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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렌터카

렌터카

렌터카

지난가을 한국여행을 다녀왔다.  둘째 딸 부부가 한 학기 안식년으로 한국을 간다기에 우리 부부도 동행했다. 코로나 탓에 6년 만에 형제자매 친지들을 만났다. 조금씩은 변했지만 건강하게 사는 그 자체로 감사하고 반가웠다. 여행 기간을 2주로 잡았기에 계획대로 바삐 움직였다. 노래 가사처럼 서울, 대전, 광주, 임실, 보성 등을 점만 찍고 다녀야 했다.  
 
이번 여행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떠날 때 자식들과 굳게 약속했다. 나이도 있고 오랜만에 가니 길도 많이 변해 운전이 위험해서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짐을 간단히 하려고 신경을 썼지만 반갑다고 주고받는 선물은 여행 동안 큰 짐이 됐다.  
 
사위가 미국인이라 대전에 갈 때는 KTX를 이용했다. 발전된 한국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가방을 들고 서울역 광장 계단을 올라야 했고 기차 플랫폼까지는 내려가야 했다. 가방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렌터카 생각이 간절했다. 애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대전을 떠나 호남 지방을 갈 때는 차를 빌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딸 부부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틀 후 딸은 우리를 전송하러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고속버스와 택시를 타고 다니라고 일렀다. 그런다고 했지만 남편과 나는 이미  렌터카를 예약했기에 미리 부른 택시를 타고 도망치듯이 렌터카 회사로 향했다. 딸과 사위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은 더 힘들 것 같았다. 우리 사정을 말로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고 걱정만 더 할 것 같아서 비밀로 했다.  
 


렌터카 회사에서 여직원 두 사람이 밝은 얼굴로 우리를 반기며 설명을 잘 해주었다. 특히 내비게이션 사용법은 몇 번이나 반복해 일러주었다. 남편의 반복되는 질문에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너무 정확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 놀랄 정도였다.    
 
차 트렁크에 가방 두 개를 넣고 자잘한 짐들을 뒷 의자에 놓고 우리 부부는 먼저 기도를 드렸다. 절대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몸이 편하니 마음도 즐거웠다. 휴게소마다 들러 국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오후 1시쯤 사촌 시숙께서 정성껏  관리하신 임실 시댁 선산에 도착했다. 술잔을 올리며 그분들의 삶을 기렸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점만 찍고 다음 장소로 또 이동해야 했다. 시어머님과 큰형님, 사촌 형님께서 왜 그렇게 총총 가느냐고 서운해하시는 것 같았다. 속으로 “해 있을 때 가려고요”라고 답하며 광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친절하고 낭낭한 목소리는 여행길을 즐겁게 해주었다.  
 
순창, 담양 등의 이정표가 보였다. 그리운 조국의 시골 마을이다. 고추장, 떡갈비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광주에서 5시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부지런히 달려 4시 반쯤 도착했다. 서울에서 온 두 동생과 함께 약속된 음식점에서 여고 동창들을 만났다. 여고 졸업 후 처음 만난 친구도 두 명이나 있었다. 마치 매일 만난 친구처럼 격이 없었다. 학창시절로 돌아갔다. 모두가 편안한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들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고향인 보성 득량으로 향했다. 두 동생을 차에 태우고 고향산천을 달리니  부러울 것이 없었다. 여전히 내비게이션 아가씨는 낭낭한 목소리로 길을 안내했다.  
 
산소에 가기 전에 고향에 오면 항상 들리는 꼬막 정식을 먹으려 벌교를 찾았다. 대충 지리를 아는 터라 들판만 건너면 되리라고 아무 의심도 없이 내비게이션 아가씨 말대로 들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길이 없어졌다. 큰 도로에서 200미터는 족히 들어온 후였다.  자세히 보니  양쪽으로는 수로가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후진해야 했다. 남편은 창을 열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어 뒤를 보며 후진을 했다. 차바퀴가 자꾸 난간으로 갔다. 두 동생과 나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차 뒤에 서서 “핸들 돌리지 말고 고개 내밀지 말고 백미러만 보고 내가 손짓하는 대로 내 말을 잘 듣고 따라서 와라”고 했다. 남편은 고집이 있는 터라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소리를 질렀다. 잘못하다 양쪽 수로에 바퀴가 빠지면 일이 복잡해지니 내 손짓만 믿으라고 했다.  
 
우리 부부가 서로 소리를 지르니 막내는 놀라 아무 말 못 하고 난감해하는데 다른 동생은 멀리 앉아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에 나도 웃음이 터졌다. 결국 남편은 내 손짓과 말을 들으며 무사히 후진에 성공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웃던 동생이 “언니, 요즘 내가 웃음을 잃었다고 의사도 친구들도 걱정했는데 드디어 오늘 웃음을 찾았네”라고 말했다.  그러면 이런 치유를 주시려고 그런 고통을? 동생이 다시 웃게 됐다니 무얼 더 바라리.  
 
 2박 3일의 성묘 일정을 끝내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아무 탈 없이 차를 반납했다. 미국에 있던 큰딸이 전화로 칭찬했다. 대중교통 잘 이용한다고. 나는 더듬거리다가 고백했다. 차를 빌렸다고. 그리고 서울행 고속버스 안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짐 없는 여행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영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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