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이야기에 담은 '사람 향기' 영화계 매료
[오스카가 주목한 ‘패스트…’의 셀린 송 감독]
12세 토론토 이주 뒤 뉴욕으로
20대에 극작가로 연극계 활동
첫사랑 한국 남자와 뉴욕 부부
이민의 삶과 동양적 인연 담아
‘사람은 떠나도 흔적은 남는다’
내 생으로 들어온 존재 사유
한 여자가 두 남자 사이에 있다. 한 남자는 그녀의 남편이고 다른 한 남자는 어린 시절의 남자 친구이다. 세 사람이 뉴욕의 어느 바에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눈다. 세 사람 사이의 어색한 기류, 이상한 느낌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다.
이들 세 사람을 다르게 구분하는 건 그들의 문화와 자라온 환경, 그리고 다른 언어이다. 그러나 그 무언가가 이들을 하나로 연결한다.
“서로 만날 이유가 없는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그들이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공통점 때문이죠. 그 순간이 마치 공상과학처럼 느껴졌어요. 문화와 시간과 언어를 초월하는 … .”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두 남자, 그들은 남편 아서와 첫사랑 해성이다. 그들 사이에 노라가 있다. 노라는 셀린 송 감독의 자화상이다. 서로의 다른 세계가 한 곳으로 모이는 그곳에 노라, 아니 셀린 송 감독의 스토리가 있다.
송 감독은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로 오스카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저예산 독립영화로는 이루어 내기 힘든 놀라운 업적이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되어 호평을 받았고, 이어서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받아 스크린데일리 평점 1위를 기록했다.
많은 평론가들은 송 감독이 감독상 후보군에서 제외된 사실에 아쉬움을 표현한다. 여성영화평론가협회는 송 감독을 베스트 스토리텔러로, ‘패스트 라이브즈’를 베스트 영화로 선정했다. 시애틀평론가협회 등 다수의 평론가그룹이 송 감독을 최우수 감독으로 거론했고 전미비평가협회는 지난 9일 ‘패스트 라이브즈’에 작품상을 안겨줬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민자들의 삶을 뼛속 깊이 이해하는 1.5세 작가의 경험에 바탕을 둔 애틋한 이야기이다. ‘옷깃을 스쳐도 인연’으로 여기는 한국인들의 삶에 깊숙이 배어 있는 전통적 정서에 꽤나 진지하게 접근한다.
“살던 곳을 떠나도 그 자리에 그 사람의 일부가 남겨져 있다고 생각해요. 해성은 한국을 떠난 노라가 남겨 놓은 흔적을 23년 동안 붙들고 있다가 마침내 멀리 뉴욕으로 그녀를 찾아오죠.”
송 감독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현재로 끌어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두드려 본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게 사랑을 투영시킨다. 분명 노라가 결혼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만나야만 했던 해성과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한 노라 사이의 괴리감, 인연에 대한 집착, 열정 없는 설렘, 사랑일지도 모르는 화학작용 혹은 조용한 욕망이 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그들은 곧 헤어져야 한다. 노라와 해성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자제하고 얼굴만 쳐다보며 그렇게 며칠을 보낸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송 감독은 12세에 캐나다 토론토로 부모를 따라 이민 왔다가 다시 뉴욕으로 이주, 20대에 극작가가 되어 연극계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해성이 그녀를 찾아왔던 순간의 영감을, 그리고 그 인연을 끝내 한 편의 예쁜 영화로 탄생시켰다.
해성과 노라의 재회라는 핵심 사건에 세 명의 주인공들은 의문을 던지고 갈등한다. 그러나 그들은 논쟁을 하지도 질투와 불안감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사랑과 존중의 톤을 잃지 않으며 서로에게 관대하다. 그래서 늘 ‘어색함’이 있다. 쉽게 단어로 형언할 수 없는 이 어색한 분위기, 송 감독이 얘기한 ‘공상과학’과도 같은 느낌, 그 안에서 그녀는 사랑을 사유한다.
“아서는 성인이 된 노라와 결혼을 했지만 그녀의 지난 삶에는 해성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지요. 노라와 해성 외에 아서의 사랑에 대해서도 관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모든 걸 포용하는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노라와 해성 사이에 우정 이상의 감정이 미묘하게 꿈틀거린다. 아서는 해성이 노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부부 사이를 불편하게 한다. 20년 전 어린 시절 결혼할 사이라고 선언했던 해성과 노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그들은 여전히 친구 사이일까.
송 감독이 그리는 사랑은 비극도 코미디도 아니다. 멜로드라마는 더더욱 아니다. 노라와 해성은 그들의 떨어져 있는 삶 속에서 인연이라는 뿌리 깊은 친밀감을 찾아낸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누군가를 구속하고 또는 구속당한다. 해성이 23년 만에 자기 앞에 나타난 순간, 노라는 그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관계가 지속하여 오고 있었음을 깨닫게 됐다.
송 감독은 해성 역의 유태오와 노라 역의 그레타 리를 첫 촬영이 들어가기 전까지 만나지 못하도록 떼어 놓았다고 털어놓았다. 두 주연 배우는 첫 장면을 촬영할 때 비로소 처음 만난다.
“해성과 노라가 23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의 그 특별한 감정을 최대한 포착하려는 의도였어요. 두 배우가 리허설 없이 처음 만나 대화하고, 첫 포옹을 하는 장면의 떨림과 설렘을 리얼하게 담아내고 싶어서였지요.”
영화는 때로는 떠난 곳을 뒤돌아보는 향수처럼, 때로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연가처럼 느껴진다. 조용한 갈망 또는 갈등의 감정을 통해 다른 시대의 자신을 보게 한다. 누구나의 인생에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 하지 못했지만 했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 또는 반대로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인생에 정답이란 없어요. 중요한 건 어느 순간이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에요. 나의 인생으로 들어와 준 그 누군가 … 과거에 스쳐 지나갔던 또는 앞으로 스쳐 지나갈 그 누군가.”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말미의 긴 여운 그리고 넉넉한 여백은 내게서 너에게로 넘어가는 길이다. 이번 생에서는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노라와 해성의 인연. 인간은 사랑을 욕망하지만 또한 절제하는 존재들이다.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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