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 관계
그룹 사이즈가 12명 이상으로 커지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의 진행이 힘들어진다. ‘대화’는 그룹 멤버들 사이에 오가는 말, 또는 그룹 리더가 그룹에게 하는 말로 이루어진다.16명이 극장식 좌석배열로 앉아있다. 깊이 있는 대화의 장을 열기는 어려울 것이다. 몇몇 적극적인 성격의 환자가 강의를 도와줄 것 같다. 오래전부터 ‘인간관계’라는 제목으로 환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노려왔다. 걸핏하면 주먹다짐할 뿐더러 서로 깊게 미워하는 관계에 쉽게 빠지는 불안하고 다정다감한 여러 환자가 내게 동기의식을 부추긴 점도 있다.
‘관계, relationship’의 예를 들어 봐라. 성미 괄괄한 한 환자가 숨 가쁘게 대답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같이하고 섹스를 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아, 누구나 쉽게 알아듣는 남녀관계 말고 다른 인간관계는 없는지.
아무도 가족관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친구 관계는 어떠냐.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당황스럽다. 병동 안에서 같이 지내는데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없느냐, 하고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희들은 자기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를테면 “I hate myself! 나는 나를 미워한다!”고 말했거나 생각한 적이 있는지. 있다면 손들어 봐라. 대여섯이 대뜸 손을 든다.
나를 미워하는 내가 있고, 내게서 미움을 받는 내가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렇다. 내가 하나인 것 같지만 나는 둘이다. 나를 점검하는 내가 있고, 점검을 받는 내가 있다. 자아심리학, ‘Ego Psychology’에서 ‘자기관찰, self-observation’이라 일컫는 컨셉이다. 사람이 붐비는 식당 안에 붙은 표지, ‘물은 셀프입니다’에서처럼 말이 이상하지만, 자기관찰도 셀프다. 힘겨워도 혼자 하라는 뜻이다.
‘self-observation’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같은 뜻으로 성찰(省察)이라는 말이 있다. ‘반성(反省), 자신의 언행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봄’ 할 때의 살필 省, 그리고 경찰(警察)의 ‘살필 察’! 이 처치 곤란한 한자어는 뼈아픈 반성을 한 후 경찰서에 자진 출두해서 소정의 벌을 받는 정경을 연상시킨다.
‘I love myself!’라고 자신에게 말한 적이 있는 환자는 손을 들어보아라. 누군가 “That’s narcissism! 그건 나르시시즘입니다!” 하며 세차게 소리친다. “I am patting myself on the back, 내 등을 스스로 쓰다듬어줍니다.” 하는 마음도 나르시시즘이냐?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세상에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겠다는 게 뭐가 나쁜가. 자신을 증오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이 험난한 시대에 내가 나를 격려하지 않으면 누가 해줄 것인가.
이웃을 사랑하라, 살생하지 말아라,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따위는 하나같이 ‘남들’과의 관계를 위한 교훈이다. 나와 나 자신의 관계는 대관절 어쩌라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도중에 ‘God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금언이 떠오른다.
영국의 한 정치가가 1698년에 처음 발언했다는 기록이 있는 이 말은 원래 고대 그리스 격언이었다 한다. 그리고 1757년, 100달러 지폐의 주인공, 투실투실한 얼굴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새삼스레 세상에 다시 전파한 이 명언이 왜 이리 뇌리에 사무치는 것인지.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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