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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그녀의 담배 연기

이리나 수필가

이리나 수필가

그녀를 만난 것은 1990년 여름이었다. 미국에 이민 온 후 처음 방문한 한국에서.
 
그날은 이모가 사시는 안동에서 사촌 언니가 사는 서울까지 가려고 직행버스에 탔다. 두 나라 어느 곳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던 시기였다. 앞으로 펼쳐질 내 생의 불안과 염려로 가득해서, 안동역에 활짝 핀 등나무 꽃향기를 만끽할 여유도 없었다. 달리는 버스 신작로 위로 한숨과 고민이 나풀나풀 먼지가 되어 앉았다.
 
긴 생머리의 그녀는 옆자리에 앉았다. 비가 오려는지 날씨는 끄물댔고 동년배로 보이는 여자는 새침해 보였다. 버스 안은 휘발유 냄새와 퀴퀴한 오래된 비닐 냄새로 가득해서 현기증이 났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말을 건넸다.
 
“어디 가요?”
 
“언니네요.”
 
“나도 사촌 언니네 가요.”
 
순간 떠오른 그녀의 불안한 눈빛을 봤다. 나의 것과 똑같은. 버스에 실은 여자의 큰 핑크 이삿짐 가방이 떠올랐다. 잠시 언니네 집에 다니러 간다는 말에 비해 짐이 많았다. 갈 곳 없어 방황하고 암울했던 우리의 이십 대. 이런 걸 동병상련이라 하겠지.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전혀 기억에 없다. 하지만 정작 터놓고 싶은 속맘은 끝내 운도 떼지 못했다. 우린 어떤 연유로 만났을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안동에서 시작된 비는 우리를 쫓아오며 계속 내렸다. 어느덧 버스는 휴게소에서 멈췄다. 야외 스피커에서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가 흘러나왔다. 매점에서 산 김밥과 삶은 달걀을 건네자,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손에 쥐었다.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여인이 한숨처럼 내뿜은 연기는 허공에 흩어졌다. 축축한 공기에 연기는 곧 자취를 감추었다. 여자의 눈에 잠시 고인 눈물을 본 것은 단지 기분 탓이었을까.
 
마침내 버스는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동안 굵어진 비가 거세게 내렸다. 슬며시 가슴 아린 미소를 짓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점점 멀어져 가는 비에 젖은 트렁크만 한참 응시했다. 이름도 모르고 이제는 얼굴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 여인. 만약 감정에 고리가 있다면 우린 이때 서로 엉켰다.
 
비가 한번 거나하게 내린 것 같은데, 그사이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생각해 보면 애잔한 비 오는 날이었다. 아직도 긴 생머리를 하고 있으려나. 소나기처럼 내리던 고난을 잘 이겨냈을까. 흐르는 세월 속에 함께 한 짧은 만남이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아쉽고 생각이 날까. 내가 무엇을 잃었던가.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어가던 뒷모습이 가슴에 박혔으니, 가슴은 알겠지.

이리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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