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앙일보와 나
고즈넉한 분위기의 우리 집에 중앙일보는 큰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새벽마다 자전거 멈추는 소리와 함께 털썩하고 신문이 집안으로 떨어지면 우리 집 개 독구가 컹컹 짖어댔다. 그 소리에 온 식구가 눈을 떴다. 아버지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누가 나가서 신문 집어 와라”고 하셨다. 바깥의 신선한 공기와 함께 배달된 중앙일보는 아버지가 제일 먼저 읽고 그다음 순서는 엄마였다. 한자가 반이 넘었지만 나와 동생들도 학교에 다녀오면 광고까지 열심히 읽었다.
텔레비전도 전화도 없던 시절, 중앙일보는 우리 가족이 세상을 내다보는 유일한 통로 같은 존재였다. 희대의 살인마 김대두가 외딴집만을 대상으로 범행하고 있다는 소식도 신문을 통해 접했는데 동네와 조금 떨어져 있던 우리 집에도 오면 어쩌나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어른의 세계를 훔쳐보는 일도 중앙일보를 통해서였다. 당시 ‘내 마음의 풍차’라는 최인호의 소설이 약간 선정적인 삽화와 함께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었다. 최인호 특유의 익살이 가미된 내용이었는데 정말로 흥미진진했다. 주인공이 매춘부에게 돈을 주며 자폐아 이복동생의 첫 경험을 주선한 부분에서는 다음 회가 궁금해 잠까지 설쳤다.
그때는 신문 배달부가 매달 수금을 하러 왔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궁핍한 살림이었지만 아버지는 신문 대금은 꼬박꼬박 냈다. 멀리까지 신문을 배달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불행히도 신문 구독은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100호 남짓한 우리 마을에서 신문을 보는 집은 딱 두 집, 이장네와 우리뿐이라 타산이 맞을 턱이 없는 보급소에서 배달을 중단한 까닭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신문에서 봤는데’라며 새로운 소식을 전파하던 아버지의 기쁨도 사라졌고 온 가족이 침울해졌다. 아버지는 궁리 끝에 시내에 있는 고모 집으로 신문을 배달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학교를 파한 우리 형제들이 당번을 정해 고모네에 들러 신문을 집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모두 중앙일보의 애독자였다.
나는 서울에 독립해 살 때도 중앙일보를 구독했다. 당시 각 신문사의 판촉 경쟁이 치열했다. 신문을 구독하면 자전거를 준다느니, 밥통을 준다느니 했지만 나는 한눈팔지 않았다. 경품이 욕심나긴 했지만 왠지 중앙일보를 배신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미국에 오면서 중앙일보와의 인연도 끝난 줄 알았다. 가족, 친구와의 이별 못지않게 더는 중앙일보를 못 본다는 아쉬움도 컸다. 그런데 미국에도 중앙일보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마켓에서 중앙일보 가판대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바로 구독 신청을 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끝나버린 줄 알았던 중앙일보의 인연이 미국에 와서도 이어졌던 것이다.
인연은 더 깊어졌다. 중앙일보 샌프란시스코 지사에서 기자로 11년 동안 일을한 것이다. 이후 미국직장에 취직하면서 중앙일보를 그만뒀지만 매주 칼럼을 썼다. ‘이계숙의 살며 느끼며’란 타이틀로 500회나 연재했다. 나름대로 인기가 있었던지 조지아주로 이사 간 한 지인이 그쪽 중앙일보에도 내 글이 실린다는 소식을 전해주었고, 뉴욕에서 팬레터가 오기도 했다. 너무너무 신기해 동네방네 자랑했었다.
샌프란시스코 지사가 문을 닫았을 때는 너무나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너무 큰 상실감에 한동안은 그냥 멍했었다. 고심 중에 LA에서 발행하는 중앙일보를 우편으로 받아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기뻐 당장 구독신청을 했다. 우편이기에 가끔 배달이 지연되기는 하지만 중앙일보를 계속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어디냐 싶어 마냥 좋기만 하다.
미주중앙일보가 창간 5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함께 한 50년, 함께 할 50년’이란 캐치프레이즈는 정말로 훌륭하다. 그렇다. 나도 중앙일보와 50년 넘게 함께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작정이다.
이계숙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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