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삶
‘파리의 택시 운전사’로 잘 알려진 홍세화(1947-2024)는 이른바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망명을 한 뒤, 오랜 세월 타향살이를 했다. 택시 운전사로 생계를 이으며 그가 깨닫고 익힌 것이 ‘톨레랑스’, 즉 관용이다.
세월이 흘러 정치적 족쇄가 풀리고, 귀국하여 작가로 언론인으로 장발장 은행 행장으로 활동하며 ‘늘 시대의 야만에 저항하고 소수자를 옹호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는 평가에 걸맞게 행동하는 지식인의 실천적 삶을 살았다. 장발장 은행은 벌금 낼 돈이 없어서 감옥살이하는 이들에게 무이자, 무담보로 벌금을 빌려주는 은행인데, 신청자가 너무 많아 후원금이 못 따라가는 형편이라고 한다.
그가 숨 거두는 순간까지 강조한 것은 ‘겸손’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려는 마음, 그가 이끌던 학습공동체의 이름은 ‘가장자리’였고, 마지막 직함은 ‘소박한 자유인’의 대표였다.
재일교포 서경식(1951-2023) 교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살면서 지독한 차별과 싸워야 했고, 거기다 한국에 유학한 두 형이 이른바 유학생 간첩사건이라는 것에 연루되어 감옥살이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그런 고통을 치열한 글쓰기와 디아스포라 연구로 이겨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서는 디아스포라 예술가들의 모진 삶과 고통, 빛나는 정신적 승리로 가득 차 있다.
두 사람은 사회적 약자, 박해받는 소수자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비판적인 글과 실천으로 절실하게 표현했다. 같은 꿈을 가진 지성인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는 있었지만, 생전에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고 한다. '저세상에서 만나게 될 홍세화와 서경식이 생전에는 미처 다하지 못한 깊은 우정을 쌓게 되기를 간곡한 마음으로 바란다'는 글에 공감한다.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인류의 문명은 끊임없이 발전한다지만,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국경은 완강해지고, 전쟁은 그치지 않고, 이주노동자들의 물결도 멈추지 않고, 난민 문제 또한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 디아스포라라는 낱말과 개념이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특히 그렇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제인 '외국인(이방인)은 어디에나 있다'도 좋은 예다.
미주한인문학을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부르는 예도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디아스포라인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 라고 답하기는 어쩐지 어색하다.
디아스포라는 기본적으로 강제성에 의한 이주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 미주한인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자발적 디아스포라’다. 좀 더 잘 먹고 잘살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고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다. 물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인사, 해직 교수, 해직 언론인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자발적 이민자들이다.
하지만, 떠나온 이유가 무엇이건, 현재 삶의 모습이나 돌아갈 곳 마땅치 않은 정신 상태로 말한다면, 우리도 분명히 '남의 땅 남의 골목에 문패 걸고 사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다. 이민자, 국외자, 이방인, 경계인들이다.
우리 미주한인사회에도 디아스포라의 외로움과 아픔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비판적 지식인이 많았으면 좋겠다. 깊은 고뇌를 숙성시킨 좋은 작품도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디아스포라의 그늘이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 신영복 교수가 강조한, 변방의 창조적 가능성과 자유의 힘을 믿으며, 디아스포라들의 변방인 미주한인사회가 앞으로 어떤 놀라운 창조력을 발휘할지에 큰 기대를 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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