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수필] 벌거벗은 나무처럼 의연하게

지난밤에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간신히 버티고 있던 집 앞의 단풍나무 잎새들이 다 떨어져 버렸다. 곱게 물들었던 단풍잎들이 없어지자 나무의 몸통과 가지들이 앙상하게 드러났다. 화려했던 모습을 다 내려놓고 벌거벗은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즘 부쩍 늙어 보이는 것 같아 거울 보기가 싫다. 팽팽했던 얼굴 피부가 탄력을 잃고 주름도 부쩍  많아졌다. 흰머리가 섞인 푸석한 머릿결은 생기가 없다. 게다가 옛날 할머니 같은 헤어스타일로 더욱 노인처럼 보인다. 거울을 보고 나서 “내 얼굴이 왜 이렇게 됐지?” 한숨을 푹 내쉬며 옆에 있는 남편에게 공연히 짜증을 내면, 남편은 말한다.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뭐.  그대로 받아들여. 늙어서는 품위 있게 보이는 것이 최고야. 고상한 외양에만 신경 써.”  
 
누구나 살아온 만큼 나이를 먹고 늙는다. 까맣게 윤기 흐르던 머릿결은 거칠어지고 희끗희끗해진다. 피부는 늘어지고 눈도 처지기 시작하면서 세월을 실감케 된다. 그때부터 대부분이 머리 염색 등 젊어 보이려 필사적으로 애쓴다.      
 
최근 한국 방문에서 느낀 것은 젊은 여성들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연예인 등 자주 대중 앞에  서는 사람들은 성형수술도 많이 하는 모양이다. 연예인 가운데는 예전 TV에서 봤던 젊은 시절의 얼굴을 지금도 유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보톡스를 너무 맞아 내가 보기에는 얼굴이 망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은 젊게 보이려고, 젊은이는 더 예뻐지려고 성형수술을 한다.  요즘은 쌍꺼풀이나 코 수술 정도는 스스럼없이 공개하기도 한다. TV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가수는 쌍꺼풀 수술을 했는데 마음에 안 들어 두 번이나 했다고 밝혀 놀랐을 정도다. 참 용기가 대단하다.  
 
지난여름 프랑스에서 열린 ‘칸 국제영화제’ 레드 카펫에선 회색빛 머리를 늘어뜨리고 등장한 여배우 앤디 맥다월(65)이 플래쉬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등에 출연한 90년대 원조 로코 퀸이다. 60대가 되고 나서도 그녀에게는 ‘변함없는 미모’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런 그녀가 풍성한 갈색 마리가 아닌 흰머리가 섞인 반백의 모습으로 나타나 주목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것에 이제 지쳤어요. 더는 젊어지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어요. 사기극을 계속할 수 없어요. 나는 늙고 싶어요.  나이 들어가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싶어요.” 그녀는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염색을 중단했다고 한다.  “외출이 줄며 원래 내 얼굴과 피부, 눈의 생김새 등을 볼 수 있었죠. 그리고 그게 마음에 들었어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을 때 더 행복했고, 머리색이 회색빛이 되게 놔두고 나서 행복하게 내 나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또 “늙어가는 일에 왜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외모의 완성은 헤어스타일이라고 한다. 머리 모양에 따라 10년은 젊어 보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한다. 헤어스타일의 변화로 인상도 바뀐다.    
 
내 머리 모양은 옛날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쪽찌던 시대의 모습과 비슷하다.  비녀 대신 머리핀을 사용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LA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혼자 한국으로 혼자 귀국한 후부터다. 아이들 교육 문제로 한국과 LA 두 집 살림하다 보니 남편 월급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일하려고 해도 나이가 있는 데다 한국 경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지출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미장원 출입을 꺼렸던 게 30년이 훌쩍 넘었다. 내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이 나를 억지로 미장원에 데라고 가려 한 적도 있었다. 이젠 그 머리 모양이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하지만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검은 머리와 흰 머리가 섞여 희끗희끗해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와 인상이라고 생각한다. '멋’ 하면 젊은이의 전유물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머리가 반백인 노인의 기품은 젊은이들과는 다른 멋을 느끼게 된다.  
 
노년의 멋이란 고상한 품격에서 나온다. 붉게 물든 단풍이 꽃보다 아름답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서산의 노을은 황홀하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퍼스트레이디로 손꼽히는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니어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나간 젊음을 아쉬워만 하지 나이 듦을 인정할 생각을 못 한다. 영국의 작가 겸 교수인 루이스 월포트는 ‘You’re Looking Very Well'이라는 책에서 연령이 많은 사람이 행복지수도 높다고 밝혔다.  김형석 교수도 '100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에서 “65세부터 황금기”라고 주장했다.  
 
유대인 정신 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오랜 기간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지냈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몸뚱아리의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는 “최고의 존재는 벌거벗은 존재” 라고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적나라하게 내 늙음을 드러낼 용기가 없다.  짙은 눈화장으로 처진 눈을 보정하고 회색 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쓴다.    
 
또 한 해가 기우는 연말이다. 나뭇잎을 다 떨구고 의연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에서 내려놓음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 나의 참모습을 보여줘야겠다.  

배광자 / 수필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