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배우 윤정희의 아름다운 마지막
“고(故) 윤정희, 딸 바이올린 2시간 반 연주 속 눈감았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진하게 했다. 남편 백건우 씨의 말도 무척 짠하다. “병석의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진희는 간병 중에 자주 바이올린을 켰다. 마지막 날 아침에도 ‘보칼리제’를 포함해 두 시간 반 넘게 많은 곡을 연주했다.”
“사람이 나중에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잊어버리지만 듣는 것은 끝까지 살아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옆에서 좋은 말해 주고 대화하고, 또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마지막 세월을 치매로 고생하고, 가족 사이의 돈을 둘러싼 구설에 시달리기도 한 고인을 생각하면 한층 더 짠해진다.
죽음 앞의 어머니, 요단강을 건너는 어머니를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딸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속으로 속으로 아프게 울고 또 흐느꼈겠지…. 어머니는 편안하게 웃으며 강을 건넜겠지….
지난 1월 타계한 배우 윤정희 씨는 올해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공로상을 받았다. 개막식에서 딸 백진희 씨가 어머니를 대신해 상을 받았고, 바이올린 독주로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연주했다고 한다. 말 없는 가운데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원래 피아노 반주가 있는 곡이지만 진희 혼자 연주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내 개인적 생각이지만, 최고의 스타로 인기를 누린 한국 여배우 중 예술가의 품격을 지키려 노력한 배우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가다운 품위나 자부심을 지킨 사람은 더욱 드물다. 지난날 한국 영화계는 오랫동안 연기자를 예술가로 존중하기보다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마구 소비해왔다.
그런 점에서 윤정희 배우는 귀한 존재다. 물론 윤정희도 젊은 시절 문희, 남정임과 함께 60, 70년대 여자 배우 트로이카로 굉장한 인기를 누리면서 겹치기 출연을 거듭하며 스스로를 낭비했다. 출연작이 무려 300여 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겹치기 출연은 인기의 척도였다.
잠잘 시간도 제대로 없는 살인적 겹치기 출연에, 필름을 아껴가며 찍어야 하고, 후시녹음으로 성우들의 목소리에 기대는 환경에서는 천하 없는 천재라도 예술가의 수준과 품격을 지키기 어렵다. 불가능하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윤정희 씨가 나온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다. 그 당시 ‘먹물’들은 ‘국산’영화를 우습게 여기고, 물 건너온 서양 영화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나도 그랬다. 부끄럽다.
그래서 윤정희 씨가 출연한 영화로 기억에 남아있는 작품은 ‘내시’, ‘장군의 수염’, ‘독 짓는 늙은이’, ‘안개’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시’ 정도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시’는 배우 윤정희의 예술가적 면모와 품격을 소중하게 살린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윤정희는 칸영화제에 처음 초청돼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레드카펫에 올랐고,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관심을 모았다.
영화 ‘시’의 주인공 미자는 알츠하이머를 앓으며 아름다운 시를 쓰는 인물이다. 배우 윤정희도 같은 병과 싸우다 세상을 떠났고, 본명이 손미자다.
이창동 감독에 따르면, 영화 촬영 중 병이 시작된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 모든 커트에 예술가답게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연기자의 가장 큰 행복은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역을 맡아 좋은 사람들과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배우 윤정희는 행복한 예술가였다.
“영화인의 인생을 이 작품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시’는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에요.” 남편 백건우 씨의 말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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