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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고독은 운명

‘99, 88, 231’ 의 소망은 마법의 숫자인가? 듣는 귀가 즐겁다. 누구든지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동안 잠자듯이 육신을 벗고 훌훌 날아가 버리는 상상만으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부지런하게 육신과 두뇌를 훈련시키는 습성을 키우라는 조건이 붙긴 해도 의지력과 사지를 움직일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다. 노후의 삶은 열정이 원동력이다.   나에게 이 동기를 불러 일으킨 것은 쓰레기 줍기였다. 2년 동안 관심조차 없었던 쓰레기가 눈에 밟히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 되어 자전거와 롤러불레이드 타는 것도 그만두고 바닷가에서 쓰레기 줍는 청소부로 20년이 흘렀다. 쓰레기도 주으며 바다에서 혼자 즐기는 시간은 열정 그 이상이었다. 사유하며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찾고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외롭지만 참으로 이상적이었다.     취미라는게 이상적인 수준이 된다면 일종의 도가 텄다고 볼 수도 있다. 영혼과 육신에 넘치는 에너지로 충만케 하는 바다의 넉넉함은 나의 삶을 바꾸도록 만들었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자아 중심적인 삶에서 치유 가능한 삶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은총이었다.   협력하는 시간 보다 혼자 나아가는 시간이 많았던 것도 지나고 보면 누군가와의 여정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어쩌다가, 외로움으로 인하여 정신 건강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말인가? 외로움이 사람을 고립시키고 우울증을 만들어 끝내는 극단적 선택까지…. 사회적인 문제로서 정부가 손을 써야될 위기라고 한다.   정신 건강과 소셜 라이프의 관심사가 팬데믹 이후에 더욱 독보적인 물살을 타고 있다. 친교가 없는 삶을 마치 외로운 늑대로까지 보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요즘의 트렌드는 모이면 살고 흩어져 외톨이가 되면 문제있는 사람으로, 내몰리는 이 비정상적인 색안경을 어느 쪽에서 쓰고 있는지 궁금하다. 친교하는 사람들을 극히 정상이라 믿게 되는건 그렇게 보일뿐인 가시적인 현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누군가의 유행어를 비판없이 받아들인 결과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늘 바뀌는 먹걸이와 맛집 순례가 만남의 최대 관건이라 볼 때 만나고 헤어지는 일상의 반복이 만족스러워서만은 아닌 것 같다. 친교했던 시간을 되집퍼 보면 무슨 말을 했고 들었는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공허함에 외로움까지 군중속의 고독이 떠오른다.   그렇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다. 철학과 문학 예술의 출발점이기도 한 존재의 근원적인 접근으로서 대중성을 뛰어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지 않는가. 사색하며 가는 길에 만남의 인연이 있어도 좋겠지만 없다고 해서 문제답지 않은 문제에 휘말려 외로움을 정신병의 관문으로 취급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팬데믹 때문에 정신 건강이 악화 됬다고 믿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마다 잠재해 있던 문제와 사회적 시대적 물살에 성찰없이 살아온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쉽게 답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외로워서 쓰고 또 쓸 수 밖에 없는 나의 수필은 세상에 외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 공감의 관계를 무시하고 아우성치는 말잔치보다, 뻬곡히 써내려간 손편지 한 장과 수필 한 편을 쓰는 일은 나 자신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외로움과 고독한 시간을 자청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일이다.   팔팔한 장수세대에 들지 못한다 해도 삶의 끝자락에 편안히 당도하여 생명의 한계를 명료하게 맞이 하고 싶은 소망 만큼은 간직하고 싶다. 진정한 내적 자아로의 여행은 홀로 가는 길이라서 만남을 갈구하는데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 보다 너도 홀로 나도 홀로 그렇게 가는게 아닐까 싶다. 죽음을 직시하는 이 길을 피하도록 별의 별 수단을 다하여 유도하는 사회의 흐름을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은 비대면이 아니라 대면 해야 할 고독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최경애 / 수필가문예 마당 고독 운명 정신 건강 철학과 문학 소셜 라이프

2024-03-28

[건강 칼럼] 외로우면 심혈관 질환 늘어

태생적으로 인간은 세상에 홀로 고립되면 자연재해나 맹수의 위협을 극복하기 힘든 나약한 존재다.     인간에게는 다른 생명체가 범접할 수 없는 고유하고 탁월한 장점이 많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협동을 통해 ‘대규모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존하는 능력이다. 덕분에 사피엔스는 최상위 포식자들을 제압하고, 직립보행을 했던 여러 고대 인류 중 유일하게 눈부신 문화를 꽃피우며 건재하는 호모(Homo)속이 됐다.     마지막 빙하기에 인류와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은 사피엔스보다 강인한 체력과 근육질을 가진 뛰어난 사냥꾼이었다. 언어로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도구를 이용해 맹수를 사냥했다.   반면 사피엔스는 사회적 유대감이 뛰어나 수렵-채집 시대 때도,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도 자연스레 공동체를 만들 경우 구성원 숫자는 네안데르탈인의 열 배 이상인 150명 정도다.   인간은 공동체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낄 때 마음이 안정된다. 반면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고독감과 더불어 면역력 감소, 심혈관 질환 위험 증가, 사고력 감퇴 등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실제 실험 대상자에게 고립감을 느끼게 한 뒤 뇌 자기공명영상(MRI)을 촬영해 보면 신체적 통증이 있을 때와 동일한 부위에서 같은 반응이 나타난다. 외로울 때나, 몸이 아플 때나 당사자가 느끼는 고통은 매한가지인 셈이다.   외로움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통제력을 떨어뜨려 공격성을 띠게 한다. 문제는 선사시대 석기인과 달리 문명사회에 사는 현대인은 혼자 있더라도 맹수의 위협이나 자연재해를 직면해야 할 위험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홀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면 본능적으로 외롭고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과연 현대인이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감은 해롭기만 한 감정일까. 우선 고독감이나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 크게 느껴지고 여러 사람과 어울린 상황에서는 없어지는 감정이 아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의 지적처럼 특히 현대인은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내적인 고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반면 고독을 즐기면서 내면세계를 성숙시키려는 사람도 적지 않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고독을 통해서만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 바 있다. 종교계의 묵언 수행, 여름과 겨울에 세상과 단절된 채 수행에 전념하는 하안거, 동안거 등은 모두 고독을 찾아 떠나는 영성 여행인 셈이다.     똑같은 상황에 부닥쳐도 고독감을 느끼는 정도는 개인차가 크며 객관화시킬 방법도 없다. 자연 고독에 관해서는 오해가 많다. 영국의 BBC방송은 전 세계 5만5000명을 대상으로 외로움을 조사해 외로움을 가장 자주 느끼는 연령층은 노인이 아닌 청년층이라고 밝힌 바 있다(16~24세 40%, 75세 이상 27%). 또 외로움을 가장 많이 느끼는 계절도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이라고 답한 사람이 3분의 2 이상이었다. ‘고독’하면 상식처럼 떠올렸던 노인이나 추운 겨울 이미지는 상상 속 신화였던 셈이다.   개인주의가 심화하는 현대사회를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외로움과 고독이 수시로 찾아올 수 있다. 새해에는 좋은 친구와 우정을 가꾸는 것과 더불어 고독을 느낄 때마다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뒤 장기적으로 공존하면서 지낼 방법도 모색해 봐야 할 것 같다.  황세희 진료교수 / 한국 연세암병원 암지식정보센터건강 칼럼 심혈관 질환 심혈관 질환 자연 고독 질환 위험

2023-01-10

[삶의 뜨락에서] 원

해마다 이때가 오면 릴케의 ‘가을날’이란 시가 나를 부른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마지막 과일들을 영글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주시고,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송이 속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랫동안 외롭게 살아가면서 잠 못 이루어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하여 낙엽 뒹구는 가로수 길을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체코 프라하에서 출생한 독일 시인인 릴케는 고독하고 섬세한 시를 썼다.     ‘가을날’이란 시는 릴케가 1902년 파리에서 조각가 로댕의 비서로 일하면서 쓴 시이고, 그 당시 파리의 불안과 고독을 심층 있게 묘사하고 인간관계의 발전을 아름답게 서술한 ‘말테의 수기’를 발표하기도 했다. 릴케는 당시의 삶과 예술, 고독, 사랑의 문제로 고뇌하던 젊은 청년, 프란츠 카푸스에 보낸 열 통의 편지를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로 출간하였다. 가을 앓이를 심하게 하는 나는 이번에도 릴케를 읽던 중에 ‘넓어지는 원’을 처음 만났다.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릴케의 ‘넓어지는 원’ 시 전문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의 원으로 태어난다. 물을 마시며 햇빛을 먹고 우리는 그 원을 넓혀간다. 그리고 지식과 경험을 쌓고 사람과 교류하며 원을 키워간다. 원은 하늘에서는 바람을 타고 어디든 가고 바다에서는 파문을 일으키며 서로 만난다. 그렇게 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행하고 항해한다. 가끔 우연히 정말 우연히 파문을 일으키며 지나치는 원 중에 누군가의 생의 뒤축을 흔드는 원이 되는 행운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큰 행운도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그저 조용한 파문으로 소멸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원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 원은 끊임없이 커지고 강해지거나 작아지고 약해지기도 한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물갈이가 필요하기도 하다. 나이에 비례해 그 원이 커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만과 편견으로 좁아지는 경우가 더 많다.     삶이란 자체가 공식이 없고 예측할 수가 없다. 끝없는 선택의 과정이고 변수에 가려져 있다. 그 변수 중의 하나가 시너지 효과다.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 타인의 원과 교집합을 이룰 때 단단해지고 강해진다. 반대로 다른 원을 만나 실망하고 좌절하면서 원이 부서지면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와 훨훨 날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더 높이 더 멀리 볼 수 있는 갈매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지만 우리 하나하나가 살아가는 삶은 정말 다채롭다. 얼굴, 몸매, 옷차림, 환경, 관심, 취미, 생각, 가치관은 한 인간을 개성 있게 만들고 이 개성이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그 ‘다름’이 우리의 원을 크고 넓게 키워주는 주는 원동력이 된다.     날마다 환자가 죽어가는 중환자실에서 30년 이상을 견뎌온 힘은 무엇인가. 너무 처절하고 안타깝고 비참하고 허무한 삶의 끝자락을 보며 나는 많이 생각하고 배운다. 어둡고 칙칙한 것은 싫다. 밝고 산뜻한 것이 좋다. 항상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보려고 노력한다. 감동할 수 있는 일은 주위에 널려있다. 세상에는 예찬할 것들이 너무 많다. 숨소리, 바람 소리, 너의 체온, 나의 행복, 또 함께한 행복, 너와 나의 관계, 이 모두 감동이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예술 고독 생각 가치관 체코 프라하

202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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