 변화를 이룩한다. 이렇게 신앙성숙을 위한 영성은 심리적 성숙과의 유기적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진다.     엡 3:19(새번역)은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 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성숙이 자기인식의 지식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어 창조의 충만으로 채워지는 과정임을 밝힌다.   goodchul@gmail.com 조철수/ 목사ㆍ맥알렌세계선교교회기독교와 사회물리학 유기적 신앙 영성과 심리학 종교적 그리스도인 심리학자 다니엘

2022-05-16

[디지털 공감] 그리스도인의 손실 함수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와 기존의 소프트웨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의사 결정을 위한 논리 흐름의 규칙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에 달려있다.     기존의 소프트웨어는 전문가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는 많은 양의 데이터에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성경 구절을 넣으면 자동으로 설교를 만들어 주는 소프트웨어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기존의 소프트웨어에서는 많은 목사와 신학자들이 참여해서 규칙들을 만들어 넣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설교를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는 지금까지의 설교들을 기반으로 규칙을 발견해서 완전하게 새로운 설교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손실 함수(loss function)'라 불리는 것을 설계하는 일이다. 인공지능의 학습이 목표와 연관성이 없는 데이터는 그 정도에 따라 손실을 부과하고 전체의 손실을 줄여가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소프트웨어를 만드느냐에 따라 또 어떤 데이터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손실 함수의 종류와 구성이 달라진다.   인공지능의 이러한 학습은 인간의 그것과 자못 유사하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이나 그네를 타는 방법을 배울 때 몸의 위치와 힘의 강약을 조금씩 바꾸어가며 실패하는 확률이 가장 작은 쪽으로 자연스럽게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인으로 우리의 손실 함수는 무엇일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 혹시 우리는 작은 성취에 쉽게 만족해버려 시간을 낭비하거나 엉뚱한 것을 지키려고 소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이라는 목표를 정해주고 그것과 연관없는 것들은 손실로 처리하며 최소화하라고 가르친다. 그 성공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욕심 없는 착한 사람이라는 도덕적인 경지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성숙한 기독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손실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만들어놓은 성공이고 신앙이다. 이러한 손실에 큰 비중을 주어 줄여야만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참된 신앙이 될 것이다.   www.fb.com/theegital 김사무엘 / 박사ㆍ데이터과학자디지털 공감 그리스도인 손실 손실 함수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loss function

202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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