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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리니치 빌리지의 명작

시나브로 비가 내리는 초겨울의 시애틀이다. 외출 시 우산을 챙겨야 할지 잿빛 하늘을 바라본다. 매서운 추위는 아니어도 외투 속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기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도심으로 오가는 이들의 표정이 무덤덤하다. 이런 감성을 ‘시애틀 프리즈(Seattle Freeze)'라고 한다. 가끔 비가 와서 먼 곳에 가기는 망설여져 마을 산책길에 나선다.
 
건축된 지 100여 년이 족히 넘었을 듯한 벽돌집들이 있는가 하면 고택 사이에 사면을 넓은 유리창으로 낸 현대식 주택들도 눈에 띈다. 이곳의 동백꽃은 캘리포니아보다 일찍 피는 것 같다. 비 오는 날이 많아서 나뭇잎 색깔이 청록에 가깝고 윤기가 돌아 퍽 싱그럽다. 나무가지 사이로 수없이 맺혀있는 꽃봉오리가 지천이다. 겹겹이 쌓인 꿈을 품은 채 꽃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에 반해 이미 한해살이가 끝난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늘어뜨리고 있다. 소슬한 바람이 가로수 사이를 스칠 때마다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계절 속으로 파고든다.
 
지역에 따라 나무의 종류도 다양해 나무마다 곁가지에 이끼가 군락을 이루는 등 건조한 기후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을 보여준다. 이끼에 대한 식물학적 고찰이 있겠으나 나무에 의지하며 더부살이를 하는 것 같고 나무는 마치 삶이 버거워도 품고 가는 덕성스런 여인네 같다.
 
가로수 이외에도 집집이 개성 있게 정원을 가꾸어 놓은 곳이 있어 그 앞을 지나는 이들에게 작은 기쁨을 준다. 붉은 벽돌 담 위로 기어오르는 담쟁이가 신기하다.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데도 잔가지를 치면서 안간힘을 다해 기어오른다. 이듬해 있을 초록의 변신을 꿈꾸며 비바람을 견뎌내고 있다. 몇 잎 남지 않아 파르르 떨고 있는 담쟁이 잎을 보니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가 생각난다. 친구들과 토론하던 그 시절로 간다. 책 속의 등장인물을 열거하며 각자의 감상을 열심히 피력했던 그때.
 
한 친구는 소설이긴 하나 벽에 남아있는 나뭇잎 숫자와 자기의 수명을 연결하여 생각하는 존시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다른 친구는 수와 존시가 만난 것은 겨우 6개월 정도인데 친구의 병세를 안타까워하며 여러모로 최선을 다하는 수의 보살핌에 감동했다. 또 다른 친구는 베어먼은 가족이 없었기에 다행히 아니었겠느냐고 덧붙였다. 종교심이 유별났던 한 친구는 비약하여 십자가의 희생을 부각했다. 우리는 모두 베어먼의 영웅적인 행동이 상황을 잘 분간했더라면 죽음까지 초래하지는 않았겠냐며 아쉬움을 표했다.
 
마지막 잎새를 요즘같이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사조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존시, 창밖을 내다보렴. 벽에 붙어있는 마지막 담쟁이 잎이 바람이 불 때 조금도 흔들리거나 움직이지도 않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 존시, 저 벽에 그려진 잎은 베어먼의 걸작이란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날 밤에 베어먼 영감님이 저 자리에 그려 놓으신 거야.” 아마도 수의 말 속에는 통곡 같은 흐느낌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등장인물 존시·수·베어먼, 그들은 뉴욕 워싱턴 광장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값싼 모델도 하고 잡지 삽화도 그리면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갔다. 그네들은 언젠가는 그곳을 떠나 찬란한 빛의 도시 나폴리에 가서 그림을 그리며 명작을 남기리라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그 명작은 나폴리가 아니고 우중충한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그려졌다. 그것도 진눈깨비 몰아치는 밤에.  
 
베어먼은 40여 년을 화가의 길을 걸었으나 변변한 작품 하나 그리지 못한 상태였다. 마지막 잎새가 명작이 될 줄을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작가 오 헨리의 삶도 만만치는 않았다. 한동안 일하던 은행에서 공금 횡령에 연루되어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교도소에 가서도 가족 부양을 위해  밤에는 글을 썼다. 그때 교도관에게서 감화를 받아 교도관 이름인 오 헨리를 필명으로 집필에 몰두한다. 그의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10년 동안 300여편의 글을 남겼다니 엄청난 분량이다. 오 헨리는 대표작인 '크리스마스 선물' 외에도 많은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감동을 받는 것이 책뿐이겠는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나 친절한 행동 하나가 타인에게 어떤 감동을 주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잎새처럼 또 다른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될지 모른다. 존시의 폐렴을 고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환자가 “아파서도 죽을 수 있지만 희망이 없을 때 죽음을 앞당길 수 있다”고 의사는 말한다. 심약한 존시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자기 몸 사리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 베어먼의 인간애는 참으로 가상하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돌아오는 길 교각 위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그 너머로 쌍무지개가 떠 있다. 혼자 보기에 아쉬운 광경이다. 무지개 하나는 삶을 되찾은 존시를 위하여, 다른 하나는 희생적 삶을 마친 베어먼 영감님을 위하여 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빗물이 그리움처럼 번져 있는 길 위에서 젖은 낙엽 몇 개 들고 와 창가에 놓고 리스트의 위로 '고독 속의 신의 축복'을 들으며 그들의 삶과 희생을 기려본다. 

독고 윤옥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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