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칼럼] 불운과 냉전이 맞물린 KAL기 피격
1983년 8월 31일 오후였다. 이날 뉴욕 JFK 공항을 떠난 대한항공(KAL) 007편이 다음날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 탑승객 전원(269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종착지인 김포공항에 이르지 못한 채, 소련 영해에 흔적도 없이 묻혔다.
시신만 찾지 못한 게 아니다. 비극은 선명히 드러날 수 없었다. 당시 냉전의 시대상이 피격의 전말을 가린 탓이다.
희생자들은 말이 없다. 유가족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국무부 역사자료처, 워싱턴DC 의회 도서관 등에서 40년 전 기록들을 살펴봤다.
격추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1983년 9월 2일)이었다. 당시 국무부 차관보 리처드 버트가 조지 슐츠 국무장관에게 브리핑 메모를 보냈다.
“역설적이지만 이 끔찍한 비극은 대통령 정책에 영향력과 목적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우리는 이를 활용해야 한다.”
국무부 역사자료처에 보관된 이 자료는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오간 내용을 버트 차관보가 정리해 슐츠 장관에게 전달한 메모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KAL기 피격 사건을 반군 지원 등을 금지하는 내용의 볼랜드 수정법과 연결짓는 내용도 있다.
버트 차관보는 메모에 이렇게 적었다.
“볼랜드 수정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레바논과 시리아 지역 등에서 우리가 힘을 키워야 한다면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정치적 맥락에서 이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미·소간 냉전 상황 속에 대한항공 피격 사건이 어떻게 해석됐고, 이용됐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때 소련은 상당히 예민한 상태였다. 미국과의 대립 구도 속에 내심 쫓기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격추 사건 발생 전 소련을 ‘사악한 제국(evil empire)’으로 지칭했고, 곧이어 ‘스타워즈(Star Wars)’로 별칭이 붙은 전략적 방위 구상 계획까지 발표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항공 007편은 항로를 이탈, 소련 영공을 날았다. 불운과 냉전의 상황이 사할린 섬 상공에서 맞물렸다.
소련 측은 대한항공 여객기를 민항기로 위장한 미국의 정찰기라 판단했다. 소련 측 경고 사격에 조종간을 잡고 있던 당시 천병인 기장은 고도를 높여 전투기에 길을 터줬다. 그런데도, 소련 전투기는 지체 없이 미사일을 발사했다.
상대를 서로 ‘악마 화’ 하는 사이 의문은 결국 미궁으로 남게 됐다. 대한항공 007편이 항로를 이탈한 이유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조사 결과 등을 종합해보면 천 기장은 관성항법장치(INS)가 아닌 나침반에 의존해 비행기를 몰았지만 정확한 원인은 미스터리다.
이 사건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도 다룰 수 없었다. 워싱턴DC 의회도서관 자료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의회도서관 극동법률과가 1983년에 만든 8페이지짜리 서류(제목·대한항공 피격 사건과 관련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는 미국의 지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소련은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을 인정한 적이 없다. 미국은 시카고 협약(국제민간항공협약) 위반으로 소련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이 사건을 재판소에 회부한다 해도 소련은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비극은 냉전에 묻혔고, 유가족에게는 원인 규명 대신 보상금만 주어졌다. 그렇게 40년이 흘렀지만 유가족 가슴에 사무치는 슬픔까지 묻을 순 없었다. 본지가 그날의 기록들을 되짚는 기사를 보도했던 이유다.
아무도 모르는 진실이 아직도 남아있어서다.
장열 / 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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