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는 도발, 트럼프는 발끈…미래는 없었다
대선 TV토론 관전기
범죄·인플레 등 국민 고통은 네 탓, 해법 없어
사회자·미디어의 노골적 편들기 되새겨봐야
해리스는 미래를, 트럼프는 과거를 향했다는 미디어들의 이분법이 나왔지만, 수긍할 사람은 많지 않다. 해리스도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돋보였던 건 해리스의 토론 기술이다. 4년 전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의 토론에서 무참히 허우적거렸던 그가 아니었다. 몰라보게 향상된 그의 기술과 표정 연기력에 민주당 지지자들은 환호할 만했다.
대선 토론에선 표심을 정하지 못한 유권자들을 누가 더 많이 끌어오느냐가 관건이다. 트럼프가 싫지만 해리스도 불안해 보인다는 이에겐 ‘해리스가 돼도 나라가 망하진 않겠구나’ 하는 인상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대의 경우엔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첫 임기 때보다는 낫겠구나’ 하는 인상을 주면 성공이다. 이 측면에서 해리스가 착실히 득점을 올렸다고 볼 수 있다.
해리스는 트럼프에게 공격당할 만한 취약점들이 적잖았다. 민주당 내에서 지나치게 좌편향돼 있다는 점, 이를 의식해 뒤늦게 우측 깜빡이를 요란하게 켜대며 급차선변경을 해왔다는 점, 외교안보 정책에 성과와 식견이 부족하다는 점까지.
바이든 정부의 부통령으로서 가장 뼈아픈 질문은 사회자가 던진 “4년 전보다 미국인의 살림살이는 나아졌나”였다. 누구도 ‘나아졌다’고 할 수 없는 게 미국 경제의 현주소다. 해리스는 동문서답으로 회피기동을 하며 난데없이 부자 감세 프레임을 씌워 트럼프를 도발했다. 이게 누구의 득점인지, 실점인지는 보는 사람의 진영에 따라 갈릴 것이다.
사실 중도적 유권자에겐 둘 다 인기 없는 후보다. 해리스는 부통령으로서 국정 존재감이 낮았다.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도 못했다. 인지 능력을 의심받은 바이든 덕에 대안부재로 선택된 후보 아니었나. 트럼프에 대한 진보층의 혐오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콘크리트 지지층을 넘어선 외연 확장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심하게 말해, 둘이 다 못마땅하다는 유권자들에겐 맛이 간 음식과 불량식품을 놓고 골라야 하는 상황이나 다름없다.
그럼, 유권자들이 백악관을 맡길 리더에게 기대하는 최소한의 자질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번 토론을 통해 두 후보 사이에 뚜렷하게 차이를 보인 것은 절제심, 안정감, 일관성 아니었나 싶다.
트럼프가 못마땅한 듯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도 발끈해 언성을 높이는 장면이 몇 차례 있었다. 질문의 요점을 흐리기 위한 해리스의 도발 전술에 걸려들었을 때였다. 그 결과 트럼프는 자신의 강점이자 해리스의 약점인 불법 이민, 범죄, 전쟁 이슈에서 충분한 득점을 하지 못했다. 절제심과 안정감 면에서 오히려 감점 포인트였다.
그의 거칠고 과장된 표현 역시 중도층의 환심보다 혐오감을 살 법했다. 밀입국자들이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고 하질 않나, 해리스가 되면 이스라엘은 2년 내에 망할 것이라고 하질 않나. 마음을 못 정한 유권자를 끌어들이기엔 적절치 않은 내용이었다. 집토끼를 열광시킨다고 산토끼를 불러오진 못한다.
사회자의 편파 진행도 해리스를 거들었다. 팩트 체크를 한다며 트럼프에게만 수차례 반박했다. 해리스도 여러 차례 사실과 다른 말을 했지만 가만 놔뒀다. 상대방의 허위 발언에 대한 검증과 반박은 각 후보의 몫인데도, 사회자가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었다. 1대3의 토론이었다는 게 트럼프측 불만이다.
트럼프가 해리스에게 강펀치를 날린 건 마지막 마무리 발언 때였다. 이런저런 정책 공약을 내놓고 있는데, 정작 부통령 재직 때엔 뭐했냐는 힐난은 해리스를 무장해제시키고도 남는 말이었다. 발언 순서가 끝난 해리스는 방어할 틈이 없었고, 강펀치를 너무 늦게 날린 트럼프는 후속 공격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공방전의 와중에 미래에 대한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경제, 안보 정책을 어떻게 설계해 세계 최강국의 자리를 지켜갈지, 소득 양극화로 피폐해진 서민들의 생활수준은 어떻게 끌어올릴지, 젊은이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희망을 어떻게 불어 넣어줄지. 불법 이민, 범죄, 인플레 등 미국인들이 겪는 고통을 서로 네 탓으로 돌린 채 해법은 아무도 내놓지 않았다.
한반도 문제의 경우 트럼프와 김정은의 관계를 희화화하는 수준에서 다뤄진 탓에, 정작 중요한 북핵 문제에 대해선 토론 하지도 못했다.
11일 CNN은 해리스가, 폭스5뉴스는 트럼프가 6대 4 정도로 우세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각각 발표했다. 당파성이 강한 미디어들이므로 곧이들을 필요는 없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살해사건 직후, 불타는 폭동 현장에서 대체로 평화로운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한 게 CNN이었다.
토론을 주최한 ABC뉴스도 친민주당 매체로 유명하다. 미국의 언론 감시단체인 미디어 리서치 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바이든 사퇴 이후 해리스에 대한 ABC의 보도는 100%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반면 트럼프에 대한 보도는 93%가 부정적이었다. 미국 언론들의 대선 보도를 걸러들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남윤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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