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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아 시선] 한미동맹 70주년 (3) 1953년에 멈춘 인식 극복해야

전후석 다큐멘터리 감독

전후석 다큐멘터리 감독

올해 광복절 경축식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은 낯선 이야기를 했다. 한반도가 일본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한미동맹 70주년’을 강조하며 한미관계를 해방 서사의 핵심으로 제시한 것이다. 광복은 한미동맹보다 8년 앞선 일이라 그 연계성이 불분명함에도 ‘동맹’이라는 단어를 6번이나 사용했다.  
 
필자는 앞선 기고문에서 한미관계의 서사는 한미관계에 가장 큰 주인의식을 가진 미주 한인들의 서사를 통해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미관계의 본질을 한미동맹이 체결된 1953년으로 규정하는 것은 미국을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낸 ‘구원자’로, 대한민국은 ‘구원받은 대상’으로 고착화할 우려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지금의 양국 관계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어렵게 할 수도 있다.  
 
한인들에게 2023년은 한미동맹 70주년인 동시에 한인 이민 120주년이기도 하다. 한인 사회에 중요하게 생각되는 사건들이 다를 수는 있다. 여기서 탈식민주의 연구의 대가인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가 주장하는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관점에 집중해 보려 한다. 어떤 현상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진입점이 하나 이상일 경우 국가적 이념에 함몰되기보다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한미관계의 시초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1882년일 것이다. 조약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이 침략을 받을 경우 조선의 안보를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1905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 태프트 육군 장관을 파견해 일명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함으로써 5년 뒤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를 묵인했다.  
 


1903년은 미주 한인들에게 기념비적인 해다. 1월 13일 121명을 시작으로 그 후 2년 동안 7000여명의 조선인이 하와이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장훈련, 외교활동, 계몽운동, 성금 모금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한반도의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민 노동자로 미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며 한인 사회의 뿌리를 내렸다.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15일 사이도 한미관계는 의미심장한 시기였다. 해방 후 3년여간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 대사는 미군정기 중 벌어진 제주 4·3 사건 등을 언급하며 “일반적으로 한미관계의 출발점을 6·25 전쟁이라고 생각하지만 미군정기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한미관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1953년 휴전을 계기로 한미 양국은 동맹의 기초가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이때부터 한국 고아들의 미국 입양이 시작했고 그 수는 20만 명에 달한다. 국가중심적 서사의 그늘에 가려진 미군 신부와 입양인들, 그들의 후손 역시 한미관계에서 어떤 상징성을 갖는지 함께 고민해봐야 한다.
 
1965년도 주목해야 할 해이다. 미국의 개정이민법 통과로 한국 등 아시아권에도 이민 문화가 개방됐다기 때문이다. 이후 한인 이민도 폭발적으로 증가해 현재 200만 명이 넘는 미주 한인 사회 기반이 마련되었다.
 
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아마 1992년 4월 29일 것이다. ‘사이구’로도 불리는 ‘LA 폭동’이 발생한 날이다. 당시 한인 업소 2300여개가 약탈, 방화 등의 피해를 보았다. 한인 사회는 편향적 언론, 불공정한 사법제도, 무책임한 LA시 공권력과 제도적 인종차별의 최대 희생자가 되었다.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는 ‘사이구’를 통해 한인들은 ‘이민자’에서 ‘재미 한인’으로 거듭났다고 말한다. 경제적 안정과 자녀 교육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한인들이 폭동 후 정치력 신장과 인종화합 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미국 사회의 책임 있는 소수민족으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2020년 역시 상징적인 해로 기억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다섯 명의 한인이 연방하원에 도전해 네 명이 당선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들은 소속 정당은 다르지만 한미관계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또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아시안 대상 혐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한인들은 범아시아게 미국인으로서의 소속감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는 한인들이 다양한 이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해 깊이 있는 사유를 하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인들은 정체된 하나의 지점이 아닌 변화하고 진화하는 여러 서사를 통해 한미관계의 긍정적 가능성은 물론 어두웠던 과거 역시 깊이 있게 고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1953년에 머물러 있는 배타적 서사의 한계를 인식할 때이다.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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