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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고물상

비행기로 세 시간 걸렸다. 오랜만에 여행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양 떼같이 순한 구름이 느릿느릿 가고 있다. 짧은 단발을 뒤집어쓴 야자수가 서 있다. 집 떠난 지 여섯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나는 속이 매슥거렸다. 그러던 중에 친구가 냉면을 준비하여 점심으로 주었다. 나는 맛있게 먹었다. 조금 있으니, 택배가 도착했다. 상자 안에는 배추김치와 무청 김치가 있었다. 우리가 온다고 친구가 주문한 것 같았다. “남편이 여기 오더니 한식을 너무 찾아.” 생전 안 먹던 굴젓, 청국장 등등 먹고 싶은 게 많아졌다고 한다.     친구의 집은 호텔처럼 정갈했다. 물건 하나하나에 눈이 갔다. 마늘, 생강 으깨는 대리석 절구는 소꿉 장처럼 아기자기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치이익 소리 내며 진한 커피를 뽑아냈다. 목욕탕에 걸린 흰색 수건은 두툼했고 비누는 로즈메리 향이 났다. 이불은 가볍고 시원했다. 친구가 부엌을 정리하는 시간은 나보다 2배쯤 많았다. 그릇이 찬장 안으로 들어가고 바닥에 먼지 하나 없는 상태에서 부엌 불이 꺼졌다.     나는 두고 온 우리 집이 생각났다. 오래된 물건이 쌓여 있는 고물상 느낌이다. 수건도 이불도 깨끗하게 빨기만 해서, 원래의 색은 도망갔다. 부엌 용품들은 멋대가리 없이 크고 평범하다. 파트가 고장 나도 끝까지 버티면서 사용하는 편이다. 친구는 삼 년 전에 살던 곳을 훌훌 털고 따뜻한 이곳으로 이사 왔다. 쓰던 물건은 버리고 상자 12개만 들고 간 그녀의 용기와 결단력이 부러웠다. 그녀의 집은 현대에 어울리는 가구와 주방용품으로 꽉 차 있다. 갑자기 나의 물건들이 나의 고착된 삶을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한식을 그리워한다는 친구 남편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어갔다. 오늘 저녁 메뉴는 동파육이다. 오기 이틀 전에 삼겹살을 졸여서 진공 포장을 해서 얼렸다. 얼려온 동파육을 친구의 찜기에서 쪄냈다. 고기는 다시 부드러워졌다. 파와 고추와 양상추 채를 썰어서 접시에 같이 놓았다. 친구 남편은 식탁에 오른 푸짐한 음식을 보고 와인병을 서둘러 땄다. 네 사람은 와인 잔을 부딪치며 소리 높여 건배했다. 은근슬쩍, 평소에 하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혹은 남편에 대한 불평도 한 마디씩 튀어나왔다. 남쪽 나라의 열기 탓인지 친구와 같이 있다는 흥분 탓인지,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나는 문득 우리 부부가 오래된 물건처럼 살고 있지 않은지. 낡은 수건을 빨고 또 빨면서 살고 있지 않은지 의문이 들었다. 내 집 부엌에 버티고 있는 고장 난 프로세서도 생각났다. 포크를 끼우면 기계는 여전히 잘 돌아간다. 비록 흠집이 생기고 육중한 프로세서지만, 버리지 못한다. 아이들이, 손주들이, 지인들이 놀러 와서 수도 없이 앉았던 부엌이다. 그들이 재잘거리며 기다리는 동안, 가스레인지 위에서 손녀가 좋아하는 일본식 두부를 튀겨내기도 했다. 잘 씹지 못하는 육촌 시숙을 위하여 흐물거리는 해물잡탕을 만들기도 했다. 부엌 살림살이는 내가 수많은 음식을 만들도록 조수 노릇을 해주었다. 그들은 이제 나와 한 몸처럼 움직인다. 그들을 친정엄마만큼 의지하는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기계도 새것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원래의 빛나던 광택이 다 달아났지만, 오늘도 묵묵히 나를 지켜주고 있다.     남편들은 어느새 자러 들어갔다. 친구는 뉴욕에 두고 온 친구들을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뉴욕의 단풍이 그립다고 한다. “내년에는 네가 올라와. 단풍 구경하러” 나는 말했다. 우리는 졸면서도 늦도록 이야기했다. 밤사이 우웅 하는 바람 소리가 창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김미연 / 수필가살며 생각하며 고물상 친구 남편 부엌 살림살이 부엌 용품들

2024-11-19

[수필] 고물상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책장을 둘러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반세기 동안 우리 부부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해온 작업(?)이 있다면, 고물상을 차리고, 계속 고물을 더 얹어 온 것일 거다. 꾸준하게 제일 많이 쌓은 고물의 종목을 들으라면 책이 일등이다. 책은 고물이라 해도 귀한 것 중의 하나이다 보니, 버려지지 않고 함께한다. 젊었을 때 읽었던 고물이 된 책을 지금 다시 읽어 보기도 하지만, 사 놓고 미처 읽지 못한 고물 책은 미안한 마음으로 구분해 놓는다. 제 동료들이 모여 있는 바구니에 담기게 된다. 아이들이 쓰던 교과서도 버리지 못하고 우리와 함께 있다.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우리 부부의 책들이 타향살이 하는 것과 달리, 적어도 아이들이 쓰던 교과서들은 자기들만의 동네에 모여 지나고 있다.     불현듯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이를 찾아보는 날이 있다. 찾는데 너무나 시간이 걸린다. 정돈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을성이 없는 날은, 아마존을 통해서 사는 것이 더 편하고, 효과적일 것 같다는 생각으로 기운다.     지난주에도 읽고 싶었던 책을 찾지 못해서 안타까웠지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들이 몇 권 있었다. 골라서 소파 가까이 놓았다. 곧 읽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책들이 밀릴 판이 되었다. 한국어로 된 책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한인타운 내에 두 개가 있는데 그중에 붉은 벽돌 건물의 오래된 공립 도서관에 들렀다가, 흥미로워 보이는 한국어로 된 추리 소설을 빌려왔다. 마감일까지 읽고 돌려주어야 하므로 이 책부터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고물상에는 책 이외에도 아버지, 엄마, 남편, 친구 영로가 보내 준 편지들이 수백통 있다. 나를 떠나지 못한 편지들. 그중에는 잉크로 쓴 내 손편지들도 보인다.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해야 하겠다. 종이 사진이나 서류를 컴퓨터나 USB에 저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스캐너 기계를 2년 전에 구입해서 한참 동안 작업을 했었는데 지쳐서 중단하였다. 이 또한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누가 한글과 한문으로 쓴 낡은 나의 글들을 읽으랴?     고물…. 한자로 古物, 아니면 故物로 써야 하나? 나무위키에 의하면 古는 옛날 것, 오래된 것을 뜻하고 영어로는 과거형으로 생각하면 되고, 故는 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습관이나 전통을 포함하는 뜻이 내포된 것으로 영어로 말하자면 현재 완료형이라고 해석해 놓았다. 오래되어서 못 쓰게 된 물건들은 버려도 되는 고물(古物)이고, 오래되었어도 재활용이 가능하거나 가치나 의미가 있어 지니고 있어도 좋은 골동품이면 고물(故物)로 써야 하나 보다. 내 나름의 이해 방식이다.     아버지가 쓰시던 옥편 사전, 시아버님이 쓰시던 구식 현미경, 엄마가 사 주신 차이나 세트, 내가 욕심을 부리고 사들인 크고 작은 가구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새벽 5시라고 웨스트민스터 차임을 울리는 환자가 만들어 준 미니 괘종시계, 그리고 간호사 낸시가 나를 생각하며 고물상에서 샀다는 동양적 향기가 짙은 화려한 노란 찻잔….   이 고물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 서둘지 말고 내가 가르쳐 준 대로 한문자를 찾아보아라.-아버지 말씀   - 지금 너희들은 현미경 같은 것은 안 쓰지? 디지털인가 뭔가로 박테리아 균을 본다고?-시아버지 말씀   - 너는 버리는 것이 장끼이지….-엄마 말씀   - 왜 싼 것만 찾아다녔어요? 내 몸값은 싸다 해도 이렇게 잘 있어요.-필리피노 쓰레기 나무통의 말   - 선생님이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아직도 괘종시계를 갖고 계시다니!-갑상선 종양암에 걸렸던 청년 환자가 놀라며 한 말   - 고물상에서 본 이 찻잔은 진노랑 백그라운드에 보라색 꽃이 반대적인 조화를 이루어서 아름다웠어요. 동양적인 것은 대부분 그렇게 보여요. 모니카 선생님은 동양 여자이잖아요.-낸시는 올드타이머라서 그랬는지, 가오리 모양을 한 간호사 모자를 쓰는 것을 잊지 않았었다.   고물이 되어가는 우리의 육체, 정신이다. 나의 늙어 가는 몸이 땅에 묻혀 버려지는 고물(古物)이 될지,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서 쓰이는 고물(故物)이 될지 생각해 봐야겠다. 류 모니카 / 수필가·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수필 고물상 시아버지 말씀 아버지 엄마 엄마 말씀

202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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