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2세 사업가, ‘전설’ 이소룡을 패션으로 알린다
허드슨진 창업자 LA출신 피터 김 대표
올해 초 브루스 리 가족재단과 파트너십 맺어
"70년대 미국서 자란 아시아계에겐 그는 영웅
기존의 브루스 리 상품 저급하고 존경심 없어
고급 디자인으로 그의 철학과 가치관 알릴 것"
한인 2세 사업가가 이소룡(李小龍·Bruce Lee)의 철학과 사상을 미국에서 패션 브랜드를 통해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LA 출신인 피터 김(53)은 세계적 청바지 브랜드인 ‘허드슨진’의 창업자이다. 그는 20여년간 여러 회사를 운영하며 총 10억 달러 이상 매출을 올렸고, 2013년에 허드슨진을 9870만 달러에 판매한 성공한 사업가다.
최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전혀 50대로 보이지 않았다. 큰 체격에 빡빡 민 머리, 콧수염, 빼곡한 문신을 보곤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장난기 가득한 말투를 겸비한 그는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한 없이 진지하게, 가족과의 즐거운 추억을 이야기를 할 때는 한 없이 유머러스했다.
올해 초 브루스 리 가족 재단과 공식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패션 브랜드 ‘D-R-G-N’을 창업한 그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주의력 결핍 장애로 인한 어려운 학창 시절과 부모님의 사업 실패 등 여러가지 역경을 딛고 세계적 청바지 브랜드를 창업한 그는 왜 제2의 인생 소재로 이소룡을 선택했을까.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우선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 궁금하다.
“1940년대 초에 태어난 부모님은 한국전쟁 당시 남한으로 내려갔고 1960년대에 LA로 이민을 왔다. 한인 이민 1세대로서 주차요원, 청소 등 안 해본 일이 없으셨다. 가발 가게를 하시다 아버지는 얼굴에 총을 맞기도 하셨다. 부모님은 여성용 블라우스를 판매하는 패션 사업에 뛰어드셨다. 전문직 여성복이 인기를 끌 당시였는데 저렴한 가격에 좋은 품질의 제품을 판매하며 큰 사업으로 일궈내셨다. 이후 부모님은 여러 지역에 부동산 투자도 하셨다. 당시에는 (부모님 사업 내용을) 잘 알지 못했지만 스위스에서 여름학교를 다니는 등 풍요롭게 자랐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
“평생 학교와는 잘 맞지 않았다. 고등학교 성적도, (대학 입시를 위한) SAT 시험 점수도 좋지 않았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지금의 내 아내가 나보다 SAT 영어 점수가 높았다. 나중에야 내가 주의력 결핍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1970년대 당시만 해도 미국 사회는 똑똑하지 않으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존감이 낮았고 내가 정말 멍청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지냈었다.”
-어떻게 패션 업계에 뛰어들게 됐는지.
“1990년대 초 USC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낼 무렵이었다. 패션 트렌드의 변화 등으로 부모님의 사업이 크게 악화됐고 가게 빚이 10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부동산 시장 악화로 투자해왔던 부동산에도 큰 문제가 생겼었다. 23세쯤으로 기억하는데 이때부터 부모님의 요청으로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왜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일을 해야하나’하며 신세를 한탄했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트렌드에 맞는 디자인을 구상하고 인프라 환경을 개선하면서 기본에 충실한 목표에 집중했다. 그렇게 조금씩 빚을 갚아가고 사업구조를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 1998년쯤 사업이 정상화됐는데 이때 뭔가 자신감을 갖게 됐다.”
-어떻게 본인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나.
“1999년에 드렁큰멍키(Drunknmunky)라는 젊은 남성용 스트리트 옷 브랜드를 만들었고 2002년에 허드슨진(Hudson Jeans)을 만들었다. 2003년에 드렁큰멍키를 매각하고 2005년 무렵부터는 가족 사업에서도 손을 뗀 뒤 허드슨진에만 집중했다. 2009년쯤부터 회사는 전세계에서 알아주는 청바지 회사로 거듭났고 2009년 일부 지분을 한 사모펀드에 판매해 운영했다. 이후 투자자들과 나의 지분을 포함한 회사 지분 모두를 2013년 조스진에 9870만 달러를 받고 매각했다. 매각한 뒤에도 몇 년을 같이 일하다 2017년에 완전히 떠났다.”
-이소룡과 관련된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2017년 골든서클그룹이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고객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브랜드 회사들과 협업하는 사업 구조를 구상했다. 그렇게 여러 회사와 협업을 해오다 2020년쯤 (이소룡 딸 섀넌 리가 운영하는) 브루스 리 가족 재단을 소개받았다. 그렇게 서로 사업 구상을 하다 2023년 이런 사실을 대중에 공개했고 실제 사업을 시작한 건 올해 초부터다.”
-꼭 이소룡이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 (기자) 당신이 만나본 사람 중 이소룡의 가장 열렬한 팬일 것이다. 1970년대에 태어난 아시아계 미국인은 인종차별을 당하며 자랐다. 이런 가운데 나는 이소룡을 선생이자 멘토, 영웅으로 생각하며 지냈다. 아시아계 남자들은 힘도 없고 섹시하지도 않다는 인식이 컸으며 어느 하나 좋은 이미지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작은 아시안이 가장 위대하고 역대 가장 터프한 남자로 거듭났다. 아시안 중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놓고서 말이다.”
-그를 동경하는 것과 그를 통한 패션 사업을 하는 건 별개의 문제 아닌가.
“브루스 리 가족에게 내가 말한 것은 이소룡과 관련된 패션 상품 중에 내가 사용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한 치의 존경심도 없다. 노란색 트레이닝복이라든지 영화 표지, 싸우는 모습, 소리를 지르며 기합을 넣는 표정 등을 저급하게 보여주는 상품뿐이었다. 그냥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인 상품들이 많았다. 물론 그가 해온 일이 무술이었고 관련 영화를 찍은 것이지만 그와 관련된 상품들은 다 이런 저급한 모습에 국한돼 있었다. 나는 그가 현재 전설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의 철학, 생각,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말이다. 그가 무술이 아닌 다른 일을 했어도 엄청난 인물이 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의 이런 모습을 부각해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이소룡의 어떤 이미지를 알리고 싶은지.
“나는 그의 철학과 사상, 가치관을 바탕에 둔 고급 스트리트 옷 브랜드를 시작하게 됐다. 그는 자신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본인 본연의 모습에 집중하며 본인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나는 그의 사상을 우스꽝스러운 이미지가 아닌 고급 디자인을 통해 세상에 알리려고 하고 있다. 나는 패션이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옷은 매일 입는 것이기도 하고 남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를 결정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소룡의 정신을 옷에 녹여보기로 결심했다.”
-제품은 인터넷을 통해서만 판매하고 있나.
“아니다. 현재 전세계 약 16개 매장에 우리 상품이 진열돼 있다. 한국 서울에도 세 곳이나 있다. 분더샵, 스페이스무이, 29CM 등에 입점해 있다. 멕시코와 호주 등의 매장에서도 우리 상품을 찾아볼 수 있고 LA와 라스베가스, 뉴욕 등 매장에서 판매 중이다.”
“내가 올해 53세인데 사람들은 나를 늙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이다. 나는 인생은 30대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20대 후반까지는 계속 자라나는 시기라고 본다. 80이 돼도 계속 일을 해보려고 한다. 나는 은퇴한다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한다. 인간의 뇌라는 것은 죽는 날까지 계속 성장한다고 본다. 80대인 우리 부모님이 산증인이다. 어머니는 아직도 나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고 아버지는 일은 그만뒀지만 매우 활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한 주에 골프도 세 번이나 친다. 2019년 당시 내 쌍둥이 딸들과 부모님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갔는데 애들이 내 부모님의 활동량에 깜짝 놀라 했다. ‘할머니 이스 크레이지!’라며. (웃음)”
김영남 기자 [kim.youngnam@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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