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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뜨락에서

지금 창밖으로 순백의 세상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편안하고 행복하다.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이토록 아름다운 설경을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한다. 밤에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지운다. 지금도 눈은 흩날리고 바람이 스쳐 간 자리에 사물은 본래의 모습을 들킨 듯 수줍게 희끗희끗 그 자태를 드러낸다.  
 
올해는 유난히도 눈이 자주 온다. 오늘처럼 고요한 날에는 눈이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걸어온다. 눈의 역사도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지 않을까. 눈도 자세히 보면 그 결정체가 다 다르다. 이처럼 제각각인 한 송이 한 송이가 각자 다른 사연을 갖고 밤을 지새워 아름다운 설국을 지은 것이다. 눈은 옛날에도 내렸고 지금도 내린다. 물이 순환하듯 눈도 자연스럽게 순환하니 예전에 나에게 내렸던 눈이 오늘 나에게 내리는 것은 아닌지 내 눈과 귀를 활짝 얼어놓고 기다려보아야겠다.  
 
어렸을 적에는 무조건 눈이 좋았다. 아주 어렸을 적 아마 8~9살 정도였을까. 남자애들 못지않게 활발했던 나는 눈만 오면 신발 밑에 긴 대나무를 붙들어 매고 스키 타는 흉내를 내며 동네를 활개 치고 돌아다녔었다. 그 덕택에 내 볼은 추위에 얼어 터져 늘 쓰라렸던 추억이 있다. 여고 2학년 때 불어 선생님을 혼자 흠모했던 적이 있었다. 수줍게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놓고 혼자 설렘을 감추지 못한 채 바람맞은 적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불어의 매력에 푹 빠져 불어와 불어 선생을 한 동체로 생각했던 것 같다.  
 
또 다른 예쁜 추억 하나는 여고 3학년 12월, 한창 도서관에서 입시 공부로 투쟁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밖에 눈 온다” 하고 외쳤다. 우리 수험생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밖으로 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름다운 천사를 반겼다. 그러고는 누구의 인도도 없이 각자 온몸으로 예기치 못한 반가운 손님을 맞이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도서관 주위만을 돌다가 차츰 반경을 넓혀갔다. 우리 수험생들은 입시 공부의 막바지에 이르러 다른 모든 계획이나 생각을 젖혀두고 마지막 준비의 점검 단계에서 모두 편두통을 앓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아름다운 방문객에 우리는 황홀했다. 그날 밤은 완전 바람 한 점 없이 엄지손톱만 한 함박눈이 펑펑 펑펑 소리 내며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눈 속을 걷고 또 걸었다. 이미 세상은 하얗게 다 지워졌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순백의 세계만이 있었다. 하얀 숨이 입에서 새어 나갔다. 하얀 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청량한 공기를 코로 깊게 들이마셨다. 노출된 얼굴이 아프도록 시렸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릿속은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이때였다. 계속 곁에 걷고 있던 남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자기소개하면서 나를 안다고 했다. 계속 주시를 해왔고 자신의 원래 계획은 우리 모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사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난 깜짝 놀랐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안면이 있고 키가 훤칠하며 잘생긴 남학생이었다. 심장이 튕겨 나올 듯했고 갑자기 온몸에 온기가 느껴졌다. 그 후 지금까지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무한한 선물을 조건 없이 준다. 비, 바람, 눈, 하늘과 구름, 나무, 꽃과 같은 아름다운 생명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태풍, 쓰나미 그리고 지진과 화산 폭발처럼 무서운 파괴력도 동시에 준다. 눈은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우리에게 눈은 아름다운 설경과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한다. 하지만 이틀 전 눈이 온다는 소식은 다음 날 아침 일을 나가야 하는 나에게 근심 덩어리였다.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아프다.’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눈의 선호도는 줄어간다. 특히 운전자에게 눈은 사고뭉치다. 눈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단지 우리 인간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 어떤 관점에서 눈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눈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오늘 내 창밖에 보이는 Holy Tree 위에 앉은 눈이 햇빛에 반짝인다. 환상이다.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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