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미학·대중성 다진 기념비적 시대
링컨센터 1960년대 특별전 상영작 <하>
전후사회 신랄한 비판 ‘오발탄’
진정한 영상시대 열었다 평가
당대 최고 흥행작 ‘맨발의 청춘’
새로운 청년문화의 탄생 담아
짜임새와 세련된 연출의 ‘안개’
60년대 한국영화가 닿은 정점
▶오발탄(Aimless Bullet, 유현목 감독, 1961년)
전후 재건 한국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1961년 상영 금지를 받았지만 가장 위대한 한국 영화 중 하나로 널리 칭송받고 있는 유현목의 대표작. 전쟁이 지나간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해방촌에서 살아남은 가족의 암울한 생존기를 다룬다. 정신이상자 어머니, 영양실조에 걸린 만삭의 아내, 상이군인 동생 그리고 양공주가 된 여동생이 등장하는 스토리를 누아르 형식으로 그렸다. 두 형제의 비극적 관계, 증오와 공포로 산산이 부서진 한 가족과 국가의 초상화. 한국영화의 진정한 영상시대는 ‘오발탄’ 이후라는 평가가 나왔다. 김진규, 최무룡, 문정숙, 윤일봉 출연.
▶여판사(A Woman Judge, 홍은원 감독, 1962년)
한국의 두 번째 여성 감독 홍은원의 데뷔작. 사법고시에 성공, 최초의 여성 판사가 된 진숙(문정숙)은, 여판사라는 아내의 사회적 지위에 열등감을 느끼는 남편 규식(김석훈)과 이에 편승하여 며느리를 오해하는 계모 시어머니, 그리고 시누이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나 한 가정의 아내와 며느리로서, 그리고 판사의 임무에 충실하던 중, 살인사건에 연루된 시어머니의 변론을 맡아 무죄판결을 끌어낸다. 1961년 한국 최초의 여성 판사 황윤석의 의문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었다.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는 평. 분실되었다가 50년 만에 세상 빛을 보게 됐다.
음악다방과 댄스홀, 트위스트 등 이전 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확연히 구별되는 청년 문화를 반영한 새로운 영화 장르 ‘청춘영화’의 대표작. 부유한 대사의 딸 요안나(엄앵란)와 사랑에 빠진 사창가의 폭력배 청년(신성일)의 이야기를 실패한 사랑, 낭만적 사랑, 비극적 사랑의 신화로 그려냈다. 극심한 계급 분열, 불안한 세대 갈등으로 거칠어지는 청년문화를 강하게 비판한 작품. 검열에 의해 금지될 뻔했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획기할 만한 25만 관객을 동원, 최고 흥행을 이루며 주연 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을 60년대의 대중 스타 커플로 떠오르게 한다. 최희준의 주제가도 크게 히트했다.
▶갯마을(The Seashore Village, 김수용 감독, 1965년)
오영수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문예 영화 대표작. 문예 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입증한 최초의 영화로 전후 한국의 분열된 정체성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해순(고은아)은 남편과 함께 갯마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나 어느 날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간 남편이 폭풍을 만나 죽게 된다. 해순에게 관심을 보이던 떠돌이 상수(신영균)를 그녀는 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온 마을에 소문이 나고 상수는 해순을 데리고 갯마을을 떠난다. 해순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사내들을 피해 첩첩산중으로 숨어 들어가지만 그들의 삶은 점점 힘겨워지기만 한다.
▶황혼의 검객(A Swordsman in the Twilight, 정창화 감독, 1967년)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에 영향을 주었던 홍콩영화 ‘죽음의 다섯손가락’(King Boxer, 1972)을 연출한 정창화 감독의 독특한 한국식 검술 영화. 한국의 풍경과 궁궐 건축, 짧고도 치명적인 검의 만남을 다룬다. 조선시대 민비와 장희빈의 알력을 배경으로 무법 마을에 홀로 등장한 검객 김태원(남궁원)은 건달 오기룡(허장강)에 의해 아내(윤정희)와 딸이 처단되자 음모 세력에게 복수할 날만을 손꼽는다. 곡예적인 홍콩 무협과는 대조적으로 한복을 입은 검객들이 대결하는 우아하고 절제된 액션 시퀀스들과 치밀한 편집이 돋보인다.
김수용 감독의 공간과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짜임새 있고 세련미 넘치는 연출로 60년대 한국 영화의 정점을 찍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에 상처받은 인간의 내면을 영화적 풍경으로 그려낸 ‘안개’는 김승옥의 모더니스트 소설 ‘무진 기행’이 원작이다. 장인 회사에서 상무로 있는 회사원(신성일)이 어린 시절의 고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일상의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음악 교사(윤정희)를 만나 욕정을 불사른다. 그러나 전무로 승진됐다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실리를 좇아 서울로 떠난다. 윤정희의 대담한 베드신이 화제가 됐다. 이봉조의 색소폰 연주를 따라 안개 속에서 인간의 건조하고 암울한 내면세계와 조우한다.
▶휴일(A Day Off, 이만희 감독, 1968년)
1968년에 제작되었으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37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겨울의 끝자락의 어느 일요일. 교회 종소리와 함께 빈털터리 허욱(신성일)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지연(전지연)의 낙태 수술을 위해 친구의 돈을 훔친다. 지연은 병에 들고 실의에 빠진 허욱은싸롱에서 만난 여자와 주점을 전전한다. 수술 도중 지연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와의 행복한 한때를 회상하며 거리를 내달리는 허욱, 씁쓸한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시적 표현에 담긴 사랑과 60년대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청년의 시점에서 고발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내시(Eunuch, 신상옥 감독, 1968년)
감각적 에로티시즘과 폭력이 주를 이룬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극에 달했던 당시의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다. 궁궐 내에서 벌어지는 대립 상황이 숨 막히는 긴장감을 불러온다. 궁궐의 권력 다툼과 불운한 로맨스를 다룬 신상옥의 사극. 조선 시대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욕구를 억누르고 살아야 하는 왕비와 궁녀들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심한다. 노출 없이 노골적으로 성을 묘사한 신상옥의 연출 스타일이 60년대의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다. 신성일, 윤정희, 박노식, 남궁원, 도금봉 출연.
김정 영화평론가 ckkim2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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