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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의 이력서

나는 연방 정부 공무원으로 일하다 28년 전 조기 은퇴했다. 은퇴 이유가 겉으로는 개인 사정이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컴퓨터 공포증이었다. 나는 촌놈이다. 어느 정도 촌놈인가 하면 6·25전쟁 때 월남하기 전까지 시계를 볼 줄 몰랐다. 소학교에서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을 터인데. 나는 황해도 사투리로 ‘반편’ 즉 바보였나 보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에서 연방정부 공무원을 할 수 있었을까?  미국에 이민 온 사람은 누가 공항으로 마중을 오느냐에 따라 직업이 결정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아마 내가 단신으로 월남했을 때도 이민과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17세 때 월남한 나는 인천에 살던 고모를 만났다. 고모 집에서 당시 한국인 여자와 사귀던 미군 장교를 만났고 그의 소개로 미군 부대 장교 식당의 웨이터로 취업했다.  
 
손바닥만 한 영어회화 책으로 영어를 부지런히 공부해 인천 미군 유류저장소 수송부의 배차원으로, 그리고 안전관리 보조원으로 승진했다. 밤에 일하고 낮에는 공부해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했다.  
 


이후 군사 고문단 (KMAG) 소속 안전 고문관실의 통역 선발 고시에 합격하여서, 용산 육군 본부에서 6년, 그리고 국방부에서 2년을 안전관리 업무 개선을 위해 일했다. 가장 인상에 남는 임무는 차량 또는 폭발물 사고 방지의 시청각 교재를 가지고 전방 주요 부대를 방문하여 밤에 연병장에서 장병들에게 안전 교육을 한 것이다.  
 
군사 고문단 철수로 국무부의 ‘15년 케이스’ 특전으로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 이민을 왔다.  나는 호놀룰루에 있는 일본 식당에서 일하고 아내는 호텔 청소를 했다. 마침 미 의회에서 직업 안전 및 보건법이 통과되어 주마다 직업 안전과 직원을 모집했다. 어렵지 않게 하와이주 정부 직업 안전과의 검사원으로 선발되었다.  
 
검사원으로 6년 동안 오하우, 그리고 하와이 섬의 건축 공사장을 검열하였다. 그다음 2년을 안전 법규와 관련된 연방법을 주법으로 적용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드디어 직업 안전/보건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전문가가 되었다.  
 
시민권을 받은 후  하와이에서 몇 자리 되지 않아 ‘하늘의 별 따기’라는 연방 정부 안전 관리 공무원직에 응시했다. 그동안의 스펙으로 히캄 공군 기지의 지상 안전관으로 선발되었다. 이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남가주의 롱비치 해군 조선소로 전근했다. 이곳에서 나는 미주리 전함 수리와 정비 사업에 참여했다.
 
그 후 국방부 조달본부 서부지역 계약 사령부로 자리를 옮겼다. 나의 상대는 보잉과 같은 큰 국방산업체였다. 안전 감사 보고서 작성은 쉽지 않았다. 나의 짧은 영어 실력이 드러났다. 관사와 전치사, 그리고 단수와 복수 사용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전임자의 보고서를 표절하면, 나의 보스는 용하게도 잡아냈다. 그때는 Grammarly 문법 프로그램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모든 서류를 타자에서 컴퓨터로 옮기는 시대가 왔다. 나의 촌티가 드러났다. 아무리 컴퓨터를 배우려고 노력해도 컴맹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컴퓨터는 바윗덩어리처럼 무겁고 조작이 어려웠다. 컴퓨터가 두려워졌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압박감을 느꼈다. 왜 저녁에 컴퓨터 전문 학원에 다니지 않았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가뭄에 소낙비 같은 좋은 소식이 왔다. 한국에서 근무한 21년과 미국에서 근무한 기간을 합산할 수 있다고 한다. 이민 갈 때 이삿짐 속에 가져온 21년의 봉급 영수증과 우수 근무 상장 등 증빙서류를 중앙 인사처로 제출하고 회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원섭섭하게 은퇴했다.
 
컴퓨터 공포증으로 조기 은퇴했으나, 요즘 랩톱은 조작이 쉬워졌다. 컴퓨터로 이 메일을 주고받고, 은행 계좌를 운영하고, 공과금을 내고, 신문을 읽고, 음식 조리법을 배우고, 한국 뉴스도 듣는다. 컴퓨터 없이는 살 수 없다. 랩톱이 말썽을 부리면 딸이나 조카를 호출한다. 그 물건을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컴퓨터는 필요악이다. 문명의 이기(利器)는 골치를 아프게 만든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바다로 망둥이를 잡으러 가던 옛날이 그립다. 

윤재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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