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소설가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
러시아계 프랑스인 로맹 가리(1914~1980)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는 바람에 어머니와 함께 3세 때부터 리투아니아, 폴란드를 거쳐 18세에 프랑스의 니스에 정착한 유대인이었다.
그의 삶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치열했다. 전투기 조종사, 제2차 세계대전 영웅, 외교관, 소설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며 격정적으로 살았다. 여배우 진 세버그와 결혼한 화려한 삶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진 세버그는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작인 ‘네 멋대로 살아라’의 주인공으로 세기적 영화 아이콘이었다.
이처럼 비현실적일 정도로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가 정작 가장 괴로워했던 것은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는 삶이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었으나, 대중의 환상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온갖 헛소문에 시달리며 살았다.
“난 내가 삶을 산 거라는 확신이 그다지 서지 않는다. 오히려 삶이 우리를 갖고 소유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나는 살면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했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도 세상에서 다시 한번 자신으로 살기 위한 절실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로맹 가리를 퇴물 취급하던 사람들은 혜성 같이 나타난 천재작가 에밀 아자르를 찬양했다. 둘이 동일인물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런 세상에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것이다.
그리고, 1980년 겨울, 그는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향년 66세.
로맹 가리를 생각할 때마다 감동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의 어머니다. 억척스러운 홀어머니의 지대한 관심은 오로지 그가 성공해 행복한 프랑스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 바람대로 로맹 가리는 법학을 공부했고, 2차 세계대전에 항공 대위로 참전한 공로로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중복 수상이 금지된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소설가로도 성공했다.
로맹 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공군에서 복무할 당시, 어머니의 편지를 계속해서 받았다. 편지에는 사랑하는 아들이 전쟁 위험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온을 찾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들은 오랜 시간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지만, 사랑이 듬뿍 담긴 어머니의 편지를 계속 받아 읽으면서,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편지들은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낸 편지들이었다. 위암에 걸린 어머니가 전쟁터에 있는 아들을 위해서 200여 통의 편지를 미리 준비했던 것이다. 어머니란 그런 존재다.
로맹 가리는 그 사실을 3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런 어머니 사랑 덕에 천재작가 로맹 가리가 있었다.
1980년 12월 2일 ‘결전의 날’이라는 제목의 짧은 유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한바탕 잘 놀았소. 고마웠소. 그럼 안녕히.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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