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9월의 찬가
다가오는 9월 28일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수도 서울을 90일 만에 한국군과 UN군이 탈환하고 우리 해병대 용사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은 날이다. 그에 앞서 9월15일에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대규모 인천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작전 성공의 여세를 몰아 북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북한 인민군은 선제 기습의 이점과 전투력의 압도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사흘 만인 6월 28일 한강 이북 서울을 점령했다. 반면 전쟁 초기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이 사실상 맨주먹이나 다름없었던 국군은 필사적인 지연전을 벌이며 낙동강 방어선에서 결사 항전의 최후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적은 최종 목표를 눈앞에 두고 아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리하게 여러 차례 총공세를 감행해 피아간 처절한 피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드디어 전세를 회복한 한국 해병대와 미군은 나란히 인천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했고, 국군 1사단 17연대도 다부동 전투에서 반격 북상해 미 7사단과 함께 한강 도하 작전을 해 수도 탈환 작전에 일조했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쌓인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믿음과 신뢰는 휴전 이후 한미동맹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는 한미연합 작전 및 방위 체제, 즉 한미동맹 형성에 절대적 역할을 했다. 이것이야말로 전사에 길이 남을 협동작전이었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필자를 포함한 많은 10대가 어린 나이에도 나라를 지키고자 학도병과 소년병으로 입대했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도 기억해야 할 6·25 전사의 하나다. 그들의 헌신과 피눈물로 지켜낸 호국의 가치가 이 시대를 사는 청소년들에게,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 세대들에게 올바르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행히 유엔군이 파병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의 전력은 적을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전선 전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대규모 연합작전 성공은 전세를 뒤엎을 만했다. 곳곳에서 퇴로가 끊긴 적들은 중부 산악지역을 통해 38선 이북으로 퇴각하기 급급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적 패잔병과 그 잔당을 소탕하며 여세를 몰아 그해 10월 첫날, 동부전선에서 육군 3사단이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의 행군이 시작됐다. 서부전선에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1사단 17연대가 적의 수도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한 6사단 장병이 수통에 물을 담아 대통령께 드린 이야기는 한편의 감격스러운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의 꿈인지 중공군의 개입으로 민족의 소원인 남북통일은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접고야 말았다. 그들은 한국전쟁에 뛰어들어 인해전술로 남의 땅에 숱한 피를 뿌려놓고 돌아갔다.
6·25전쟁에서 서울 수복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북한군에 빼앗겼던 수도 서울의 탈환은 그만큼 우리 국민에게 감격스럽고 역사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었고, 서울을 다시 찾았다는 것은 자유를 되찾았다는 이상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국가의 간성인 군은 적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재산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모름지기 ‘평화를 사랑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교훈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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