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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겨울과 봄의 간극

마음을 알 수 없어 서성거렸습니다 / 보내주자, 보내 드리자 / 누가 이 마음을 주었는지 울고 말았습니다 // 보내주기로 한 마음은 싫어서가 아닙니다 / 차오르는 강물을 건널 수 없기에 / 봄빛이 오는 파란 하늘에 풀어주려합니다 // 번져오는 노을 빛으로 달려가도 / 함께 바라보자던 노을은 별빛에 지고 / 풀벌레 소리로 남겨진 봄 밤 / 그림자마저 지쳐 하루가 저뭅니다 // 보내지 못했습니다 / 모래가 쓸리는 수정체 속으로 / 신발 위를 걸어온 가느다란 길이 보입니다 / 그 길은 드러날 길을 길게 밀고 갑니다 / 언덕을 넘는 사람과 강을 건넌 사람이 만나 / 달빛아래 휘영청 머리를 감습니다 // 늦은 밤 때 아닌 눈이 산처럼 내리고 / 지나치려다 다시 만나게 되는 / 떠나오면서 돌아가야 할 기억하나 저며옵니다     봄이 온다 해서 창가에 앉아 있습니다. 아지랑이 피는 이른 새벽에 점퍼와 모자를 눌러 쓰고 집 앞 언덕을 오릅니다. 가슴 저몄던 지난 날들이 떠올라 눈을 감아 봅니다. 물이 흐르듯이 흘러 가는 기억의 저편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습니다. 생각과 표정과 풍경들이 만들어낸 그림들을 넘겨 보면서 많은 감회가 몰려옵니다. 늘 그 자리에서 공허했던 마음을 채워주었던 따뜻한 손길을 기억합니다. 푸른 소나무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과 배려와 사랑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합니다만 이제 가슴 벅찬 순간들을 내려 놓으려 합니다. 아직 피어난 꽃도 연둣빛 이파리도 보이지 않지만 나무 가지마다 움트는 꽃눈들은 꽃보다 봄보다 신비합니다. 꽃병에 한 아름 담겨진 당신 마음 같습니다. 그 마음을 이제 멀리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가서면 멀어지려 하는 봄 같은 당신은 누구이옵니까?   시카고의 봄은 아직 멀었습니다. 여기저기 벚꽃이 피고 목련이 피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와중에도 한 밤중 때 아닌 눈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다시 겨울입니다. 가지 않으려는 겨울과 오려 하는 봄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른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보이는 간극보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간극으로 인한 서로에게 향한 그리움은 또 얼마나 오래 갈른지요. 그리움이 아픔이 되고 더는 고통이 몰려오지 않도록 그 안에 있지 않으려합니다. 붙잡지 말고 내려놓으려 합니다. 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걷고, 목소리도 낮추어 이제 얽매이지 않고 자유할 수 있도록 훨훨 날아 오를 수 있도록 보내드리자.     사순절 둘째 주를 지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Higgins Park에 들렸습니다. 이른 아침인데 걷고, 뛰는 사람들의 모습에 생기가 돕니다. 나무숲을 지나 호수를 지나 작은 나무다리를 걸었습니다. 옆을 지나치며 사람들이 건네는 인사에 맑은 새벽이 전해옵니다. 손을 들어 “ Hi! Good morning!” 화답합니다.   속이 텅 빈 고목이 쓰러져 있습니다. 족히 두 아름이나 될 법한 큰 나무가 제 삶을 다 한듯합니다. 아마도 수 백년 이 자리를 지키며 바람과 하늘을 어루만졌을겁니다. 한 겨울 눈송이를 짊어지고 견디어내다 봄바람에 셀 수 없이 까마득한 이파리를 피워냈을 고목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럴 것입니다. 이렇게 겨울과 봄의 간극을 뒤척이다가 홀로 늦은 봄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기에 보내드려야 합니다. 아직 이라면 그 몫은 내가 품고 가야합니다. 끝까지 견딜 수 없어 삶의 아름다운 꽃밭으로 남는다면 삶의 끝자락에서 흙이 되고 그리움이 되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무명으로 뿌려지겠습니다.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겨울 간극 겨울 눈송이 당신 마음 연둣빛 이파리

2023-03-13

[하루를 열며] 간극(間隙)

 학교가 파할 시간, 아이들을 데리러 온 학부모들이 학교 앞에 가득하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나와 자기 아이를 부르는 학부모의 손짓을 따라 아이들을 내어주고 있다. 매일 인사를 주고받던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오늘은 손자를 데리러 할아버지가 오신 것 같다. 집까지 걸어서 4~5분밖에 안 되는 거리를 후줄근한 할아버지라도 와야 집에 보내주는 미국 초등학교.   놀이터 앞에서 아이는 놀고 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지만 할아버지는 한 마디로 ‘노’라고 자른다. 어제는 할머니가 데리러 와서 놀이터에서 잠시 놀 수 있었는데 할아버지에겐 통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평생 학교 선생님으로 은퇴하신 노인은 영 융통성이 없어 아이는 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아이 할머니에게서 들었다.   할아버지 내외는 일하는 아들 내외를 도우러 미국에 오신지 얼마 안 되었다. 집이 바로 학교 옆인데 학부모가 꼭 와야 아이가 집에 갈 수 있는…. 할아버지의 심기도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아이의 걸음이 무겁게 칙칙 끌린다. “신발 끌지 마라!” “왜요?” “신발 닳는다!” 나도 내 손자를 데리고 뒤따르며 들은 그들의 대화에 귀가 번쩍 열린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 ‘신발 닳는다’ 반갑기까지 하다. 나는 풋! 하고 터지려던 웃음을 얼른 숨겼다. 곧이어, 귓가에 내 어머니의 고함이 따라나섰다.     ‘넌 발모가지에 칼이 달렸냐? 운동화 사준지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찢어먹냐?’ 어머니의 역정이 있을 때마다 나는 진짜 내 발이 이상하게 생긴 것인지 심각하게 내 발을 살펴보곤 했다. 어제 학교 파하고 아이들과 고무줄놀이를 많이 하여 망가졌나보다 하는 가책도 들어 뜨끔하기도 했다.     한 시간여, 야산 길을 걸어 통학하던 초등학생 어린 내 발. 밭 사이 풀벌레들과 함께 뛰던 구부러진 산길. 띄엄띄엄 작은 마을 여럿 지나, 장마에 패인 고갯마루 올라서면 그제야 보이던 녹번 삼거리 저 아래 초등학교. 하굣길에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내 키만 하게 자라던 고추밭, 깨밭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던 길. 온갖 풀꽃들이 돋아나던 그 좁은 길이 아련히 떠오른다. 집에 오면 검정 고무신으로 갈아신는데도 내 운동화는 앞 밑창이 빨리 헐떡거리곤 했다.   나는 저 할아버지와 거의 동시대를 지나온 사람으로 충분히 할아버지가 이해된다. 그러나 그의 어린 손자는 어찌 알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지금이 아무리 풍요롭다 해도 당신의 궁핍하던 시절을 여전히 쉽게 지우지 못하는 노인의 눈에는 아까운 것을 모르는 지금의 아이들이 못마땅하리라.     남은 음식을 주저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는 내 아이들을 보면서 나도 저 할아버지 같은 마음이었다. 아까운 마음에 나도 여러 번 잔소리도 해봤지만 여기서 태어나서 미국문화 속에 자란 아이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먹는 음식 접시에 다른 이의 수저가 닿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이 이곳의 식사 예절이란다. 큰 그릇에 비빈 밥을 둘러앉아 숟가락 부딪히며 먹던 그때가 따뜻했고 그리워지는 것은 이제 배부른 까닭일 것이다.   땅 밟을 일 거의 없고, 걸어 다닐 일 별로 없는 요즘 세상에 신발 닳을 걱정하는 할아버지…, 꼰대 같은 할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이….   그 멀고 긴 간극이 내 눈에는 훤히 다 보이던 날이었다. 이경애 / 수필가하루를 열며 간극 할아버지 내외 아래 초등학교 평생 학교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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