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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라 하지만 믿는 건 한인 뿐” 한인여성노숙자 생존기

역설의 안식처 ‘한인타운’ (1)
한인 여성 노숙자 올리비아
80대 동반자와 힘겹게 생존
언어·문화 장벽 셸터 못 가
작은 배려라도 있었으면…

배고픔과 노숙자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올리비아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김상진 기자

배고픔과 노숙자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올리비아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김상진 기자

 
노숙자 사역을 하다가 노숙자로 전락했다. 고 이강원 목사의 굴곡진 삶이었다. 지난 7월, 그는 LA 한인타운의 한 외진 골목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단순히 비극으로만 봐선 안 된다. 이면에는 암울한 현실이 존재한다. 지금도 한인타운에는 하루하루 연명하는 한인 노숙자들이 살아간다. 지난 5개월 동안 미주중앙일보 탐사보도팀은 길거리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인타운은 가혹한 역설이 얽힌 곳이다. 노숙자들은 배척과 소외 속에서 안도한다. 이강원 목사도 그랬다. 그가 한인타운 길거리에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아 있는 노숙자들의 삶에서 찾아보고자 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또 다른 ‘이강원’은 언제라도 생겨날 수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네 차례에 걸쳐 시리즈로 게재한다.
 
취재 = 장열·김영남 기자
사진·영상 = 김상진 기자
 

이 기사는 미주중앙일보의 영어 매체 코리아데일리US(www.koreadailyus.com)에 12월 20일 게재된 기사를 한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거동이 불편한 양 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텐트 안에서 누워 지내며, 간신히 앉을 수 있는 상태다. 옆에 앉아 있는 올리비아는 양 씨를 위해 가끔 음식을 구해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시간은 텐트 안에서 그를 돌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김상진 기자

거동이 불편한 양 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텐트 안에서 누워 지내며, 간신히 앉을 수 있는 상태다. 옆에 앉아 있는 올리비아는 양 씨를 위해 가끔 음식을 구해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시간은 텐트 안에서 그를 돌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김상진 기자

  
한 노인이 콘크리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몸을 떨고 있다. LA 한인타운 워싱턴 불러바드에 있는 작은 텐트 안에는 너덜너덜해진 담요 몇장이 최소한의 온기만 전하고 있다.
 
한인 여성인 올리비아(44)는 얇은 옷 한 벌만 걸친 채 쇄골이 드러난 모습으로 노인 곁에 앉아 있다. 옆에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눈물을 훔쳤다.
 
올리비아는 울먹이며 “할아버지가 지금 너무 아파요. 마치 북한의 영양실조 환자 같은 상태”라고 말했다.
 
흐릿한 눈빛의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올리비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올리비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누가 죽을 좀 가져다주면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죽이 없으면 순두부찌개라도 가져다주면 좋겠다”고 했다.
 
노인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잇몸이 드러났다. 순두부는 치아가 없어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일지도 모른다. 기력을 잃어가는 그들에게 순두부찌개는 한인으로서의 결핍과 외로움을 채우고 냉랭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한식이다.
 
순두부찌개를 간절히 원하는 이 노인은 올리비아의 남편인 양계형(80)씨다. 두 사람의 인연은 가장 외진 곳에서 시작됐다. 올리비아는 양씨를 한인타운의 한 노숙자 셸터에서 만났다고 했다.  
 
누워있던 양씨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는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며 “올리비아가 머물 곳을 찾아달라”고 간청했다. 올리비아는 갑자기 정색하며 말을 끊었다. 그녀는 “나보다 내 남편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며 “갈 곳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중 한 이웃 주민이 나타나 “이곳에서 떠나라”고 소리쳤다. 텐트를 옮기는 일은 이들에게 가장 고달픈 순간이다. 양씨는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조차 힘겹다. 제대로 걷는 것도 어렵다.
 
 

장기 노숙에 무너진 정신과 육체…현 시스템으론 한계

 
거동이 불편한 양씨는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담요와 옷가지들이 그대로 담겨 있는 텐트를 옮기는 것은 깡마른 올리비아의 몫이다. 텐트를 옮기려고 고작 300피트가량 끌고 가는데 걸린 시간은 15분 남짓이다.
 
10년간 환청에 시달리고 있는 올리비아는 한때 세인트 제임스 성공회 교회의 김요한 신부가 운영하는 한인 전용 셸터에서 살았다. 양씨를 만나게 된 그 셸터다.
 
올리비아는 갈수록 악화하는 정신 건강 문제로 결국 그곳을 떠나야 했다.
 
김 신부는 올리비아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셸터에는 원래 남성 노숙자만 머물 수 있다는 내부 규정이 있었지만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며 “올리비아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에 입소를 허락했었다”고 회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양씨는 올리비아를 불쌍히 여겼고, 두 사람은 함께 고충을 나누며 점점 가까워졌다. 문제는 올리비아의 정신 건강 상태가 갈수록 나빠지면서 불거졌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보니 셸터에 있는 물품을 마구 부수기 시작했다.
 
김 신부는 “정신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올리비아의 입원을 여러 차례 주선했었다”며 “현재 의료 시스템은 근본적인 치료보다 약을 복용한 후 상태가 호전되면 곧바로 퇴원시키기 때문에 올리비아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셸터의 사람들은 더는 올리비아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김 신부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올리비아는 다시 길거리로 나와야 했다.
 
양씨는 그런 올리비아를 혼자 둘 수 없었다. 셸터에 남아 여생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 안락함을 뒤로 하고 올리비아를 따라 길거리로 함께 나왔다.
 
올리비아가 양 씨와 입을 맞춘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이 커플은 외로운 삶 속에서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김상진 기자

올리비아가 양 씨와 입을 맞춘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이 커플은 외로운 삶 속에서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김상진 기자

 
한국어로 말하던 올리비아가 느닷없이 영어로 욕설을 섞어가며 “나는 완벽하고 아름답다”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감정이 격화되는 올리비아와 달리, 양씨는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환청에 시달리고 있는 올리비아는 증상이 심해지면 텐트 인근의 사람들에게 욕을 하며 소리지른다.

환청에 시달리고 있는 올리비아는 증상이 심해지면 텐트 인근의 사람들에게 욕을 하며 소리지른다.

 
 
이들 부부는 셸터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LA시나 비영리 단체가 주선해주는 모텔이나 셸터로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올리비아는 “한인타운을 떠나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고 했다. 그녀는 “나는 한인밖에 못 믿겠다”며 “내 남편은 한국말밖에 못 하는데 다른 사람들을 무서워한다”고 말했다.
 
올리비아는 텐트를 다른 장소로 옮기던 중 잠시 멈춰 양 씨의 손목에 귀를 대고 맥박을 확인하고 있다. 올리비아는 음식과 담요가 담긴 텐트를 혼자 힘으로 끌어 옮겼다.

올리비아는 텐트를 다른 장소로 옮기던 중 잠시 멈춰 양 씨의 손목에 귀를 대고 맥박을 확인하고 있다. 올리비아는 음식과 담요가 담긴 텐트를 혼자 힘으로 끌어 옮겼다.

 
그러면서 올리비아는 “다른 한인 노숙자로부터 타인종 셸터에 갔더니 덩치가 큰 남자들이 와서 폭행하고 쫓아냈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올리비아와 양씨에게 한인타운의 거리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다. 배고픔과 외로움 가운데 그나마 언어와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역설의 안식처다.
 
올리비아와 양 씨가 머무는 텐트. 두 사람은 텐트 안에서 누군가가 전해준 랜턴의 불빛을 밝히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올리비아와 양 씨가 머무는 텐트. 두 사람은 텐트 안에서 누군가가 전해준 랜턴의 불빛을 밝히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취재 = 장열·김영남 기자, 사진·영상 = 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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