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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간 바이든 경호원 한국인 폭행으로 송환

조 바이든 대통령의 경호 업무 관련 직원 2명이 한국 시민을 폭행한 혐의로 한국 경찰에 입건돼 조사를 받았다.   이들 두 명은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에 앞서 서울에 도착했으며, 한 명은 특별요원이고 다른 한 명은 경호 요원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19일(한국시간) 밤 술집을 돌아다니며 ‘바 호핑’을 한 뒤 숙소인 하얏트 호텔로 돌아오는 과정에 택시를 기다리던 한국 남성과 시비가 벌어졌고 폭행으로 이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한국 경찰에 연행돼 조사받은 뒤 본국 송환이 결정됐으며, 바이든 대통령의 한국 도착 1시간 반 전인 20일 오후 4시께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CBS는 전했다.   CBS 방송은 20일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를 인용해 문제를 일으킨 비밀경호국(SS) 직원 2명이 미국으로 송환됐으며 이들은 업무에서 배제된 상태라고 보도했다. 당국은 이들이 한국 경찰 조사 당시 보인 행동 등을 근거로 마약 복용 가능성을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경호 업무를 담당하는 SS 소속 직원은 업무 시작 10시간 전부터 음주를 금하고 있다. 이는 미국 내는 물론 해외 근무에서도 모두 적용된다.   앤서니 굴리에미 SS 공보실장은 “SS는 해당 사건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며 이는 잠재적으로 지침 위반일 수 있다”며 “해당인들은 복귀한 뒤 휴직 조치될 것이며, 이로 인한 순방 일정의 차질은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인사에 대한 경호 업무를 담당하는 SS는 국토안보부 소속으로 편제돼 있다.한국 경호원 한국 경찰 한국 도착 한국 시민

2022-05-20

케네디가 직접 발탁한 첫 흑인 경호원 58년만에 사면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단행한 특별사면 대상에 미국 대통령 경호를 담당하는 비밀경호국(SS)의 첫 흑인 요원 에이브러햄 볼든(87)이 포함됐다.   현재 시카고에 거주하는 볼든은 사면 발표 하루만인 27일 언론 인터뷰를 통해 1961년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비밀경호국 요원으로 전격 발탁된 일화와 케네디 암살 전•후 비밀경호국 내부 분위기, 기소 후 58년간 멈추지 않은 명예 회복 노력 등에 대해 털어놓았다.   볼든은 케네디 전 대통령이 암살된 지 1년 만인 지난 1964년 비밀경호국 문건을 범죄 집단에 팔아넘기려 한 혐의로 기소됐고 재심까지 간 끝에 유죄판결을 받아 3년여간 복역했다.   그는 당시 비밀경호국 내부의 해이한 분위기를 지적하고 동료들의 인종차별적 언행에 반발하는 목소리를 냈다가 미움을 사 기소된 것이라며 평생 무죄를 주장해왔다.   시카고 남부 토박이 볼든은 26세 때인 1961년 4월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정치행사를 위해 찾은 시카고 맥코믹플레이스에서 임시 대통령 전용 화장실 보안 경비를 맡았다가 케네디 눈에 띄게 됐다.   볼든은 "대통령이 나를 보고 화장실 문 앞에 멈춰서서 '백악관 경호실에 흑인 요원이 있었나'라고 묻길래 '없는 걸로 안다'고 답했더니 '최초의 흑인 비밀경호 요원이 되겠냐'며 채용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두 달 후 볼든은 들뜬 마음으로 워싱턴DC에 도착, 비밀경호국에 합류했다. 그는 케네디 가족이 자주 찾던 매사추세츠주 하이애니스 포트에서 케네디 전 대통령이 자신을 아들처럼 대해준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 가 현실을 깨달았다.   그는 "동료들이 인종적 욕설을 하며 차별했고 대통령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더욱 괴롭혔다"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케네디 (전) 대통령은 미국의 화합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동시에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며 "암살당할까 두려워했다"고 전했다.   볼든은 당시 대통령 경호가 느슨한 데 충격을 받았다면서 "근무 중에 술을 마시고 여성들을 탐닉하고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요원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상사에게 보고했다가 외려 표적이 됐다"고 밝혔다.   그는 "목숨 바쳐 대통령을 지키겠다 맹세했고 그 과정에서 내 정신력도 강화됐다"며 "덕분에 수감 중에도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공부하고 기도하며 마음을 다졌다"고 말했다.   볼든은 1963년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 구성된 '워런 위원회' 측과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갑자기 시카고로 호송돼 1964년 위조범죄 집단 두목에게 5만 달러(약 6천300만 원)를 요구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케네디 암살 사건의 여파로 나에 대한 기소가 이뤄졌다"며 2차례 재판 끝에 1966년 6년 형을 받고 수감, 3년 3개월 복역 후 가석방됐다고 밝혔다.   볼든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사면 청원을 했으나 거절됐고 이후로도 백악관은 줄곧 침묵했다.   볼든은 계속 시키고에 살면서 자동차 품질 관리 감독자로 일하다 2001년 은퇴했다. 그는 부인의 권유로 회고록을 쓰기 시작해 2008년 '딜리 플라자(케네디 암살 장소)의 메아리'를 출간했다.   볼든은 바이든 대통령이 78명의 첫 사면•감형자 명단에 자신을 포함해 준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암울했던 시절, 힘과 용기와 의지를 보여준 가족들에게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결백을 입증받으려는 노력이 번번이 실패로 끝났으나 60년 만에 결국 승리했다. 나의 사면이 정의를 위해 싸우고 진실의 편에 서려는 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시카고=연합뉴스 김 현 기자케네디 경호원 케네디 대통령 케네디 암살 케네디 가족

2022-04-28

[OC] 이승만 전 대통령 경호원 박용균씨의 '영원한 각하' <3>

대통령 경호에 구멍이 뚫린 적도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이 경무대 인근 산책을 나가면 경무대 외곽 4개 초소 병력이 효자동 일대 거리의 일반인 출입을 통제했다. "어느 날 각하가 산책을 하시는데 신문배달 소년 하나가 통제선 안으로 들어간 거야. 큰 일이 난 거지. 각하께서 '넌 누구냐'고 하시는 데 아차 싶더라고. 각하께서 소년을 불러 이것저것 물어 보셨는데 사정이 참 딱한 거야. 부친이 병들어 신문을 돌리며 고학하는 불쌍한 아이였지." 아이를 돌려 보낸 이 대통령은 박용균(사진) 수행원에게 "저 아이 집에 가 보라"고 지시했다. "산 꼭대기 달동네에 사는 데 가 보니 참 기가 막혀. 우리도 다 못 살았지만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거야. 아버지는 이불 깔고 누워 있고 다 허물어져 가는 손바닥 만한 방에서…." 당시를 회상하던 박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갈라지더니 이내 눈자위까지 붉어진다. "나도 마음이 너무 안 돼 돌아오자 마자 보고를 드렸지.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문교부 장관을 부르시더니 '이 아이가 대학을 나올 때 까지 학비를 모두 면제시켜 줘라'고 하시는 거야." 이 전 대통령이 하와이로 떠난 뒤 경무대를 나온 박씨는 미 8군내 728 경찰파견대에 근무하다 미 8군 체육관 유도 사범이 됐다. 이후 미 부산기지사령부에서도 유도를 가르친 박씨는 1979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박씨는 LA재미유도회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세탁소를 경영했다. 유도 9단인 박씨는 지금도 하루 3시간 이상 운동을 할 정도로 건강하다. 그는 꾸준한 운동 덕분에 췌장암을 극복했다고 믿는다. 박씨는 2003년 췌장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췌장암은 예후가 좋지 않아 암 중에서도 특히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이런 췌장암도 박씨는 쉽게 극복했다. "운이 좋았어. 늦지 않게 발견해 수술했거든. 아마 꾸준히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벌써 저 세상으로 갔을 걸." 대통령 경호원 출신답게 날카로운 박씨의 눈매는 이 전 대통령과의 추억을 말할 때 마다 누그러지곤 했다. 인터뷰 내내 이 전 대통령을 '각하'라 부른 박씨는 자유당 말기의 정치적 난맥상에 대해 "각하보다는 주위에서 보필한 이들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 주역으로 4선 대통령을 지냈지만 이역만리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이승만 전 대통령. 세인들의 평가와 관계없이 그는 박씨에겐 '영원한 각하'일 뿐이었다. 임상환 기자 limsh@koreadaily.com

2009-07-17

[OC] 이승만 전 대통령 경호원 박용균씨의 '영원한 각하' <2>

박용균씨(사진)가 기억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은 소탈하고 자상한 성격이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도 당시의 가부장적 분위기와는 달리 다감한 남편이었다고 한다. 여사도 이 대통령의 내조에 최선을 다 했다. "각하가 거의 매일 뒷산으로 산책을 나가셨는데 영부인은 규칙적인 식사를 굉장히 강조했어. 하산이 늦으면 영부인이 직접 무전을 쳐. 아직 산에 계시다고 하면 한달음에 뛰어올라와 각하를 부축하고 내려가. 그러면 각하도 아무 소리 없이 따라 내려가셨지." 수행원들의 실수로 대통령의 점심 도시락이 없어진 적도 있었다. "강원도 인제의 군 장교 휴양소에 각하와 헬기를 타고 간 일이 있어. 미군들이 쓰는 아이스박스 있잖아. 거기에 각하가 드실 점심식사를 넣어 왔는데 바쁘다 보니 갖고 내리는 걸 잊었어. 도시락이 없어진 걸 알았을 땐 헬기가 이미 떠난 뒤였지." 수행원들 모두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누군가 어렵게 입을 뗏다. "저... 각하. 도시락을 못 꺼냈습니다." 각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뭐 다 같이 먹으면 되지"라고 짧게 한 마디 했다. 휴양소 식당에 자리잡은 이 대통령은 사병 수행원들과 똑같이 군대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반찬이라곤 콩나물과 새우젓 조금 깍두기 약간 뿐이었어. 그 때가 워낙 어려웠잖아. 그런데도 맛있게 드시니까 우리가 민망해 밥을 못 먹겠더라고." 박씨는 진해 별장에서 이 대통령의 세심한 성격을 알게 됐다. 나무를 좋아한 이 대통령을 위해 수행원들은 별장 나무의 가지를 쳐내는 일도 했다. "장대에 낫을 묶어 나무를 찍은 다음 흔들어. 그럼 가지들이 떨어지거든. 안 떨어지는 가지들은 낫을 굵은 가지에 찍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쳐 내곤 했지." 그리 굵지 않은 가지에 낫을 찍은 박씨는 나무에 오르던 중 낫이 빠지는 통에 추락했다. 타고 난 운동신경을 발휘 순간적으로 몸을 뒤틀며 나무에 매달려 간신히 부상은 면했지만 팔은 온통 피칠갑을 했다. 박씨는 '각하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에 저만치 서 있는 각하에게 등을 돌린 채 서둘러 상처를 씻으러 갔다. 이튿날 새벽 뒷문 경비를 위해 쳐 놓은 '설렁줄'을 걷던 박씨는 이른 시간임에도 밖에 나와 있던 각하와 마주쳤다. "옛날에 경보기가 있어 사람이 많기를 해. 전화선에 깡통을 매달아 건물 주위에 빙 둘러치는 거야. 누가 몰래 들어오다 줄을 건드리면 깡통 소리가 나잖아. 깡통 경보기지. 허허. 그걸 설렁줄이라고 해." 각하는 박씨에게 대뜸 "병원은 다녀 왔는가"하고 물었다. "어제 내가 떨어지며 다친 걸 보신 거야. '안 갔는데 괜찮습니다'고 했지." 각하는 "다녀 와라. 젊어 다친 게 나이 들면 다 아프다"고 말했다. "아 정말 자상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정말 괜찮지만 각하 지시니까 어떻게 해 따라야지. 그래서 해군병원에 갔다 와서 '다녀왔는데 괜찮습니다'라고 말씀드렸지." 범접할 수 없는 먼 존재로만 여겨지던 이 대통령이 엄하지만 정 많은 고향의 할아버지처럼 박 수행원의 가슴 속에 각인된 순간이었다. 임상환 기자 limsh@koreadaily.com

2009-07-16

[OC] 이승만 전 대통령 경호원 박용균씨의 '영원한 각하' <1>

이날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별세한 날이다. 박씨는 1958년 8월부터 이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떠난 1960년 4월까지 18개월간 그의 경호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 대통령이 박씨에게 ‘영원한 각하’로 각인되기엔 충분할 만큼의 시간이었다. 격동의 시절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과 함께 청춘을 보낸 박씨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1960년 4월29일. 이날은 박씨가 이 전 대통령을 상면한 마지막 날이다. 4.19를 계기로 하야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날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이 전 대통령의 수행원(당시는 경호원을 수행원이라고 불렀음)이었던 박씨는 떠나는 '각하'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각하와 함께 하와이로 떠나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직속상관인 김창근 계장이 '사복으로 갈아입으라'고 지시하는 거야. 사복이 없어서 동료 곽영서 수행원의 옷을 빌려 입었지. 내가 영어가 된다는 이유로 하와이까지 동행하란 지시였어." 언제 돌아오라는 지시도 받지 못한 채 박씨는 각하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엔 각하 내외 외에 4명쯤이 더 타고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각하가 입을 뗏다. "젊은이들은 남아 한국을 부흥시켜야 한다. 다들 내려라." 숙연한 침묵 속에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비행기엔 승무원과 이 대통령 내외만이 남았다. 박 수행원은 이륙한 비행기가 수평선 멀리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응시했다. "마음이 참 아프더라고. 그렇게 끝까지 한국을 위하셨는데 결국 이역만리 하와이에서 별세하셨잖아." 박씨가 이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매개는 '유도'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유도를 배운 박씨는 국제대에 유도선수로 진학했다. 실력이 출중했던 박씨는 1956년 경무대(후일의 청와대 구관)내 상무관에서 유도와 검도를 수련하게 됐다. "그 때는 경무대 경찰서의 수행계 소속 경찰들이 대통령 경호를 맡았어. 난 경비계에 속해 경무대 안내 역할을 맡았고. 경무대 경찰들이 상무관에서 운동을 하다 대회가 있으면 상무관 소속으로 출전하는 거야." 박씨는 1958년 수행원이 됐다. 그 해 박씨는 전국대회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소속팀 상무관은 단체전 준우승에 머물렀다. 당시 이 전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박씨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대통령 수행원 임무는 녹록치 않았다. 시설 장비가 모두 변변치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당시의 열악한 상황은 대통령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각하가 진해의 별장에서 지신도란 섬으로 낚시를 가면 말야. 인천항에 정박중인 미 8군 사령관 보트를 빌려 탔어. 아마. 지금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그 땐 그랬어." 임상환 기자

200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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