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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삶]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시인의 ‘옛 노트에서’부분       앵두나무는 장미목과의 낙엽 활엽관목으로 분홍색 혹은 흰색의 꽃이 피고 열매는 오뉴월 익는다. 앵두꽃의 꽃말은 ‘수줍음’이다. 가지에 빨간색 열매가 오종종히 달린다. 예전에는 울 밑에나 우물가 옆에 흔하던 나무인데 우물도 사라지고 울 밑도 귀해져서인지 요즘은 전보다 만나기 쉽지 않다.   아파트 현관 옆에 앵두가 익어가고 있다. 젊은 여자 둘이 깨금발을 하고 앵두를 몇 알 따서 손바닥 위에 놓고 즐겁게 재잘거린다. 한 알을 입에 물더니 “앵두가 익을 무렵 뭐 그런 시가 있잖아.” 한 여자가 말하자 “맞아, 맞아, 찾아보자”하며 얼른 휴대폰을 켜 검색을 한다.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고 있다고 하는데 둘 사이가 한 편의 시 같다.   그 모습이 친근하고 정겨워 나도 앵두 몇 알을 따서 입 안에 넣어본다. 시의 힘이란 놀랍다. 시가 준 이미지의 확장은 사물의 본체까지도 확장해 놓는다. 앵두는 맛으로 음미하기보다 그리움으로 느껴야 제맛을 알게 되는 듯 생각되니 말이다. 이 시가 발표된 지도 꽤 오래전인데 여전히 앵두를 보면 맘이 아리다.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란 구절에서 울컥해지던 사십 대가 스멀스멀 몰려온다.     누구나 리즈시절이라고 할 만한 생의 한때가 있었다. 황금기는 못되었을지라도 젊음의 피가 원활하게 돌던 때는 무수한 빛들에 휘감겼다. 무한 상속되어 허투루 써도 되는 것 같아 낭비인 줄도 모르고 써대던 시간이나 마음의 뒤란에서 수런거리며 부유하던 열망이 솟구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을 보내고 그리움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때, 아무렇지도 않은 때가 앵두가 익을 무렵이라니.     미래라는 아득한 헛것에 취해 무작정 걷던 길 위에서 마주치던 인연들, 그것은 사람이 되었건 장소가 되었건 다 그리움으로 남아 갈대처럼 서걱댄다. 시간을 견딘다는 말에는 쓸쓸한 권태가 남아 있지만 그 견딤의 시간 안에는 ‘간신히’라는 다행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기도 하다.   그렇게 간신히 너를 잊고, 그 시간을 잊고, 그 장소를 잊을 수 있게 될 무렵이 앵두가 익을 무렵이더라는 시인의 성찰은 눈부시면서도 측은하다. 그리움이란 어딘가에서 발원하여 어딘가로 흘러간 흔적들, 남겨진 날들에 볼모로 남아 줄기차게 가슴을 훑는 후폭풍이지만 살아온 날들이, 살아온 날들만이 남길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다.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기를 보낸 곳에는 그 과정이 떨 군 먼지조차도 다 그리움으로 남는다. 더군다나 오랜 타국생활로 그리움에 중독되어 있다 돌아와 보면 낯익음 속에 깃든 낯섦도 별나고 반갑다. 고향에서는 좀체 저항할 수 없는 지존 앞에서처럼 몸이 낮아지기도 한다.   유채꽃이 진 자리 옆으로 피어나기 시작하는 코스모스, 자두가 익어가는 과수원 길, 한옥 흙 마당 싸리비질 자국, 초등학교 앞 문방구, 쓰던 가전제품을 산다는 한낮의 소음까지도 다 그리움의 프레임 안으로 모여들어 숨을 고르게 된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앵두가 남아 갈대 장석남 시인 빨간색 열매

2023-06-20

[이 아침에] 갈대는 흔들리며 어울려 산다

갈대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한 해만 자랐다가 죽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목을꺾고 칼로 베고 갈아엎어도 봄이 오면 다시 자란다. 연못 가장자리, 도랑, 하천가, 강가 등 습하며 양지바른 곳에 자라는데 뿌리줄기로 뻗어가며 큰 군락을 이룬다. 자주색 꽃이삭이 9월이면 줄기 끝에 원뿔 모양의 꽃차례를 만든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바람 부는 언덕에서, 어두운 물가에서/ 어깨를 비비며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마른 산골에서는 밤마다 늑대들 울어도/ 쓰러졌다가도 같이 일어나 먼지를 터는 것이’-마종기 ‘밤노래4’ 중에서   오하이오주 톨리도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마종기 시인은 외롭게 죽은 친구의 기일이 오면 4시간을 운전해 내가 사는 도시 공원묘지를 다녀가셨다.     근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철학자, 계산기의 발명자인 파스칼은 그의 유고집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을 남긴다. 브레즈 파스칼은 어려서부터 수학의 신동으로 불리며 특출한 재능을 드러냈다. 기하학을 배우지 못했지만 12살 때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사실을 자력으로 발견하고 13살 때 파스칼의 ‘삼각형 원리’를 정립한다.  39세에 요절할 때까지 그때그때 기억하는 사건과 연관되는 단상들을 기록한 ‘팡세’는 그가 세상을 떠난지 7년 만에 발간되는데 인간 이성의 한계와 불완전성을 지적한다. 이성의 마지막 단계는 그것을 넘어서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를 깨닫지 못하면 저급하다고 설명한다. 사람들 사이에 불평등이 있어야 하는 것은 진실이지만 일단 이 사실이 승인되면 최선의 정치를 향해서가 아니라 최악의 압제를 향해서 개방된다고 설파한다.     학교 다닐 때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하고많은 일 중에 왜 하필이면 곱하기 더하기 빼기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수학이 돈이 된다고 가르쳤으면 정신을 차렸을지도 모른다. 미술을 공부하고 화랑을 경영하며 황금비율과 원근법, 소실점과 구도의 공간개념을 공부하며 수학에 대한 경외감이 생겨났다. 무용지물이던 ‘숫자’는 사업을 하면서 ‘돈’이 된다는 실용적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한 분야에 뛰어난 위대한 사람은 인간의 삶을 고찰하는 철학자의 고뇌를 지니게 된다. 자신이 추구한 학문이나 성취를 바탕으로 독단과 편견을 넘어 인간성의 보편타당한 이성을 구축하는 해법을 찾아낸다.     가방끈이 긴 사람, 아는 것이 많은 사람보다는 못 배워도 한 곳에 몰입해 골몰하는 사람은 인생의 깊은 굴곡을 관통하는 생의 의미를 깨닫는다. 갈대처럼 흔들려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자신이 처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돌파구를 향해 돌진하는 사람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철학자다.     ‘철학’(philosophy)은 고대 그리스어 필레인(사랑하다)과 소피아(지혜)가 합쳐서 된 단어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파스칼이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로 인식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상통한다.   사는 것이 부대끼고 갈대처럼 속이 비고 흔들려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몸을 비비며 어울려 살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기희 / Q7 Fine Art 대표, 작가이 아침에 갈대 물리학자 철학자 삼각형 원리 삼각형 내각

2022-08-03

[수필] 연약한 갈대, 강한 갈대

"시간·공간의 한계   인간의 사고 넘어서 오직 한번 뿐인 삶 근본적 문제 생각도"     파스칼은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생각하며 살아가고, 또 생각하고 연구함으로써 창의력을 발휘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 인간에겐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때(시대)와 장소(나라)와 혈연(부모, 인종)을 선택할 수가 없고, 또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지적능력(IQ, 소질)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자기가 이를 선택 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조건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의 존재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가장 연약한 갈대가 될 수도 있고, 또는 가장 강한 갈대, 혹은 가장 위대한 갈대가 될 수도 있다.     무게가 400톤이 넘는 B-747 점보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서는 속도가 시속 300km 이상이 되어야 한다. 또 미국의 유명한 인디 500(Indianapolis-500) 자동차 경주장에서 매년 5월 말에 4km(2.5mile)의 타원형 경기장을 200바퀴(500mile)나 도는 경기의 자동차 속도 또한 시속 300km나 되며, 그 속도를 느끼고 즐기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 든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총알보다 30배나 빠른 시속 10만7460km의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왜 속도 감각이나 움직임을 전혀 못 느낄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의 이 공전 속도에 더하여, 지구 적도상의 자전 속도 또한 시속 1600Km나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쉽게 느끼며 보고 있는 시간과 공간, 또 보이지 않는 속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이나 그것의 한계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고, 그 기본적인 현상의 일부분만 겨우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빛의 속도로 10만 년을 가도 끝이 없는 이 우주는 너무도 광대무변하다.  인간의 ‘생각’에도 영역과 한계가 있다고나 할까. 결국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는 인간 사고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할 수 밖에는 없다.     또한 인간의 약점은 한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고, 또 오직 한 번 밖에 살 수가 없는 외줄타기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조금의 여유를 일부러 만들어 내서라도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생각도 좀 해 보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생각하는 갈대”가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파스칼은 “논리적 합리성으로는 신(혹은 종교)의 존재를 거부하기에도 혹은 인정하기에도 어려운 점이 있다. 양쪽 모두가 상당한 합리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가 이성으로는 어느 쪽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 파스칼은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운명을 걸어야 하는가?” 라고 도전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신이 존재하는 쪽에 건다면 비록 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둘째, 그러나 우리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에 운명을 걸었는데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때는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고 하였다.     독일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단순한 바보이지만,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범죄다.”라고 하였다(Those who don’t know the Truth are Dummies, but those who knows the Truth, and call it a lie are Criminals).     우리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 인간이 평생 고민하여야 할 문제가 이닐 수 없다.   이창수 / 수필가수필 갈대 자동차 속도 자전 속도 공전 속도

202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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