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오펜하이머의 심적 고통과 핵무장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 미국 정부는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에 열성적으로 참여해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개발한 원자폭탄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사람이 사망한 것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훗날 자신의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수소폭탄 제조는 강력히 반대했다.
이로 인해 미국 정부는 오펜하이머를 매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생전에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가 미국 공산당의 당원이었고, 그의 첫사랑인 진 태트록도 공산주의에 공감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관계로 그는 여러 해 동안 공산주의 관련 단체들의 모임에 참석하며 기부를 했다.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후 수소폭탄 개발에도 성공하자,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 및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 모든 공직에서 쫓겨났다. 그는 힌두교의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며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며 한탄했다.
그 당시, 아인슈타인 박사는 인류공존의 문제에 대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에서 “국가를 무장시킴으로써 안보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현재의 군사기술 상태로 볼 때 비참한 결과를 초래시키는 환상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같은 환상은 미국이 최초로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했다는 사실 때문에 조장되어온 것이며, 이러한 개발의 무시무시한 특성은 그 개발이 분명히 자제할 수 없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아인슈타인 박사는 국가들의 평화스러운 공존을 위해 첫 번째, 상호간의 두려움과 불신을 제거하기 위해 대량 파괴 수단을 포기할 것, 두 번째, 초국가적인 사법 및 행정기구를 설립하여 각국 안보에 관한 당면 문제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것, 세 번째, 모든 형태의 평화적인 협력은 우선 상호 간의 신뢰에 바탕을 둘 것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한반도에는 북한의 계속된 도발로 인해 여전히 핵무기가 공포스러운 현실로 남아 있다. 더군다나 정치권의 일부 인사들은 보수적 여론을 결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자적 핵무장론’까지 제기하며 핵무장 방법을 찾겠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가 독자적 핵기술을 개발하려면 북한처럼 핵확산방지조약(NPT)부터 탈퇴해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과 등질 각오도 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도 한국의 핵무장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즉각적인 무역보복에 나설 것이다.
그렇다. 핵무장론은 한반도를 넘어서는 매우 복잡한 국제정치적 사안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펜하이머 박사가 겪었던 크나큰 심적 고통과 아인슈타인 박사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평화스러운 공존을 위한 제안’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라번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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