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 환자와 함께 놀기
스무 살 초반, 백인 청년 피터는 완전 트러블 메이커다. 벽에 머리를 쾅쾅 들이박거나 당나귀식 발길질을 해서 큰 구멍을 낸다. 직원을 때리고 손톱으로 팔을 긁어 자해를 하기도 한다.피터는 공격성이 강하고 충동심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기질을 타고났다. 사회는 성품이 유별난 아이에게 정신과 병명을 부여한다. 아이가 저지르는 비행(非行)을 약으로 고치려 하거나 심리치료사에게 떠맡긴다. 21세기 부모들은 자기네들 할 일이 벅차고 바빠서 자식들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자기가 뗑깡을 부리면 병동직원들이 쩔쩔매는 상황을 대놓고 즐기는 피터는 솔직히 좀 악질이다. 나는 곧잘 그의 아버지 역할을 맡는다.
정신과 의사는 자신의 개성을 감추지 않으면서 편안한 자세로 환자를 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쩔쩔매서는 안 된다. 자식에게 쩔쩔매는 부모는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가 아니다.
엊그제 넷플릭스에서 앤터니 홉킨스가 열연한, ‘The Last Session of Freud (프로이트의 마지막 세션)’를 보았다. 유신론자(환자)와 무신론자(프로이트)의 논쟁이 치열하다. 예나 지금이나 프로이트, 도스토옙스키, 니체 같은 인문학적 천재를 나는 몸서리치게 좋아한다.
프로이트의 6남매 중 막내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1885~1982)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정신분석학, 특히 아동 정신분석에 크게 공헌했다. 1939년 9월 23일, 수술을 34번 받은 구강암의 통증을 안락사로 마감하는 아버지 곁을 끝까지 굳게 지킨다. 아버지를 닮아서 끈질기고 현학적인 안나 프로이트!
아버지가 죽은 후 안나 프로이트는 아동 정신분석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과 극심한 대립각을 세웠다. 영국의 정신분석계는 이내 프로이트파, 클라인파, 중도파로 갈라진다. 클라인은 ‘Object Relations Theory, 대상관계 이론’의 창시자로 군림했다. 나 또한 평생을 대상관계 이론을 추구해 왔다.
멜라니 클라인은 6세 미만 어린아이를 상대로 ‘play therapy, 놀이치료’에 심취했다. 성인들의 몰두하는 ‘자유연상’을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장면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반면에, 안나 프로이트는 ‘놀이치료’를 통하여 어린아이의 내면세계에 발을 디밀어서 그들을 교육적 차원으로 유도하려 했다. 이때 놀이치료의 숨은 목적은 현실적응을 위한 ‘참교육’이다.
쏜살같이 일어나는 아이들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차원의 성숙과정에서 엄마와 아버지는 아들, 딸과 얼마만큼 같이 놀아주는가.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열망으로 일찌감치 영재교육에 임하는 학교 선생님들은 얼마만큼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가. ‘play’는 ‘playful’ 한 무드, 즉 좀 까부는 듯 밝은 기분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억지로 노는 것은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환자에게 훈시하는 직원을 본다. 설교다. 환자들은 대항한다. 그들 사이에 투쟁의식이 싹튼다. 이 전투에서 늘 환자가 이긴다. 환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직원을 이길 궁리를 풀타임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원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피터와 나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언어에 대한 민감성. 둘째로는 그로테스크한 유머 감각을 발휘하면서 시시때때로 까분다는 점. 게다가 나는 남에게 훈시하고 설교하는 것을 몹시 꺼리는 체질이다. 이런 면에서 피터는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다. 요즘 거의 매일 피터와 함께 놀면서 지내는 기분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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